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회
85. 공작님과 성검 part.2 (9)
타락펜스가 숟가락을 들어 올린 건 모두가 음식을 입에 댄 이후였다.
신성력이 있으니 독을 경계한 것은 아닐 테고, 현재의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한 거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녀석이 안쓰러워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러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음식 맛이 어때? 마음에 들어?"
"이렇게 맛이 강한 음식은 낯설어서···. 아직은 잘 모르겠고, 좀 더 먹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성검의 주인]에 타락펜스의 식생활 같은 건 언급되지 않았다.
남들 다 먹는 평범한 음식을 두고 맛이 강하다는 소리를 해대는 걸 보면, 악숭 세력에 들어간 이후로도 그 밍밍하기 짝이 없는 식단을 계속 유지했나 보다.
하기야 먹는 재미를 모르니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겠지.
타락펜스는 숟가락 끝으로 미트볼을 1/4 크기로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우물거리며 정말 꼭꼭 씹어먹었다.
더 먹어봐야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더니. 누가 봐도 자주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을 음미하는 듯한 모양새다.
'식사를 하면서 분위기가 느슨해진 틈을 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 볼까 했는데···.'
어차피 타락펜스가 계속 거짓말을 하며 우리를 속이려 드는 이상, 진솔한 얘기를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녀석이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게 먹는 데 집중하도록 내버려 둬야겠다.
타락펜스와 먹는 속도를 맞추다 보니 식사 시간이 굉장히 길어졌다.
그러한 까닭에 여름이라 해가 늦게 저물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후였다.
뒷정리는 일행들에게 맡기고 나는 타락펜스와 함께 별장 2층으로 향했다.
그런 우리의 뒤에 휴마누스가 따라붙었다.
일행 중 휴마누스는 유일하게 2회차 타락펜스의 행보를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내가 녀석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걱정스러웠나 보다.
'휴마누스 앞에서라면 2회차를 언급해도 상관없으니, 굳이 떼어 놓을 필요는 없겠지?'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하니 4개의 방문이 보였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닫았다.
좀 더 걸음을 옮겨 옆에 있는 방문을 열고 내부를 확인한 뒤 도로 닫았다.
그리고 다음 방의 문을 열었을 때.
"뭐 하시는 겁니까?"
"인테리어가 마음에 안 들어서···?"
"······."
"잠깐만 기다려, 마지막 방만 확인할게!"
"나머지 방이라고 다르겠습니까?"
타락펜스가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방금 문을 열어 놓은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녀석을 따라 방 안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다.
스위치를 찾아 천장에 달린 마법등의 불을 켜니 실내 장식이 적나라하게 보였고, 나는 분통을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롱에 참석한 귀족들이 대부분 그런 취향이라는 걸 알았을 때 예상했어야 하는데!'
제일 눈에 띄는 건 역시나 부피가 큰 침대다.
무언가를 고정하기 위한 가죽끈이 달린 탓에, 침구류만 없었으면 흑마법사가 인체 실험을 하는 실험대로 착각할 뻔했다.
서랍장 위에는 다양한 형태의 채찍이 줄지어 장식물처럼 놓여 있었는데, 서랍 안에는 뭐가 들었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리고 벽에는 옷걸이 대신 쇠사슬과 연결된 수갑이 대롱거렸으며, 천장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갈고리가 매달려 있었다.
다시 밖에 나가서 천막이라도 펼쳐야 하나 갈등하다가, 그냥 아공간 주머니에서 테이블과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애초에 그 참사가 있었던 건물 안으로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천막을 펼칠 만한 공간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밖에 세워진 마차들을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 되기는 하나, 그러려면 말과 연결된 고리를 일일이 풀어야 한다.
그리고 말을 나무에 매어 놓기까지 해야 하는데 번거로워도 너무 번거롭다.
내일이면 교단에서 사람들을 보내올 거다.
딱 하루만 지낼 장소에서 고작 실내 장식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그만한 수고를 들이고 싶지는 않다.
'그럴 거면 차라리 방을 치우고 말지.'
나는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험악한 방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온화하게 바꾸고자 간식을 꺼내 놓았다.
이 간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시멜로를 초콜릿으로 코팅한 뒤, 색색깔의 스프링클을 그 위에 뿌린 것으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모양새를 자랑했다.
그리고 냄새만 맡아도 마음에 평온함을 선사하는 따뜻한 세계수 잎 차도 꺼냈다.
"이런 방에서 잘도 그런 간식을 꺼내는구나?"
휴마누스가 방문을 닫으며 눈치 없는 소리를 했지만,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니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애초에 이런 방과 어울리는 간식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나?
"혹시 이게 현재의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입니까?"
"그건 아니야. 세르펜스는 달콤한 간식이라면 뭐든 좋아하거든. 게다가 내가 최대한 다양하게 이것저것 먹여 보려고 시도하다 보니,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걸 하나만 골라보라고 하면 곤란해하며 울상을 짓더라고."
"···지금 제 얘기를 하시는 게 맞습니까?"
타락펜스가 조용히 눈을 깜박거리다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내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나 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자 녀석이 미묘한 시선으로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어서 먹어 봐."
"으음···."
내 권유에 타락펜스가 조심스럽게 초코 코팅 마시멜로를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돌연 눈을 크게 뜨더니 '읍!' 하는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았다.
