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41화 (841/925)

841회

86. 공작님의 납치 (9)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일단?"

말을 하는 도중 잠깐 멈칫하자, 타락펜스는 내가 뱉은 마지막 단어를 따라 하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멈추지 말고 하던 말을 계속하라며 재촉하는 걸 테다.

그런 녀석의 얼굴 가득 기대가 떠올라 있었다.

'저렇게 들떠 있는데, 곧바로 찬물을 끼얹는 건 삼가는 게 낫겠지···?'

가뜩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다.

녀석이 예민하게 반응할 만한 주제는 조심스럽게 꺼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나는 원래 하려던 말 대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일단 뭐라도 먹으면서 얘기하자. 어제저녁도 못 먹은 데다가,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가 배고파."

"아···. 그러고 보니 선우가 자고 있어서 오늘 간식 시간을 놓쳤는데, 식사 후에 챙겨 주는 건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타락펜스의 말을 듣고 동작을 멈췄다.

간식 시간이 지났다니, 지금은 대체 몇 시인 거지?

천막 안이라서 밖이 안 보이는 데다가, 촛불이 켜져 있어서 정확한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아도르, 지금 몇 시야?"

"선우가 깨어나기 직전에 오후 7시를 넘겼다."

"이, 이야···! 저녁 먹기 딱 좋은 타이밍에 일어났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감탄까지 나온다.

반올림하면 거의 30시간 가까이 굶었다는 소리다. 내 평생 이렇게 오래 굶어본 건 처음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났더니 괜히 허기가 더 밀려오는 듯하다.

"그럼 먼저 테이블을 치우겠다."

타락펜스가 그렇게 말하며 뒤돌아 테이블로 향했다.

자연스레 내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들이 보였다.

너무 설레서 잠을 못 잤다더니. 내가 자는 동안 또 롤링 페이퍼나 필담 종이를 읽고 있던 모양이···다?

"아니, 잠깐, 잠깐! 거기 동작 그만!!"

나는 종이들을 모아 아공간 주머니에 담으려는 타락펜스에게 멈추라고 외치며, 허겁지겁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타락펜스에게 다가가 녀석의 손에 들린 종이를 확인했다.

역시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건 그냥 종이가 아니라 편지 봉투와 편지지였다.

윗부분이 깔끔하게 잘린 채 비어있는 봉투 겉면에는 내 글씨체가 보였다.

내가 이 세상의 문자로 가족들에게 쓴 편지다.

"멋대로 편지를 뜯어본 건 미안하다. 하지만 선우가 살던 세상의 문자로 쓴 편지가 따로 있으니 상관없잖은가? 어차피 가족들에게 보낼 것도 아니었고."

내가 편지들을 뺏어 들고 가만히 서 있자, 타락펜스가 달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물론 말투만 그러했을 뿐 그 내용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진심으로 미안해한다거나 나를 걱정하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미안하고 내가 걱정되었으면 이걸 이렇게 멋대로 뜯어서는 안 됐다.

현재의 세르펜스에겐 보여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편지를 봉하기 전이었다.

또한 그 녀석은 내가 쓴 편지를 읽고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 줬다.

함께 힘들어하며 내 안의 그리움을 덜어주려 애썼다.

그렇기에 현재의 세르펜스가 그 편지를 읽는 건 괜찮았다.

내 가족들이 읽을 수 없는 편지를 내가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이 읽어 줘서, 오히려 위안이 되고 고마웠다.

'그런데 타락펜스는 세르펜스긴 해도, 내가 가족처럼 여기고 애지중지 길러온 그 세르펜스가 아니잖아···?'

초대도 하지 않은 사람이 멋대로 집에 침입하여, 구둣발로 집안 곳곳을 짓밟은 듯한 기분이다.

어젯밤 너무 많이 운 까닭일까?

눈가에 열기가 느껴지긴 하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쏟아낼 길이 없다.

"갑자기 왜 그러지?"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타락펜스가 내 어깨를 짚고 신성력을 밀어 넣으며 물었다.

