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2회
86. 공작님의 납치 (10)
'어찌 보면 기억이 살짝 날아간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상황을 반추해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녁 7시에 깨어났다는 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감정이 널뛰었다는 뜻이니까.
'부정적인 감정이 극도로 치달았다가 갑자기 차분해지는 그 기묘한 감각은···.'
이 생각은 그만하는 게 좋겠다.
나는 뿌옇게 흐려진 기억을 그대로 덮어버리며, 유자 맛이 더해진 풀떼기를 열심히 씹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건장한 근육질 체형의 세르펜스에게 이런 것만 먹여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도르, 너라도 밖에 나가서 아까 그거 먹고 올래?"
내 식단에 위기가 찾아온 이 시점에 원흉인 타락펜스를 챙겨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녀석이 눌러앉은 그 육체가 세르펜스의 것인 이상, 완전히 신경을 끌 수는 없었다.
이런 내 생각도 모르고 타락펜스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어쩔 수 없으니 간식이라도 든든히 먹여야겠다.
'겸사겸사 나도 좀 먹고.'
입맛이 떨어지고 기분은 별로지만, 이럴 때일수록 배를 든든하게 채워야 하는 법이다.
굶어서 기력까지 떨어지면 우울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테다.
나는 거의 비어버린 샐러드 그릇을 치워버리고, 마카롱 후레이크와 우유를 꺼냈다.
치즈와 같은 유제품이긴 해도, 아공간 주머니에서 신선하게 보관된 우유는 냄새를 맡아도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오목한 그릇에 마카롱 후레이크를 반쯤 채운 후 우유를 부었다.
마카롱 꼬끄의 주재료는 아몬드 분말이니까, 어지간한 시리얼보다 든든하겠지.
"오늘의 간식은 우유에 만 마카롱 후레이크야."
이 정도 설명만으로는 타락펜스는 이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녀석에게 마카롱 후레이크는 마카롱 꼬끄를 부숴놓은 것이며, 마카롱은 또 어떤 간식인지 일일이 설명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라 대충 넘어갔다.
아니, 사실은 녀석과 대화하고픈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도 하긴 해야겠지···?'
대화를 피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신성력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애정 어린 말을 해 달라는 타락펜스의 부탁을 내가 냉정히 거절하고 난 뒤, 타락펜스는 다시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내 말 한마디에 훼까닥 돌아서 날뛸 것 같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타락펜스에게 말을 붙이기에 앞서, 아직 바삭한 마카롱 후레이크를 우유와 함께 한 숟갈 떠먹었다.
그리고 타락펜스가 내 행동을 따라 하는 모습까지 확인한 후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
"그런데 아도르, 신이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거야?"
마왕 처치든 10년 효도 관광 코스든, 타락펜스의 계획은 전부 녀석이 신이 된다는 가정하에 세워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타락펜스는 알지 못했다.
녀석은 현재펜스가 해낸 일이라면 자신 또한 해낼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선우가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신이 되는 것 말고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거지?"
"다른 대책 따윈 필요 없다. 선우가 애정을 준다면, 나는 분명 바뀔 수 있다. 선우는 이미 그 결과를 확인했잖은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고, 언뜻 나를 다그치는 것처럼 들렸다.
어서 자신에게도 현재의 자신이 받았던 애정을 베풀어 달라고 말이다.
하마터면 내게 애정을 맡겨 놓기라도 했냐고 따질 뻔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도르도 현재펜스가 '아도르'라는 이름에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보네?"
"선우에게 3년이나 애정을 받았으니 당연히 그러하겠지."
"그 녀석은 받기만 한 게 아니야. 자신이 받은 만큼, 언제나 내게 돌려주려고 애썼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러하다."
"뭐, 백 보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칠게."
나는 그렇게 던지듯 성의 없이 대답해 놓고, 적당히 우유가 스며든 마카롱 후레이크를 퍼먹었다.
타락펜스가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우유에 빠진 마카롱 후레이크로 시선을 옮겼다.
실수로 우유를 흘리기라도 할까, 숟가락을 든 녀석의 손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먼저 간식 시간을 언급한 것도 그렇고, 간식을 챙겨주겠다던 내 얘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그렇고···. 혹시 내가 내어주는 간식을 애정의 일부로 여기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남은 얘기는 녀석이 간식을 다 먹고 난 다음에 이어가야겠다.
녀석을 현재펜스와 똑같이 대해줄 수는 없겠지만, 간식 정도는 마음 편히 먹게 해 줄 수 있다.
숟가락 움직이는 속도를 늦추고, 타락펜스의 그릇 속 마카롱 후레이크가 거의 사라질 때 즈음 리필도 해 줬다.
우유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본격적인 얘기를 다시 꺼낼 때가 다가온 것이다.
"이 대륙을 구하려면, 아도르 네가 신이 되는 게 가장 확실하다고 했지?"
