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2회
85. 공작님과 성검 part.2 (12)
어물어물 둘러대는 내 모습에서 부정적인 뜻을 읽은 걸까?
타락펜스는 자세히 캐물으려 하는 대신 공연히 차를 들이마셨다.
나는 그런 녀석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궁금증을 해결하고 화제도 바꿀 겸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네가 성검을 쥔 건 오늘이 처음일 텐데, 어떻게 성검의 힘을 자연스레 활용할 수 있는 거야?"
"나에 관해 궁금한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타락펜스가 학습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타고난 본바탕이 있으니 언뜻 매력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묘한 이질감을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했다.
차라리 휴마누스를 향해 비웃는 표정을 꾸며냈던 게 더 나았던 것 같다.
비웃는 표정은 눈에 감정이 담겨있지 않아도 괴리감이 적으니까.
'하기야 마음을 조금 열었다고 해서 거의 닳아 없어진 감정이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치고 올라왔다. 나는 그것이 내 마음 가득 차오르기 전에 꾹꾹 억눌렀다.
타락펜스는 보내야 할 사람이다.
소통을 위해 마음을 열 필요는 있었으나 너무 정을 줘서는 안 된다.
"대화를 하다 말고 딴생각을 하는 걸 보면, 그리 궁금했던 건 아닌가 봅니다."
"아니야, 엄청 궁금해! 딴 생각을 한 건 그냥···. 네 표정이 뭔가 어색해 보이길래, 그게 좀 신경 쓰여서 그런 것뿐이야."
"이상하군. 나름대로 연기에 능숙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차피 정체도 들켰는데, 굳이 연기까지 해 가며 계산적으로 굴 필요는 없지 않아?"
"당신의 호감을 사기 위함이었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게 말하며 타락펜스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역시나 이 녀석은 너무 위험하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그보다 내가 한 질문에 답을 해 주지 않을래?"
"설명하자면 길다. 이 육체가 상당히 지친 상태인 듯하니, 괜찮다면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이어서 얘기를 나눠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 오늘 꼭 대답을 들어야 성에 차겠는가?"
타락펜스가 우아한 동작으로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냥 자신이 피곤하니 쉬고 싶다고 말해도 될 텐데.
굳이 '세르펜스의 몸'이 지친 상태라고 말한 저의를 알 것 같아서 영 못마땅하다.
"됐어, 그냥 내일 얘기 해. 그럼 나는 먼저 잘 준비할 테니까, 너는 먹고 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에 다가갔다.
그리고 시선을 위로 고정한 채, 제일 위 서랍을 열어 장식물처럼 늘어선 채찍을 싹 쓸어 담은 뒤 도로 닫았다.
"방금 잘 준비를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이런 게 쭉 늘어서 있으면 신경에 거슬려서 못 잘 것 같으니까 치우는 거야. 잘 때 방해되는 요소를 치우는 게 잘 준비가 아니면 뭐겠어?"
"흐음, 그런가?"
"너는 안 거슬려?"
"더 한 도구들도 많이 다뤄 본지라."
자신은 익숙해서 괜찮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다. [성검의 주인]에 타락펜스가 누군가를 고문하는 장면이 종종 나왔으니까.
그렇고 그런 취향의 사람들이 즐기는 용도로 쓰는 도구 따위는 그냥 장난감 같겠지.
현재의 세르펜스가 엘로윈 보육원에서 악숭이를 고문하며, 고문당하는 당사자만큼이나 두려움에 떨고.
결국에는 내 앞에서 펑펑 울어 젖혔던 것과는 딴판이다.
나는 타락펜스의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하기로 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겉옷을 꺼내어 벽에 박힌 쇠사슬의 뿌리 부분에 걸었다.
옷을 잘 정돈하여 아래로 늘어진 쇠사슬과 그 끝에 달린 수갑을 감추니, 그냥 평범한 벽 옷걸이 같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천장의 갈고리에는 세르펜스의 제2 생일을 축하할 때 썼던, 고깔 모자를 씌워 놓았다.
