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8회
84. 공작님과 살롱 (16)
세르펜스는 서둘러 창을 잡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망토에서 창이 하나 더 튀어나와 녀석에게 날아간 탓이다.
자신에게로 날아드는 창을 잡아채 터트리랴, 악마가 휘두른 손톱을 검으로 쳐내랴.
손발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세르펜스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이쪽을 힐끔거렸다.
"이쪽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악마나 신경 써!"
한눈 팔다가 세르펜스가 다치기라도 할까 염려되어 그렇게 외치긴 했지만,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내 쪽으로 날아온 창을 막아낸 건 윈스톤이었다.
그는 오러를 씌운 커다란 검을 휘둘러 창을 튕겨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해결될 일이면, 세르펜스가 전투 중 한눈을 팔면서까지 나를 걱정하지 않았을 거다.
이제 녀석은 윈스톤과 동료들을 믿으니까.
튕겨진 창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머리를 틀어서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쏘아졌다.
이번에는 푸로르가 손에 드루이드의 기운을 두른 채로 창을 향해 뻗었다.
그러다가 돌연 손을 곰의 앞발 형태로 바꾸더니 발톱으로 피의 창을 쳐냈다.
분명 창을 낚아채려던 움직임이었는데 갑자기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세르펜스 나리처럼 창을 붙잡아서 내 기운을 밀어 넣을 작정이었는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 아무래도 신성력이 아니면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제가 해 볼게요!"
푸로르의 동물적인 감각은 믿어도 좋다.
동료인 리에나도 그것을 알기에 내 앞을 막아서며 당차게 외쳤다.
그러나 어정쩡하게 서서 너클 글러브를 낀 손을 내민 뒷모습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저래서야 창을 잡기는커녕 그냥 찔릴 것 같다.
윈스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창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검을 휘둘러 그것을 멀리 쳐냈다.
"아주 잠깐이라면 제가 움직임을 멈출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에드나가 빠르게 마법진을 그려냈다.
창이 다시 날아온 순간, 마법진에서 사슬이 여러 갈래 뻗어 나와 그것을 붙들었다.
푸른 마력의 사슬에 붙잡히고도 검붉은 창은 계속 나아가려 했다.
불안하게 진동하는 마력의 사슬이 끊어지기 전에, 리에나가 서둘러 피의 창을 잡고 신성력을 밀어 넣었다.
핏물을 사방에 흩뿌리며 터져버린 창을 보며 안도한 것도 잠시뿐.
걱정이 커졌다.
'고작 창 하나 날아온 거로 이렇게까지 애를 먹어야 한다고?'
이곳은 한 명의 강자가 수십 수백의 대군을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니 강한 악마의 힘이 담긴 공격을 막아내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알고 있다.
더욱이 악마가 피의 창을 마구 쏘아내는 게 아닌 것으로 보아, 놈에게도 부담되는 공격 방식일 터였다.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앞으로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사제라는 새로운 위협 요소도 생긴 데다가, 갈수록 더 강한 악마가 나타날 텐데···.'
지금 싸우는 악마만 해도 그렇다.
교단이 이 악숭 살롱을 발견하는 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저 악마는 지금보다 더 강해졌을 거다.
악마가 싸우는 모습을 봤을 때, 놈이 지닌 힘의 원천은 분명 '피' 그 자체일 터.
이렇게나 강한 악마가 어떻게 볼타 산맥의 결계가 깨졌던 그 시기에 소환될 수 있었는지, 아주 잘 알겠다.
분명 이전에 축적해온 피를 전부. 혹은 대부분 버리고, 약해진 상태로 차원을 넘어왔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소환된 이후 꾸준히 피를 모아서 이만큼이나 강해진 걸 테다.
'그럼 반대로 피를 소모하면 약해지려나?'
나중 일을 걱정하는 건 일단 미뤄 두고, 눈앞의 악마를 상대할 방법이나 고민해 보려던 그때.
눈치도 없이 웬 얼빠진 목소리가 내 상념을 끊어냈다.
"저, 정말로···, 네가 신의 사자야? 그리고 저 악마 숭배자들 못지않게 가학적인 취향을 가진 여자···분은 네 동료고?"
