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17화 (817/925)

817회

84. 공작님과 살롱 (15)

결론부터 말하자면 피를 응축시켜 만든 기다란 손톱은 세르펜스에게 닿을 수 없었다.

악마 놈이 거리를 한껏 좁히고 팔을 휘둘러 세르펜스를 할퀴려는 찰나, 둘 사이의 좁은 간격을 가르며 화살 비가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에드나가 활짝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유지스가 지원 사격을 한 거다.

화살 비 사이에는 테일러가 던진 것으로 추정되는 단검도 섞여 있었다.

악마를 노려 봤자 망토로 막아 버릴 테니, 놈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세웠나 보다.

해당 전략은 유효했다.

이단 심문관의 신성력이 듬뿍 담긴 단검에 악마는 본능적으로 주춤했고, 유지스의 화살 비는 악마의 시야를 혼란케 했다.

세르펜스는 아군의 지원을 헛되이 넘기지 않고 기회로 살렸다.

쏟아져 내리는 단검과 화살 사이로 침착하게 검을 찔러 넣었다.

녀석이 쓰는 검이 가느다란 편이라고는 하나, 불규칙한 화살과 단검의 궤적에 겹치지 않도록 검을 내지르는 건 대단한 기예다.

악마는 세르펜스 또한 당연히 자신처럼 동작을 멈출 거라 생각했던 건지, 세르펜스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은빛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검이 악마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아까 세르펜스가 기습할 때 단검을 박아 넣었던 바로 그 자리다.

"크악!"

악마가 어깨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나서야 화살 비가 멈췄다.

나는 숨을 내쉬고 다시 크게 들이마시며 호흡했다. 집중하느라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길게 느껴졌지만, 화살과 단검이 쏟아져 내린 건 고작 수십 초에 지나지 않을 터.

그러나 바닥에 꽂힌 화살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단검의 수도 꽤 되었으나 화살이 훨씬 압도적으로 많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속사(速射) 연습을 하더니, 엄청나게 빨라졌네.'

유지스의 손가락이 걱정되긴 했지만, 이단 심문관이기 전에 성직자인 테일러가 곁에 있으니 안심이다.

곧바로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았겠지.

"아악-! 악마님께 상처가!!"

"네 녀석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신입님도 저 이단 놈들과 한패셨습니까?!"

"말도 안 돼! 신입님만큼은 절대로 우리와 같은 부류일 거라고 확신했는데!"

악숭 귀족들이 호들갑 떠는 거로 보아, 그들의 눈에도 악마의 부상이 상당히 심각해 보였나 보다.

하기야 그냥 검도 아니고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검이 어깨를 완전히 관통해 버렸으니.

두족류 악마처럼 재생력에 모든 능력치를 몰빵한 게 아니고서야, 회복하는 데 시간이 꽤나 걸릴 테다.

악숭 기사들도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윈스톤이 내 손에 들린 세니어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휘둘러, 근처에 있던 악숭 기사들의 목을 단숨에 베어내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마력 구속구 문제도 해결할 겸 에드나가 있는 곳에 나를 데려다 줄 생각인가 보다.

뒤늦게 악숭 기사들이 제정신을 차렸지만, 푸로르가 곰의 앞발 형태를 한 손으로 놈들을 날려버렸다.

한편 세르펜스는 내 쪽을 보지도 않고, 조급해 보이는 표정으로 바닥에 꽂힌 화살을 뛰어넘어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놈이 한쪽 팔을 못 쓰는 동안 몰아붙여야 한다고 판단했나 보다.

살기등등한 세르펜스의 기세에 악마가 전투태세를 취하려다가 '윽!' 하는 신음을 흘렸다.

악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고통스러워 한다기보다, 다른 것에 짜증이 난 듯한 표정이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떠올렸을 때, 악마의 망토가 또다시 꿀렁거리더니 이번에는 검붉은 창이 튀어나왔다.

망토에서 창이 튀어나온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무슨 추적 기능이라도 달린 건지 세르펜스가 방향을 트는 대로 창도 따라왔다.

방패 형태로 신성 결계를 펼쳐 비스듬히 비껴내도 마찬가지였다.