따스한 기운이 목을 타고 올라가 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술렁거리던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다만 그뿐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어 질문했다.

"이 편지는 어떻게 알고 꺼내 읽은 거야? 세르펜스의 것도 아니고 내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뒀던 건데."

"어젯밤 선우가 내게 말해줬잖은가? 그리움을 덜어내기 위한 일환으로 가족들에게 편지를 적었다고."

"내가 그런 얘기까지 했다고?"

"설마 기억나지 않는 건가?"

타락펜스가 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녀석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일부러 내 기억을 날려버릴 목적으로 작정하고 정신을 뒤흔든 건 아니었나 보다.

"으음, 처음이라 완급 조절을 잘못했나···? 아쉽지만 어젯밤 나눴던 대화는 혼자만의 추억으로 남겨둬야겠군. 그래도 앞으로 함께할 시간은 많으니 괜찮겠지."

정말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이해와 공감을 배우지 못한 아이답다.

평소라면 내게 사과를 하는 게 먼저 아니냐고 혼을 냈겠지만,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신성력이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억누르는 까닭에 화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하던 얘기나 계속하기로 했다.

"내가 편지를 읽어도 된다고 허락한 건 아니지? 그러니까 사과했던 거고. 그런데 대체 왜 읽은 거야?"

"사랑하는 사람에겐 보통 어떤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그래?"

"그러하다."

꽤나 안타까운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그냥 그렇구나 하는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타락펜스는 사람을 대하며 늘 이런 기분을 느껴왔겠지.

"앞으로 다시는 내 편지를 멋대로 꺼내 읽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보통 사람들은 이런 거 싫어하거든. 나도 예외는 아니고."

"알겠다. 대신 내게도 그런 애정 넘치는 말들을 많이 해 줬으면 한다."

"아도르가 하는 거 봐서? 지금은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지만."

"그런···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알려준다면 노력해 보겠다."

"알려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보다 내 아공간 주머니 좀 줘 볼래? 편지 넣고 먹을 거 꺼내게."

"······."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고, 무표정으로 돌아간 타락펜스가 내게 아공간 주머니를 내밀었다.

머릿속으로 가여워 보인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가슴이 욱신거린다거나 슬픔이 밀려들어 먹먹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신성력으로 정신을 안정시키는 게, 아무나 쓸 수 없는 고급 기술이라서 다행인가?'

교단에서는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이 찾아와도, 신성력을 쓰는 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두는 듯하니.

타락펜스처럼 아무 때나 남발하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런 생각이나 하며 테이블 위에 치즈가 들어간 볼로네제 미트 파이를 꺼내 놓았다.

메뉴 선정 이유는 간단하다. 세 끼나 굶었으니 든든하게 먹고 싶어서다.

파이를 반으로 가르니 치즈가 쭉 늘어나고 고기 육즙이 주륵 흘러나왔다.

그것을 두 개의 접시에 나눠 담는 동안에도 어깨에 올려진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자, 여기 반납."

"그 아공간 주머니는 선우가 가지고 있는 게 좋겠다. 내 손에 있으면 또 편지를 꺼내 읽을 것 같아서···."

혹시 아공간 주머니를 돌려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나 싶어서 돌려주려 했으나, 타락펜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그러고는 어째서인가 내게 밀어 넣는 신성력의 양을 갑자기 늘렸다.

머리 외에도 전신에 따스한 기운이 감돌며 근육이 서서히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마치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푹 담근 것처럼 편안하다.

"아도르? 이러니까 기분은 좋긴 한데, 밥은 언제 먹으려고?"

"으음···."

"어서 손 떼고 자리에 가서 앉아. 다 먹고 나면 간식 챙겨 줄게."

"휴우···, 기대하겠다."

내 입에서 간식 얘기가 나오고 나서야 타락펜스가 내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어째서인지 안도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면서 말이다.

