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회
85. 공작님과 성검 part.2 (5)
설마하니 휴마누스는 타락펜스가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며, 성검을 돌려줄 거라고 믿는 걸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는 신성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로도, 성검을 다뤄 최상급에 근접한 수준의 상급 악마를 홀로 처리했습니다."
"어, 어어···. 대단하네. 뭘 어떻게 한 거야?"
"그저 성검이 지닌 능력을 이끌어 낸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
타락펜스는 '네가 못 하는 일을 나는 해낼 수 있다.'라는 뜻을 담아 비아냥댔다.
그러나 휴마누스는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듯 보였다.
녀석이 한 말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어쩐 건지, 학구열을 불태우며 가르침을 청하기에 바빴다.
순박하기 짝이 없는 그 반응에 타락펜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할 말을 잃었나 보다.
"응? 어떻게 하는 거냐니까?"
"···알려 드려도 못 하실 겁니다."
"계속 시도하고 연습하다 보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당연하지. 악마도 악마지만, 어쩌면 마왕과 싸우게 될 수도 있잖아? 모두를 지키려면 내가 더 강해져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어."
휴마누스가 모처럼 전직 주인공다운 말을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타락펜스가 감동할 리 만무했다.
나도 휴마누스가 대견하게 느껴지기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쟤는 뭐 입사 면접이라도 왔나? 대체 왜 면접관 앞에서 포부를 드러내는 취준생처럼 굴고 있는 거야?'
앞서 타락펜스가 자기자랑을 하며 비아냥댔던 게, 성검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밑밥을 깐 거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태평한 소리를 할 리가 없다.
"그 말씀을 들으니 확신이 섰습니다. 역시 성검은 제가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성검을 잘 다루는 쪽이 성검의 주인이 되는 게, 모두를 지키기에 더 적합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네게 성검을 맡길 수는 없어."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성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자에게 성검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타락펜스는 성검을 반납할 생각이 없었고, 휴마눈새는 눈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민숭이들을 잡으러 간 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상황 정리가 안 끝날 것 같다.
일행인 유지스와 아니마는 상관없지만, 테일러에게 타락펜스의 모습을 내보일 수는 없다.
하다못해 타락펜스가 완벽하게 현재펜스를 연기했다면 모를까.
내 옆에 꼭 붙어서 갖은 아양을 떨어대던 세르펜스가 나와 거리를 두고, 꼬박꼬박 존댓말에 신의 사자라는 호칭을 쓰고 있으니.
테일러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하다.
'그냥 연기하는 거 다 알고 있다고 말해 버릴까? 그러고 나서 테일러를 속이는 걸 도와달라고 해?'
아직 타락펜스의 의도를 모른다는 게 다소 불안하긴 했지만.
성검을 두고 휴마누스와 언쟁하는 동안, 녀석은 본인이 성검을 지니는 것에 타당성을 확보하는 데만 집중할 거다.
진정한 목표는 잠시 미뤄두고, 휴마누스가 성검의 주인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겠지.
게다가 연기를 하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하고 있으니.
녀석이 무엇을 바라고 우리와 섞여들려 하는지 알아내기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의도가 무엇이든, 타락펜스가 성검을 들고 도망칠 생각이 없는 것만큼은 확실하니까···.'
생각을 이어 갈수록 녀석의 가면을 벗기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전부 벗기는 게 아니라 딱 절반만. 슬쩍 들춰보는 느낌으로.
녀석이 타락한 것에 관한 얘기는 언급하지 말고, 1회차의 성검펜스를 만났다는 얘기만 슬쩍 흘리고 반응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데요, 휴마누스. 혹시 지금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지, 눈치 못 챈 건 아니시죠?"
"뭐?! 너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설마 내가 저 세르펜스랑 현재의 세르펜스를 구분하지 못할까 봐?"
"그럼 알고 있다고요?"
"당연하지! 원래 세르펜스의 눈동자는 초롱초롱한데, 지금은 눈빛이 완전히 죽어있잖아. 어디 그뿐이야? 현재의 세르펜스라면 악마를 처리하자마자, 쪼르르 너한테 달려가서 걱정시켜서 미안하다며 어리광을 부려댔을걸? 그런데 쟤는 네 앞에서 사제란 자를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댔고."
놀랍게도 휴마누스는 지금의 세르펜스가 다른 회차의 인격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믿기지가 않아서 멍하니 휴마누스를 쳐다보고 있자, 그가 으스대는 표정으로 헛소리해댔다.
"저 세르펜스가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눈치껏 모르는 척해줬을 뿐이야. 자신이 왔다간 걸 모르게, 조용히 돌아갈 생각이었겠지."
"예? 방금까지 저 녀석이랑 성검 소유권 분쟁을 해 놓고도, 조용히 돌아가려 했다는 소리가 나와요?"
"저번처럼 새로운 기술을 알려주기 전에 내 결의를 시험해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어쩐지 면접보는 사람처럼 굴더라니!
눈치가 휴마누스에게 다가가려다 마음이 바뀌어서 그냥 돌아가 버렸나 보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현재펜스의 몸을 빼앗아 쭉 눌러앉으려고, 성검을 돌려주지 않겠다며 버티는 거잖아요!"
"뭐어?! 그게 정말이야, 세르펜스?!"
휴마누스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타락펜스를 바라보며 사실 확인을 요구했다.
그에 타락펜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을 꺼냈다.
"위기의 순간에 제게 성검을 전해주려 했을 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상황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두 번째야. 저번에 나왔던 건 성검의 주인이던 세르펜스인데, 신성력으로 날개를 만들어 나는 방법을 알려주고 갔어."