뭣 모르고 세르펜스에게 살짝 매콤한 닭꼬치를 사서 바쳤을 때, 녀석이 보였던 반응과 비슷하다.
나는 당황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바닥을 펼쳐 녀석의 입 앞에 갖다 댔다.
"왜 그래?! 혹시 매워? 설마하니 쇼콜라티에가 초콜릿을 템퍼링 하다가 캡사이신이라도 흘렸나?! 얼른 퉤 해, 퉤!"
"음, 으음···. 식감이···, 으으음···."
입안에 든 것을 뱉기는커녕 오물오물 잘도 먹는다.
그냥 난생처음 느껴보는 마시멜로의 퐁신퐁신한 식감에 놀랐을 뿐인가 보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놀란 가슴이 좀 진정되는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얘기를 이끌어 낼 수 있으려나?'
다짜고짜 '너 2회차에서 타락했으면서, 왜 아닌 척 굴어?' 하고 따질 수는 없다.
그렇다고 녀석이 계속 거짓말을 하게 둘 수도 없고.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진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며, 타락펜스가 자신의 정체를 인정하게 하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고민하면서 차를 또 한 모금 들이켜니, 좋은 생각이 번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게 무슨 차 같아?"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차향은 처음 맡아보는지라···."
"세계수 잎 차야. 작년에 세계수를 만나 생일 선물로 받았어."
"그렇습니까?"
"그런데 세계수가 그러더라. 현재는 3회차라고."
1회차는 성검펜스, 3회차는 현재. 그럼 남은 것은 성검을 잡아본 적도 없는 2회차의 세르펜스뿐이다.
나는 이제 거짓말은 그만하라는 뜻을 담아 말하며 타락펜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조금쯤은 당황할 법도 하건마는 녀석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세상을 되돌린 횟수가 세 번이라는 뜻 아닙니까? 신께서 간섭하지 않은 최초의 시간대를 0회차라고 상정한다면 제가 1회차, 그다음이 2회차, 현재가 3회차···. 이상한 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세계수는 우리가 만났던 성검펜스가 1회차라고 말했어. 그리고 그 시기에 세계수는 불에 탔고, 그 타격이 이어져서 우리가 세계수를 찾아갔을 땐 죽어가고 있었지. 지금은 성검의 힘으로 치료받고 건강해졌지만."
휴마누스와 달리 성검을 잘 다루는 네가 어째서 세계수를 치료하지 않았지? 너는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했던 2회차의 세르펜스가 확실하다.
내 말 속에 담긴 그 의미를 모를 리도 없건만, 타락펜스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연기를 이어나갔다.
"으음···. 성검을 통해 세상이 되돌려지기 전의 정보를 건네받아, 그 당시 세계수가 불에 탔다는 건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되돌려진 후에도 그때의 타격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세계수를 찾아갔을 텐데···."
"세계수를 아예 찾아가지 않았다고? 용사의 시련은 어쩌고?"
"어차피 용사의 무구를 얻을 수도 없는데, 시련을 받으러 다니는 건 시간 낭비잖습니까? 그래서 그 시간에 성검을 통해 얻은 정보를 살려, 악마 숭배자들을 찾아 처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얘기였다.
식사 시간 동안 예상 질문을 추려내어 변명을 준비해 둔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 정도다.
"그래도 세계수를 찾아가면 유지스는 만날 수 있잖아."
"저번에 만났다던, 앞선 회차의 제게 그녀의 최후에 관한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저와 만나지 않는 게 그녀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리석게도 그때까지 저는 동료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였던 터라···."
슬며시 눈을 내리깔며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모습은 유지스가 보면 좋아할 것 같···, 아니 이게 아니라.
공허한 눈동자와 쓸쓸한 분위기가 어우러져, 녀석의 말이 모두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건 그렇고 세계수의 상태가 그렇게나 좋지 않았다면, 하나의 회차를 누락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닙니까? 큰 해를 입은 직후의 시간대이기도 하고, 더구나 저는 세계수를 찾아가지 않았으니···."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휴마누스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수도 있긴 개뿔이. 나를 지켜주려고 따라왔으면서, 왜 타락펜스의 말에 동조하고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논리를 내세우는 머리싸움으로 세르펜스를 이기는 건 역시 불가능한가 보다.
이대로 타락펜스가 계속 연기하도록 놔뒀다간 나까지 흔들리게 생겼다.
녀석의 감정을 건드려 원하는 답을 받아내는 짓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하며 우리를 속이려는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2회차의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는 건 나와 휴마누스 뿐이고, 우리 둘은 너를 안타깝게 생각하지 싫어하진 않아."
"어째서···, 저를 그 회차의 인격과 혼동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했던 저는 상당히···, 올바르지 못한 삶을 살았던 모양입니다."
이 녀석은 지금 자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싸늘함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은 마치, 뒤집어쓰고 있던 인간의 탈이 벗겨진 무생물처럼 느껴졌다.
역시나 이 녀석은 타락펜스가 확실하다.
확신을 얻기는 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예전에 기차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고 생각하면서, 쉬운 길을 택해놓고 변명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자괴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겠지.
"그래. 1회차의 네가 물리적으로 자신을 해했다면, 2회차의 너는 정신적으로 자신을 괴롭게 했지. 그래서 나는 네가 더 안쓰러워. 지금 이렇게 본인을 부정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
"이런 식으로 몰아세우며 불안을 느끼게 해서 미안해, 세르펜스. 하지만 나는 진짜 너와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