그리고 가죽끈이 달린 침대는 임시로 내 아공간 주머니에 담아 치웠다.
찝찝했으나 혼자 들어서 밖에 내놓을 만한 크기는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꺼내 놔야지.
빈 공간이 생겼으니 이제 평범한 침대를 꺼내 놓을 차례다.
나는 초코 마시멜로를 우물거리며 날 구경하는 타락펜스에게 다가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공간 주머니 좀 줘 봐."
"직접 가져가는 게 익숙하다고 하지 않았었나?"
"···세르펜스가 꺼내줄 때도 종종 있었어."
"그렇다면야."
타락펜스가 내 손바닥 위에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내가 세르펜스를 대하는 것과 똑같이 자신을 대해주길 바라나 보다.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며 세르펜스의 침대를 꺼냈다.
그러고 나서 타락펜스가 이따가 씻고 나서 갈아입을 옷도 미리 꺼내 두었다.
아공간 주머니 속 물건을 꺼내기 위해서는 그 이미지를 떠올려야 하는 터라, 어떤 물건이 들어있는지 모르면 꺼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옷'을 키워드로 잡히는 대로 죄다 꺼내어 골라 입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번잡스러우니 내가 꺼내주는 게 낫다. 성검펜스 때도 그렇게 했었다.
"나 이제 씻으러 갈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알았지?"
"내가 당신을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아···, 그래···."
"그보다 아공간 주머니는 돌려주지 않는 건가?"
"어차피 너는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냥 내가 가지고 있을게."
"그러고 싶다면야."
타락펜스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대답하고는 고상한 자태로 찻잔을 기울였다.
저대로 혼자 둬도 되는 건가 싶어 불안하긴 하지만, 녀석을 다른 일행과 함께 두는 게 더 불안했다.
차라리 재빨리 씻고 나오는 게 낫겠다 싶어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다행히 방에 딸린 욕실은 좁긴 해도 평범했다.
없어야 할 물건은 없고, 있어야 할 물건은 있었다. 욕실에 당연히 있어야 할 물건인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여전히 검은 머리다.
나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후다닥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타락펜스는 꺼내둔 마시멜로를 다 먹고 나서도 얌전히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얌전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정말로 얌전히 있는 꼴을 보니 기분이 좀 묘했다.
말을 잘 들었으니 머리라도 쓰다듬으며 칭찬해 줘야 하나 싶었으나 일단 보류하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거 염색약 효과 없애는 건 신성력 별로 안 들지?"
"그렇기는 한데 원래 그런 색 아닌가?"
"악숭 살롱에 잠입하려고 염색했던···건···데···. 아니, 잠깐만. 자기 보좌관 했던 사람 머리색도 몰라?"
"나는 선우, 당신의 머리색을 말한 거다. 리벨론 경의 것이 아니라."
타락펜스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얘기가 튀어나왔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젖은 머리칼을 매만지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네가 내 진짜 머리색을 어떻게 알아?"
"어렴풋이나마 영혼의 모습이 보이니까. 내 경지가 낮아 정확한 이목구비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게 아쉽군."
"어···, 뭐가 보인다고?"
"그럼 나도 씻고 올 터이니 얌전히 기다리고 계십시오."
내 머릿속에 큰 파문을 일으켜 놓고, 타락펜스는 유유히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에 들어가 버렸다.
나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물소리를 듣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욕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자세히 캐묻고 싶었으나, 어차피 질문해 봤자 답변을 내일로 미룰 것 같아서 관뒀다.
'생각해 보자···. 경지가 낮아 내 영혼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즉. 어느 수준 이상의 경지에 도달했기에, 영혼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타락펜스는 자신이 세르펜스의 인격 중에 가장 강하다고 단언했었다.
당시에는 녀석의 무위(武威)가 너무나도 놀라워서 그냥 지나쳐 버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타락펜스도 세르펜스였고, 세르펜스는 기본적으로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이다.