그 한숨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자리에 앉는 그 순간, 쿰쿰한 치즈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여느 때라면 맛있는 냄새라고 생각했을 텐데.

어제 맡았던 부패한 동물의 사체 냄새가 떠올라 역한 기분이 들었다.

그 냄새를 연상하자 파이를 가득 채운 다진 고기까지 갑자기 징그러워 보였다.

"으읍···. 아, 아도르. 잠깐···. 저, 저것 좀···, 우욱···!"

"서, 선우?!"

타락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손을 잡더니 또 신성력을 사용했다.

지금만큼은 장시간 굶은 게 더없이 다행스러웠다. 덕분에 아무것도 게워내지 않았으니까.

신성력으로 속이 안정된 틈을 타, 나는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리며 녀석에게 파이를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덤으로 냄새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천막 입구도 걷어 달라고 했다.

내 반응에 당황한 건지 아니면 그저 내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건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으나 타락펜스가 빠르게 움직여 내 요구들을 순식간에 이행했다.

다행히도 파이를 꺼낸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닌지라, 냄새가 어디 배어들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정도 냄새면 신성력의 도움 없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내게 다가오려는 타락펜스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말한 뒤, 아공간 주머니에서 샐러드를 꺼내어 유자 소스를 왕창 뿌렸다.

유지스가 떠오르는 상큼한 풀떼기를 입에 쑤셔 넣고 났더니 비로소 살 만해졌다.

'와···, 문어랑 오징어를 먹을 수 있게 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번에는 육류랑 치즈냐?'

방금 그 반응은 입맛이 떨어지고 말고의 수준을 넘어섰다.

하루 이틀로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선우, 아직 안색이 좋지 않다."

"또 내게 신성력 쓸 생각 하지 마. 아도르가 신성력만 안 썼다면, 오늘 고기와 치즈가 들어간 파이를 꺼내 먹어야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은 안 했을 거야."

그랬다면 미트 파이를 꺼내는 건 적어도 일주일 이상 지난 후가 되었겠지.

그때쯤이면 실험실에서 맡았던 냄새가 기억 속에서 어느 정도 휘발되었을 테니, 방금처럼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거나.

"죽음에 민감하기만 한 줄 알았더니 비위도 약했군. 그제 전투를 마친 후 바로 건물 밖으로 나가 식사를 하길래 몰랐다. 앞으로는 더욱 세심하게 신경 써 보겠다."

그제라면 악마와 싸웠던 날을 말하는 걸 테다.

체감상 일주일은 지난 것 같은데 고작 이틀 전에 있었던 일이라니.

그 사실을 자각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 비위가 약한 건 맞는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거든? 만약 어제 법숭이 연구실에 나를 데려간 게 현재펜스였다면 나는 괜찮았을 거야. 이상이 생기더라도 기껏해야 하루 이틀 고기를 보면 입맛이 조금 떨어지는 정도로 끝났을걸?"

"지금의 나와 이 시간대의 내가 어떻게 다르기에 그런 차이가 생기는 거지?"

"그 녀석이라면 누구처럼 자신을 강제로 의지하게 만들겠다며 겁을 주지 않았을 테니까. 반대로 다정하게 내 상태를 물어보고 전전긍긍하며 걱정해 줬겠지. 그럼 나는 자연스럽게 현재펜스를 의지하며, 용기를 얻고 마주한 참상을 이겨 내려고 노력할 수 있었을 거야. 누군가의 진심 어린 걱정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법이거든."

"음···."

타락펜스는 눈을 깜박거리며 멀뚱히 앉아있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가 보다.

그런 녀석을 내버려두고 샐러드를 퍼먹고 있자니 질문이 들어왔다.

"진심 어린 걱정은 어떻게 하는 거지?"

"진심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야. 그냥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거지."

"내가 어떻게 해야 그런 것이 마음속에서 우러날 수 있지?"

"인위적으로 감정을 통제하는 것부터 그만둬."

"그거라면 할 수 있다."

타락펜스의 대답에 나는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제정신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나조차도 알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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