정면으로 막아 낸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세르펜스가 창 때문에 애를 먹고, 윈스톤이 나를 에드나 옆에 내려놓는 사이.

악마는 한쪽 구석에서 벌벌 떠는 사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이제 와서 성검의 주인과 룩스메아 교단이 널 용서해 줄 것 같으냐? 네놈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살고 싶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나를 치료해라!"

치료라니?

너무 의외의 단어가 악마의 입에서 튀어나와 일순 머리가 멍해졌다.

그래도 악마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제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변성력이 악마에게 스며들었고, 악마가 다쳤던 어깨를 빙빙 돌리며 멀쩡함을 과시했으니까.

"아니···, 잠깐만···. 악마를 치료하는 건 반칙이지!!"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변성력으로 살민숭들을 치료한 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어쨌거나 변성력의 기원은 신성력이었고, 살민숭들은 체내에 흑마력을 쌓지 않은 일반인이었으니까.

그런데 악마까지 치료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악마를 기습하는 게 아니라, 사제부터 처리했지! 어차피 악마 놈은 도망칠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나는 사제를 노려보았다.

놈에게 마법과 화살, 단검이 날아들고 있었다. 에드나와 유지스와 테일러도 사제를 최우선으로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사제는 진작에 결계를 펼쳐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었다.

법숭이도 마법을 펼쳐 사제에게 가해지는 공격 중 일부를 상쇄시켰다.

악마는 그 모습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보았다.

놈은 무척이나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까지 사제를 보호하고자 나서지 않아도 되겠다고 판단한 걸 테다.

"프라시더스 놈이 나와 싸우면서 상처를 치료하는 걸 보고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와 밖에 있는 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때에도 말이지. 그런데 내가 사제에게 치료 한 번 받았다고 반칙 소리를 들어야 하나?"

"그렇게 따지면 할 말이 없기는 한데···. 악마에게 신성력은 쥐약 아니었어? 대체 신성력에 무슨 짓을 했길래 악마를 치료할 수 있게 된 거야?"

"정 알고 싶다면 마신 테네브리오 님을 따라라!"

악마는 그렇게 외치며 세르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알려주기 싫다는 뜻이다. 그럴 줄 알았기에 기대도 안 했다.

나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세르펜스를 살폈다.

녀석은 아직도 악마의 망토에서 튀어나온 창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악마까지 자신에게로 달려들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걸까?

결심했다는 듯 표정을 굳히며 왼손에 신성력을 두르고 창을 낚아챘다.

세르펜스가 신성력을 불어넣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이 터지며 사방에 검붉은 액체가 튀었다.

창의 부피보다 몇 배는 더 많아 보이는 양이다.

'망토가 꿀렁거리며 움직일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피를 압축해 놓은 거였나?'

머릿속으로 악마가 두른 망토의 성분을 분석하고 있는데 손에 단단한 무언가가 잡혔다. 익숙한 그립감이다.

고개를 내려 확인해 봤더니, 윈스톤이 방금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뒀던 세니어를 다시 꺼내서 내 손에 쥐여 주고 있었다.

"그냥 세니어를 꺼내라고 말만 해도 됐을 텐데···."

"했는데 무시했잖소."

윈스톤이 뚱한 목소리로 내 말을 맞받아쳤다.

사제가 변성력으로 악마를 치료한 것에 놀라고, 세르펜스를 걱정하느라 경황이 없어서 윈스톤의 목소리를 못 들었나 보다.

[성검의 주인]에서 신성력 회복 효과를 누릴 수 있었던 건, 타락펜스를 제외하면 주인공 휴마누스의 아군뿐이었다.

적들은 부상이 누적되며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 반면, 주인공 일행은 지치는 것을 제외하면 처음과 똑같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휴마누스는 본인보다 무력이 강한 적을 꺾을 수 있었고 위기도 많이 넘겼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놀라지 않고 배겨?!'

나는 세니어를 단단히 쥐며 주변을 살폈다.

윈스톤의 목에 걸려 있던 마력 구속구는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는데, 아마 리에나가 신성력으로 끊어 준 걸 테다.

에드나는 바쁘게 마법진을 그리며 법숭이의 흑마법을 맞받아치는 중이었고, 푸로르는 악숭 기사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좀 더 시야를 넓히자, 악숭 귀족과 악숭 시종 혹은 시녀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민숭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투 양상은 악마가 더 우세한데 왜 저러나 의아한 것도 잠시.

