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22화 (822/925)

822회

85. 공작님과 성검 part.2 (2)

"때로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그쪽은 저 악마를 이길 실력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성검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잖습니까?"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악마는 제가 처리할 테니, 가서 그 방패로 일행들이나 지키십시오. 위기가 찾아오면 악마가 또 인질을 잡으려 할지 누가 압니까?"

타락펜스가 휴마누스의 말을 냉정히 끊어내며 악마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난데없이 독설을 듣게 된 휴마누스는 멍하니 녀석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악마의 쐐기가 다시금 타락펜스에게 쇄도하는 것을 보고 제정신을 차렸다.

"자, 잠깐만!! 세르펜스, 너 신성력 다 써서 붙잡혀 있던 거 아니었어?!"

"후···."

이제는 휴마누스의 말에 대답하는 것조차 지겹다는 듯.

타락펜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성검을 휘둘러 피로 이루어진 쐐기를 올려 쳤다.

그러자 성검과 닿았던 쐐기 앞부분이 떨어져 나가더니, 핏물이 되어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무, 무슨···?! 아무리 성검이라지만, 이럴 수는 없는데···?"

악마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또한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성검에 닿는 것만으로도 악마의 능력이 저렇게나 간단히 사라진다면, 내가 [성검의 주인]에서 읽었던 휴마누스의 개고생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의문이 머릿속을 잠식한 것만 같다.

'휴마누스에게 성검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고 지적하질 않나, 자기가 악마를 상대하겠다고 나서질 않나···. 진짜 뭐야?!'

심지어 악마의 공격을 막아내는 수준을 넘어 역으로 피해를 줌으로써, 자신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녀석이 악마와 싸워 준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다.

휴마누스에게 우리를 지키라는 얘기를 한 걸 보면, 우리를 적대시하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조금도 다행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안했다.

마치 현재의 세르펜스를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대체할 생각인 것 같아서.

"검에 깃든 그 기운은, 신 룩스메아의···! 일시적인 게 아니라 계속 다룰 수 있었던 건가?!"

돌연 악마가 흠칫 놀라며 룩스메아를 운운했다.

그 얘기를 듣고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야, 성검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오색 빛이 서려 있는 걸 겨우 눈치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옅어서 빛이 나는 게 아니라 그냥 펄 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다.

악마가 놀라 움직임을 멈췄던 건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놈은 이내 전의를 드러내며 검은 마기를 덧씌워 피로 이루어진 손톱을 강화했다.

그리고 망토에서 창을 열 개나 뽑아내어 쏘아 보냄과 동시에 타락펜스에게로 달려들었다.

성검에 깃든 빛이 희미하다 못해 흐릿하다는 것을 깨닫고 싸울 만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명백한 오판이었다.

열 개나 되는 창은 타락펜스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효과조차 내지 못했다.

빠르게 휘둘러진 성검은 다양한 각도에서 날아오는 창들을 정확하게 베어냈다.

그러고 나서도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처럼, 성검의 움직임은 끊김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타락펜스는 악마의 손톱들을 전부 잘라버리고도 모자라 놈의 팔까지 잘라냈다.

"크아아악!!"

악마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갈라진 창과 잘린 손톱은 핏물이 되어 카펫을 물들였고, 그 위로 기름처럼 번들거리는 새까만 악마의 피가 쏟아졌으며, 인간과 악마의 것이 뒤섞인 핏물에 잘린 팔이 나뒹굴었다.

- 찰박, 찰박, 찰박.

카펫이 채 흡수하지 못하여 바닥에 고인 피를 밟으며, 타락펜스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악마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공포를 느꼈는지 악마가 희게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마, 말도 안 돼···. 인간 주제에 이런 위압감이라니···? 이건 마치···."

감히 말을 내뱉는 것조차 불가하다는 듯.

악마는 이를 악물어 뒷말을 삼킨 뒤, 몸을 돌리고 서둘러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타락펜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걸음걸이를 유지했다.

이대로라면 악마가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마는 에드나가 펼쳐 놓은 푸른 방음막에 닿기도 전에 우뚝 멈춰 섰다.

그 안쪽에 둘린 오색 빛의 결계와 맞닥뜨린 까닭이다.

성검에 깃든 것과 마찬가지로 희미하기 그지없는 빛이었으나, 악마는 그것을 깨부술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도망가고 싶다면 저부터 죽이셔야 할 겁니다."

"이, 이게 진정한 성검의 주인의 힘인가? 하, 하지만···. 역대 성검의 주인 중, 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자는 없었는데···? 이래서 성검이 프라시더스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마신 테네브리오 님께서 예언하신 건가···?"

"그런 예언을 들어 놓고도 의미 없는 인질극 따위를 벌이다가, 저를 죽일 타이밍을 놓치신 겁니까? 하여간 악마들이란, 순간의 즐거움에 눈이 멀어 비효율적인 판단을 내리는 어리석은 존재란 말이지···."

타락펜스가 악마를 하등한 생물로 취급하며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인간을 멸시하던 악마는 인간인 타락펜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반발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다른 성검의 주인은 저 오색 빛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했다고? 그런데 오늘 처음 성검을 잡아 봤을 게 분명한 타락펜스가 대체 어떻게···?'

성검을 잡아보지는 못했어도 찔리고 베이는 건 자주 당했을 테니, 타락펜스가 1회차의 기억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는 건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성검 숙련도가 이렇게까지 쌓이는 건 말이 안 된다.

더군다나 성검펜스가 등장했을 때 오색 빛을 봤던 건 성검의 모습이 변화한 순간뿐이었다.

전투 중에는 평범하게 본인의 은빛 신성력을 사용했다.