그래서 세르펜스는 자신의 능력에 관해 말할 땐, 습관적으로 '아마도'라든가 '~같다.'라든가 '~라 생각한다.' 따위의 말을 붙이곤 했다.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능력을 장담한 적은 없다.
내가 자신감을 세워주려고 칭찬을 퍼부어가며 애지중지 키워온 세르펜스도 그러한데, 타락펜스는 어떻게 장담할 수 있었던 걸까?
'더군다나 그때는 타락펜스에게 지금이 3회차라는 걸 알리기도 전인데···.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거지?'
짚이는 구석이 하나 있긴 했다.
타락펜스는 반신인 마왕의 힘을 가로챘다.
지금은 현재펜스의 몸에 들어앉아 있으니 그 힘은 사라졌을 테지만, 그 힘을 사용했을 때의 감각은 남아있겠지.
혹시 타락펜스도 마왕처럼 반신의 경지에 오른 건가 싶은 생각이 떠올랐으나,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랬다면 나는 출근 첫날 현재의 세르펜스가 아니라 회귀한 타락펜스를 마주했을 테니까.
'신의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거의 근접했다···라고 봐야 하나?'
자신을 넘어섰다면 신이 되었다는 뜻이며, 룩스메아가 세상을 리셋해도 인격을 유지했을 터이니. 고작 악마 따위에 애를 먹어 성검을 쥘 리가 없다.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타락펜스가 세르펜스의 인격 중 자신이 가장 강하다고 장담했을 만하다.
'녀석이 성검을 잘 다루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 오색 빛 기운은 룩스메아, 그러니까 신의 힘이다. 성검도 신이 만들어 낸 물건이고.
마왕의 힘을 가로채서 사용했던 경험을 십분 활용한다면, 인간이 쓰라고 만든 성검을 다루는 건 일도 아닐 테다.
'내일 타락펜스에게 물어보고 맞는지 확인받아야지.'
그렇게 생각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욕실 문이 열리고 말끔해진 타락펜스가 걸어 나왔다.
녀석은 방 한복판에 자리한 테이블과 내가 걸터앉은 침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나면, 저것을 치우고 침대를 하나 더 꺼낼 줄 알았는데···. 같이 자는 거였나?"
"왜, 싫어?"
"현재의 나와 늘 함께 잠자리에 들었나?"
"늘 그런 건 아닌데, 오늘은 악몽을 꿀까 봐 걱정돼서."
"악몽?"
"현재의 세르펜스는 신성력을 전부 소진하고 피곤할 때면 악몽에 시달리던데, 너도 마찬가지일 거 아니야?"
"···이유는 그뿐인가?"
타락펜스가 내 얼굴을 뚫어버릴 기세로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리 내 영혼을 볼 수 있다고는 하나, 내가 혼자 잘 때면 매우 높은 확률로 잠을 설친다는 사실까지 알아봤을 리는 없고···.
"걱정하지 마, 성검을 빼앗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거 함부로 만지면 신성력 치유도 안 먹히는 흉터가 남는다면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듯하군."
내 표정을 꼼꼼히 살피고 난 후에야 마음이 놓였는지 타락펜스가 침대로 다가왔다.
나는 바로 자리에 누우려는 녀석에게 불 끄기를 시키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어 베개에 깔았다.
타락펜스가 베고 잘 베개에는 특별히 수건을 두 장 깔았다. 머리카락도 길고 방금 씻고 나와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니까.
내가 자리에 눕자 방 안이 어두워졌다.
곧이어 타락펜스가 부스럭대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손!"
"······."
어쩌면 무시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타락펜스가 별말 없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익숙한 안정감을 느끼며 만족스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땐 낯선 천장이 나를 맞아 주었다.
낯선 장소에서 잠들었으니 낯선 천장이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갈고리에 씌워 둔 고깔 모자가 안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