목소리의 주인은 밥이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조용히 있는 데다가 악마도 딱히 죽이려 들지 않길래, 신경을 완전히 끄고 있었건만.
드디어 상황 파악을 끝내고 제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그러고 나서 멀뚱히 서 있는 내게 말을 건넨 거겠지.
"반응이 너무 느린 거 아닙니까?"
"신의 사자가 개처럼 짖고 그 동료라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며 좋아라 한다는 걸, 대체 어떻게 해야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데?!"
밥의 외침에 에드나가 마법진을 그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꿍얼거렸다.
대충 들어보니 밥 앞에서는 절대로 베일을 벗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 같았다.
얼굴을 드러내기 꺼려질 정도로 자신이 맡은 배역이 부끄러웠나 보다.
나는 에드나가 더 당당해졌으면 좋겠지만, 그 의견을 존중하여 밥 앞에서는 그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기로 했다.
"명색이 신의 사자인데, 대의를 위해 그 정도 연기는 할 수 있어야죠. 제 동료들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전부 연기였다고?"
"당연하죠. 세르펜스가 부자인데, 제가 뭣 하러 사업 투자를 받겠다고 남 앞에서 개처럼 짖겠습니까? 이 살롱에 초대받기 위해 미리 설정을 짜서 연기한 것뿐입니다."
"그냥 악마 숭배자들을 찾아내서 싸우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고된 직업이죠?"
"그러게···. 아, 아니. 그러게요···?"
밥이 존댓말을 사용하며 나를 존중해 주었다.
간신히 나를 신의 사자라고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런데 저희는 언제까지 묶여 있어야 하는 겁니까?"
"다들 바쁜 거 안 보여요? 여유롭게 밧줄 풀어줄 시간 같은 거 없으니까,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리세요. 정 불편하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검도 많은데 그거라도 주워서 해결하시든가."
"그쪽은 한가해 보이시는데···."
"저도 엄청 바쁘거든요? 생각할 게 많으니까 말 걸지 마세요."
사실은 세니어의 결계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밧줄을 풀어줄 수 없는 거였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자니 신의 사자 체면이 안 살아서, 일부러 까칠하게 말하며 대화를 끝내버렸다.
"···이대로 묶여 있으면 공격을 받았을 때 피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지?"
밥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밥기사를 빤히 쳐다봤다.
모시는 왕자님이 대놓고 눈치를 주니, 밥기사는 밧줄에 묶인 채 바닥을 기어서 제일 가까이 있는 단검을 집으려고 용을 썼다.
'윈스톤처럼 열심히 근력을 키웠다면 바닥을 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밥기사는 겨우겨우 단검을 손에 쥐었다.
혼자서 밧줄을 끊으려고 낑낑대는 밥기사를 보며 밥과 밥시종이 눈빛으로 응원했다.
나는 밥기사의 노력을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 악마와 싸우는 일행들의 모습을 살폈다.
다들 나와 마찬가지로 악마가 피를 소모하면 약해질 거라는 결론에 도달한 걸까?
놈이 피의 창을 뽑아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악마의 망토에서 한 번에 세 개의 창이 튀어나왔다.
그중 하나는 세르펜스에게, 또 하나는 창문 밖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쏘아졌다.
세르펜스야 알아서 잘 처리했고, 밖으로 날아간 건 테일러가 해결했을 테니 문제없다.
우리 쪽으로 날아온 창은 아까처럼 일단 에드나가 마법으로 붙들어 놓고, 리에나가 터트리는 방식으로 없앴다.
그게 여러 번 반복되었다.
"이거 신성력 소모가 꽤 심하네요."
리에나가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문질러 닦아내며 말했다.
지친 얼굴의 에드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보였다.
에드나도 마력 소모가 극심한 모양이다.
하기야 법숭이랑 마법 대결을 하느라 안 그래도 마력을 많이 소모했을 텐데. 그 상태로 창을 붙들어 놓는 역할까지 맡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세르펜스는 괜찮나···?'
녀석의 검에 깃든 신성한 은빛이 많이 약해져 있는 게 보였다.