그때는 신성력이 남아 있어서 굳이 신의 힘을 빌려 쓰지 않아도 됐던 걸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휴마누스에게 귀띔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았나?

날개를 만들어 나는 방법까지 알려줘 놓고, 훨씬 도움이 되는 정보를 말하지 않은 건 좀 이상하다.

혹시 성검의 주인이 되면 신성력이 바닥났을 때, 룩스메아의 힘을 막 뽑아 쓸 수 있는 건가?

[성검의 주인] 속 휴마누스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악마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했는데?

이래저래 가능성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무엇을 가정하든 의문에 집어삼켜졌다.

저 녀석이 타락펜스라는 확신은 얻었으나 그 외에는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존재조차 몰랐던 1회차의 성검펜스가 도리어 파악하기 쉬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 촤아악!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에서 검붉은 쐐기가 튀어나와 타락펜스의 등 뒤를 노렸다.

자세히 보니 악마의 망토가 길게 늘어나 피 웅덩이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아무리 무서워도 얌전히 죽어주고 싶진 않아서 발악하나 보다.

타락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으로 피하며 검을 휘둘러 쐐기를 잘라냈다.

피 웅덩이가 더욱 커졌다.

무척이나 많은 양의 피가 바닥에 깔려 있는데도 악마가 내버려 두는 걸 보면, 오색 빛 기운에 의해 흩어진 피는 다시 흡수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무슨 수를 써도 타락펜스를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는지, 악마는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들었다.

또다시 인질극을 벌일 생각인가 보다.

그러나 악마의 2차 인질극은 성립되지 못했다.

타락펜스는 공격을 준비하느라 꿀렁거리는 악마의 망토를 성검으로 내리찍어, 바닥에 고정한 까닭이다.

"크억!"

앞으로 나아가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악마가 바닥에 얼굴을 박고 넘어졌다.

어째서 이번에는 망토가 잘리지 않은 건가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성검에 은은하게 감돌던 펄감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악마를 붙잡으려고 일부러 힘을 거둔 듯하다.

타락펜스가 성검을 뽑자, 악마는 녀석에게서 벗어나고자 바닥을 기었다.

그러나 도로 오색 빛 기운을 두른 성검이 놈의 등에 꽂히는 게 더 빨랐다.

"커헉! 자, 잠깐···! 혹시 마신 테네브리오 님께서 하신 예언이 듣고 싶지 않은가?! 그 예언에 따르자면 너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답하며 타락펜스는 성검을 뽑아 들었다가 악마의 심장을 노리고 다시 찔렀다.

악마가 망토를 펼쳤으나 성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쑤욱 관통해 버렸다.

그래도 시야를 가리는 효과는 있었기에 악마는 재빨리 바닥을 굴러 성검을 피해냈다.

그 뒤로 이어진 전투는 전투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악마는 바닥을 기고 구르며 망토를 이용해 성검을 피하고 막으려 온갖 애를 썼고.

타락펜스는 성검을 휘둘러 망토를 잘라내거나 악마의 몸에 긴 상흔을 만들어냈다.

그런 타락펜스의 행동은 폭력적이었으나 기이하게도 그 모습조차 아름다워 보였다.

천사처럼 선해 보이는 녀석의 고운 얼굴과 살랑살랑 흔들리는 청은 빛 머리칼. 그리고 신비로운 오색 빛 궤적을 만들어내는 성검 때문이다.

멍한 정신으로 성검이 그리는 궤적을 눈으로 좇고 있자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오색 빛 기운을 얇게 두르고 있으니까, 뭔가···.'

나는 시선을 아래로 옮겨 내 손에 들려있는 세니어를 내려다보았다.

신성석을 세공하다 나온 가루들을 섞어 만든 검 표면에 빛이 부딪혀 산란하며, 오색 빛으로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니 룩스메아도 신성석처럼 사람들의 강한 바람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했지···? 그렇다는 건 설마···.'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당장은 그 진위를 확인할 수도 없고 세르펜스와 의견을 주고받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나는 방금 떠올랐던 생각을 머리 한구석에 처박아두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성검은 여전히 은은한 펄감을 뽐내며 악마의 망토를 뭉텅뭉텅 잘라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피 웅덩이가 점차 영역을 넓혀나갔고, 검정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색을 띠었던 망토의 색은 점점 옅어져 갔다.

한껏 압축되었던 피가 점차 묽어지고 있다는 뜻일 테다.

"크아악! 사제! 사제는 뭘 하고 있느냐! 어서 나를 치료하지 않고!!"

"아, 아으···.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아아, 신 룩스메아시여, 부디 용서를···!!"

악마가 피의 장막을 거두고 사제를 향해 치료를 명령했으나, 사제는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면서 자신이 저버렸던 신에게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타락펜스의 눈길이 잠시 사제에게 머물렀다가 도로 악마 쪽을 향했다.

일단 악마부터 처리할 생각인가 보다.

"아, 안 돼···! 이대로 죽을 수는, 커흑! 마신, 님···! 제게도 저자와 맞설 수 있는 신의 힘을···, 커헉! 제, 제발! 아악─, 마왕님!!"

자신의 몸을 보호할 피의 망토도, 몸을 굴려 공격을 피할 힘도.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악마는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성검을 보면서도, 저항 한번 못해 보고 절명했다.

최근에 생겨난 마신 테네브리오라는 명칭 대신, 최소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이상 불러왔을 익숙한 명칭을 마지막으로 부르짖으며.

- 우웅···.

무겁게 깔린 정적 사이로 자그마한 진동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자, 에드나가 반짝거리는 통신기를 매만지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받아보라는 뜻을 전하니, 곧 이곳에 없는 아니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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