'이제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으니까 저러나 보네.'

다시 주변을 잘 살펴보자 악숭 기사가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푸로르가 머리를 날려버린 게 마지막 놈이었나 보다.

애초에 악숭 기사는 고작 열둘에 불과했으니만큼, 잠깐 사이에 놈들이 모두 죽어버린 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사제가 악숭 기사들을 지원했다면 조금 더 버틸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결계 안에서 무릎을 꿇고 누군가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 대상이 룩스메아인지 마왕인지는 본인만 알겠지.

푸로르가 윈스톤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기민한 몸놀림으로 법숭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만약 일행들에게 위험이 닥치더라도 윈스톤이 지켜줄 테니, 안심하고 법숭이의 숨통을 끊으러 간 거다.

법숭이는 에드나의 마법을 맞받아치느라 푸로르의 접근을 저지할 수단이 없었다.

"하이마 님, 살려 주···!"

그게 놈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만약 법숭이에게 조금 더 시간이 주어져 도움 요청을 끝마쳤더라도, 악마는 놈을 구해주지 않았을 거다.

악마가 보호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었으니까.

법숭이가 죽자마자 악마의 망토에서 피 한 덩이가 떨어져 나가 사제의 결계 위를 덮었다.

'법숭이가 맥없이 죽고 인간을 업신여기는 악마가 직접 나서서 사제를 보호할 정도면, 더 이상의 적은 없다고 봐도 되는 거려나?'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유지스와 테일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세르펜스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며 사제를 보호하는 여유까지 부렸다.

밖에 있는 둘은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지 여러 방향에서 화살과 단검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어느 창문에서 어떤 각도로 공격이 가해지든.

화살이 머금은 기운이 무슨 속성의 정령에게서 비롯된 힘이든, 혹은 신성력이 깃든 단검이든.

피의 망토가 꿀렁거리며 모조리 쳐냈다.

아까 악마의 어깨를 꿰뚫었을 때처럼 코앞에 화살 비를 내리게 하는 것도 소용없었다.

망토를 넓게 펼쳐 화살 비를 걷어내며 세르펜스에게 달려들거나, 아니면 일찌감치 뒤로 빠져버렸으니까.

"으악!"

갑자기 들려온 푸로르의 비명에 놀라서 쳐다보니, 사제를 보호하던 피의 장막이 그녀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푸로르가 허겁지겁 도망치자 끝까지 쫓아가지는 않았다.

"어휴, 깜짝이야···. 저거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되겠는데?"

"무슨 마법을 날리든 꿈쩍도 안 하네요. 불을 질러도 기화되지 않고, 반대로 얼려 봐도 얼지 않고. 그렇다고 물리적 충격에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푸로르가 후다닥 일행 곁으로 돌아와 난감을 표하자 에드나도 곤혹스럽다며 공감했다.

악마가 조종하는 것만 봐도 평범한 피는 아닐 것 같다고 예상은 했건만. 대체 저 핏덩이는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접근하면 피의 장막이 그 사람을 덮치려 드는 것 같으니, 그때 일시에 공격을 퍼붓는다면 사제를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잠깐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바로 철회했다.

피의 장막을 유인해내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너무 위험해지는 데다가, 그 장막 아래에는 사제의 결계도 있다.

아까 유지스와 테일러, 에드나가 일시에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버틸 정도로 결계는 견고했다.

긴 시간을 들이면 결계를 깰 수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나 오래 피의 장막을 떼어 놓을 수는 없다.

'쭉 결계에 보호받는 쪽이라서 몰랐는데, 그것을 깨야 하는 처지가 되어 보니 엄청 짜증 나는 거였구나?'

그렇다고 지금까지처럼 원거리에서 피의 장막을 계속 두드려 댈 수도 없다.

공격이 먹히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힘 낭비가 너무 심하다.

"그냥 악마가 크게 다쳐서 치료를 받으려고 장막을 걷는 순간을 노리는 게···, 아! 쫌!"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악마의 망토에서 피로 된 창이 쑤욱 솟아나 이쪽으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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