피의 창이 날아와도 바로 터트리는 걸 보니 신성력이 완전히 바닥난 건 아닌 듯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신성력을 최대한 아끼느라, 악마의 손톱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신성력만 검에 둘러놓은 거겠지.
공격은 완전히 포기하고 그냥 버티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나 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악마도 모아 놓은 피를 상당량 소모하여 조금 약해진 건지, 지친 세르펜스를 상대로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 안도하는데 문득 카펫에 흡수되다 못해,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핏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살민숭들이 잔에 담아 놓은 피가 난리 통에 전부 엎어진 까닭이다.
'어···? 피를 직접 마셔서 흡수하는 게 아니라면, 설마···?'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악마도 그걸 알고 있다.
심지어 악마는 본능적으로 성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휴마누스가 어디까지 왔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겠지.
'그런데 자기 힘의 원천인 피를 이렇게나 막 소모한다고···?'
악마는 위태롭게 버티며 시간을 끄는 세르펜스를 향해 손톱을 휘둘러대며, 짙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초조한 기색 따윈 읽히지 않았다.
'바닥에 피가 이렇게나 많이 고여 있으니, 얼마든지 힘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악마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휴마누스가 거의 도착하여 우리가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희망을 품었을 때.
바닥에 모인 피를 흡수하여 회복된 힘으로 단숨에 몰아쳐, 세르펜스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걸 테다.
그때쯤 되면 일행들은 모두 지쳐서 휴마누스에게 도움을 줄 수 없을 거다.
그리고 휴마누스는 간발의 차이로 구하지 못한 친우의 시신을 보고 충격받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악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겠지.
휴마누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던 거다.
'일단 바닥에 고인 피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아! 성수가 섞인 피라면 악마가 흡수 못 하지 않을까?'
불현듯 아공간 주머니 속에 잔뜩 쌓여있는 세르펜스표 성수가 떠올랐다.
나는 성수를 몽땅 꺼내서 발밑에 두고, 세니어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가 도로 꺼냈다.
그리고 할 일 없는 이들에게 친히 일거리를 주기로 했다.
"왕자 저하랑 거기 두 분. 이거 뚜껑 열어서 바닥에 뿌려요. 최대한 넓게 넓게, 골고루."
"예? 이게 대체 뭐길래···."
밧줄을 풀고 자유의 몸이 된 밥트리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자세히 설명할 시간 같은 건 없다. 악마가 눈치채기 전에 최대한 성수를 퍼트려야 하니까.
"신의 사자인 제가 여러분에게 쓸데없는 일을 시키겠습니까? 중요한 일이니까 빨리빨리 움직여요!"
내가 신의 사자라는 직함까지 들먹이고 나서야, 밥 트리오가 군말 없이 성수가 담긴 병을 하나씩 집어들었다.
나는 세 사람이 성수를 뿌려대는 모습을 감독하며 틈틈이 악마의 눈치를 살폈다.
악마가 상황을 파악한 건 바닥에 굴러다니는 빈 병이 여섯을 막 넘겼을 때였다.
"네놈들! 이 귀한 피에 대체 무슨 짓이냐!"
"비위 상한다는 표정으로 피를 안 마신다고 부정했던 주제에, 귀한 피를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 않아?"
"내가 그때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건 피가 더러워서가 아니다!"
"그게 아니면 왜 그랬던 건데?"
"다짜고짜 자신을 물고 빨아 달라 요구한 네놈이 역겨워서인 게 당연하잖냐!"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존중하겠다더니, 순 개뻥이었네! 자기들이 내세운 교리도 안 지키면서 누가 누굴 욕해? 신도 아닌 주제에 신을 사칭할 때부터 알아봤다!!"
“닥쳐라, 이 변태 신의 사자 놈아!!"
악마가 나를 변태로 몰아가며 매도하는 사이.
밥 트리오는 잽싸게 뚜껑을 연 성수병을 이쪽저쪽 다양한 방향으로 던져댔다.
병 안의 내용물을 왜 뿌려야 하는지는 몰라도, 악마가 화를 내는 걸 보면 놈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는 게 명백했기 때문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