"비행하는 적과 고전하다가 현재의 제가 성검을 잡게 되었나 봅니다."
"응, 그땐 정말 놀랐지. 세르펜스가 성검을 잡더니 갑자기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오르질 않나, 나를 폐하라고 부르질 않나, 일행들을 적대하질 않나···."
휴마누스는 타락펜스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며 정보를 줄줄 흘렸다.
말려야 하나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2회차에 관한 언급은 없어서 그냥 두기로 했다.
타락펜스는 그 얘기를 가만히 듣다가 꼬투리를 잡았다.
"앞으로도 위기의 순간이 올 때마다 제게 성검을 넘길 생각이십니까?"
"그건 절대 아니야!"
"함부로 장담하지 마십시오. 절대 이길 수 없는 강한 적을 마주하여 동료들이 모두 죽게 될 위기에 처해도, 제게 성검을 건네지 않을 겁니까?"
"그, 그건···."
휴마누스 성격에 '동료들이 죽든 말든, 내가 끝까지 싸울 거다.'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비단 휴마누스처럼 정의로운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러지 못할 거다.
예정된 답안을 들은 타락펜스가 무미건조한 눈으로 휴마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담하건대 저보다 강한 인격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더 큰 위기가 찾아왔을 때, 제가 나오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계속 성검을 지니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그건···."
"이미 다른 인격을 만나셨다고 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마왕에게 패배하여 이 세상을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데 저보다 약한 그쪽이 어떻게 이 세상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마왕의 힘을 갈취하여 최종 보스 자리를 꿰찼던 타락펜스가 말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2회차에도 세르펜스가 성검의 주인이 되어, 정의의 편에서 싸운 줄 알겠다.
대화 상대가 현재펜스도 아니요 성검펜스도 아니니, 소거법에 따르면 타락펜스가 확실하건만.
녀석의 설정 놀음에 휴마누스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어···."
"제가 성검의 주인으로서 사명을 마무리 짓지 못한 건, 그 누구도 저를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전 대륙을 돌아다니며 악마와 싸우느라 사선을 넘나드는 그 순간에도, 다른 어딘가에서는 피해가 발생했고···. 그 모든 피해는 저의 과실이 되어있었습니다. 대륙의 여러 국가는 그 사태를 조용히 방관했습니다. 피해의 책임이 백성들을 지키지 못한 왕실의 잘못으로 돌아올까 봐 몸을 사린 겁니다."
"···으응?"
"하지만 그쪽은 상황이 달랐을 겁니다. 성검의 주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부족한 점을 보완할 동료가 붙었을 겁니다. 그리고 제국으로부터 압박을 받은 국가들이 나서서, 다양한 지원과 협조를 제공했을 테고 말입니다."
"그건 맞는데···."
"저는 그래서 신 룩스메아께서 그쪽에게 성검을 잠시 맡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많은 분과 함께라면, 이번에야말로 이 대륙을 구원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듭니다."
타락펜스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반쯤 가려진 눈동자가 처음으로 이채를 띠었다.
무척이나 희미하고 금방 사라져버린 탓에 자세히 살필 수 없었으나, 녀석의 눈동자는 분명 감정을 담아냈었다.
'알겠다. 얘가 왜 어쭙잖게 현재펜스를 흉내 내려 애쓰면서까지 우리 사이에 섞이려 했는지.'
이 녀석은 분명 부러웠던 걸 테다.
전투 중 등 뒤를 맡길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동료가.
함께 성장해나가며 서로 기대거나 버팀목이 되어주는 관계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주는 그 모든 것들이.
'무언가 계략을 꾸미고 우리를 속이는 줄 알았는데···?'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저 녀석은 온갖 계략으로 대륙을 거의 멸망까지 몰아넣었던, 그 타락펜스니까.
성검펜스도 아닌 타락펜스가 고작 그런 이유로···.
'아니지. 녀석에게는 고작이 아니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충격이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었다.
녀석이 1회차의 기억을 봤다면 더더욱 부러움을 느낄 만도 하다.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들을 휴마누스는 처음부터 가지고 시작했으니까.
1회차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돕고자 나섰던 유지스마저, 휴마누스의 편에 서서 자신에게 적의를 보냈으니까.
'처음부터 유지스에 관해 알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만, 그 기억을 본 이후로는 한동안 박탈감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새로운 가면을 바꿔 쓰며 연기를 이어나가는 녀석이 한없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외로움에 떨며 누구든 곁에 있어 달라고 호소하여도 이보다 가여워 보이지는 않을 거다.
"신께서 하필 그쪽에게 성검을 맡긴 건, 여러 국가로부터 협조를 받아내기 용이하다는 이유 외에도···. 아마도, 으음···. 유일하게 저를 친우라 칭하는 사람이니까···. 그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성검의 주인이 된다면 황태자라는 신분과 상관 없이, 대륙을 구원하는 이 여정에 자연스레 함께할 수 있고. 성검을 제게 양도해도 용사의 무구는 남잖습니까?"
휴마누스를 계속 '그쪽'이라 부르고 있으며, 정확하게 '우리는 친구 사이'라고 말한 건 아니긴 해도.
타락펜스가 '친우'라는 단어를 썼다는 건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다.
아무튼 휴마누스가 자신을 진심으로 친구라 여긴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거니까.
"앞으로는 성검의 주인이 아닌, 성검의 동료로서 저와 함께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해 주신다면 무척이나 든든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하지만 역시 성검은 돌려받아야겠어. 그건 너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야."
휴마누스의 대답에 타락펜스가 한껏 꾸며냈던 웃는 낯을 지워버리고,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