나는 우선 질문부터 냅다 던져 놓고 그릇에 입을 대고 남은 우유를 원샷했다.
그러자 타락펜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나처럼 그릇에 입을 대고 우유를 마셨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한 손으로 그릇을 들었고, 녀석은 두 손으로 그릇을 잡았다는 것 정도?
"신이든 반신이든. 우리 편에 강한 존재가 있어야 승률이 올라간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니까 부정하진 않을게."
"그렇다는 건 드디어 나를 인정하겠다는 건가?"
"아니, 그 반대야.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빼앗은 적 없고,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가득 차 있던 녀석조차. 3년이 흐른 지금도 다 성장하지 못했어."
현재의 세르펜스가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다.
함께 싸우는 일행들도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한참 성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타락펜스는 현재펜스의 3년을 따라잡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건 3년보다 훨씬 긴 세월이 필요할 테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아도르보다 현재펜스가 신이 되는 게 더 빠를 것 같지 않아? 게다가 성검을 든 휴마누스와 다른 일행들이 함께 싸워 줄 테니, 네가 신이 되어 혼자 싸우는 것보다 승률도 훨씬 높을 테고."
"현 시간대의 나는 신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잖은가."
"아도르. 네가 1회차의 기억을 통해 신성력 날개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처럼, 현재펜스도 네 능력을 얻을 수 있어."
물론 현재펜스에게 그런 가혹한 짓을 시킬 생각 따윈 추호도 없지만.
이런 내 생각을 타락펜스가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다.
뭐, 눈치채고 따지더라도 상관없다. 그땐 현재펜스의 의식이 깨어 있다는 얘기를 꺼내면 되니까.
"···기억을 본다고 하여도, 경지에 바로 오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지름길 정도는 찾을 수 있겠지. 그럼 네가 '아도르'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경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불확실성에 기대어 나를 포기하지 마라. 선우가 현 시간대의 내게 준 것보다 더 많은 애정을 베풀어 준다면···, 나도 빠르게 '아도르'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얘는 대체 사람의 감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급한 마음에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녀석의 얼굴은 확신에 차 있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아도르, 네가 받고 싶은 건 내 진심 어린 애정이야? 아니면 의무적인 돌봄이나 생존 본능에 의한 의존 같은 거야?"
"당연히 진심 어린 애정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애정을 강요하고, 내 감정을 멋대로 조종하려 든 거야? 그런 방식으로는 그 누구도 네게 진심 어린 마음을 내어줄 수 없어."
"···선우가 진심을 내어주지 않는 것이 내 탓이라는 뜻인가?"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무감각하지는 않았다.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원망하는 듯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처음부터 선우가 나를 '세르펜스'로 받아들였다면, 나도 선우를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 않았을 거다."
"내가 현재펜스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잖아. 그 자리를 뺏으려 하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어?"
"선우가 먼저 안 건 지금의 나다. 내 삶을 통해 '세르펜스'라는 사람을 알고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하였잖은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현 시간대의 나를 아끼게 된 것이잖은가!"
돌연 타락펜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언성을 높였다.
어젯밤 정신이 없는 틈에 내가 진짜 별소리를 다 해놨다.
내가 속으로 기억도 나지 않는 어젯밤 일을 후회하는 사이, 타락펜스는 원형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선우가 '세르펜스'라는 존재에게 베푸는 애정은 내 것이다. 마땅히 내가 받아야 하는 관심을 현 시간대의 내가 가로챈 것뿐이고,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거다. 그러니 이제 그만 내가 진정한 당신의 '세르펜스'이자 '아도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강압적인 방식으로는 진심 어린 마음을 내어줄 수 없다고 말한 지 얼마 안 되었건만.
타락펜스는 내 어깨를 내리누르며 윽박지르듯 말했다.
어깨에 묵직하게 실리는 무게감과 강한 아귀힘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져도, 나는 이 상황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덩치만 큰 어린아이가 애정을 달라며 떼를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그럴 수는 없어.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난 게 현재펜스가 아니라 아도르라면, 나와 세르펜스의 관계는 현재와 많이 달라졌을 테니까. 내가 그 녀석에게 느끼는 감정은 결코 네 것이 될 수 없어, 아도르."
"어째서 달라졌을 거라고 확신하는가?"
이유야 많다.
타락펜스는 지나치게 많은 업보를 쌓았고, 성격도 너무 달라져 버린 데다가, 내가 시온 리벨론이 아니란 사실을 바로 눈치챘을 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의 세르펜스는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선의를 당연한 것이라 여기지 않고, 감사할 줄 아니까. 그렇기에 나는 그 녀석을 아낄 수밖에 없는 거야. 하지만 아도르 너는 내 애정을 당연하다는 듯 갈취하려 들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정신을 무너트리려고 했지."
내가 이 세상에 처음 왔던 날, 3회차의 시작 지점에 현재펜스가 아닌 타락펜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노력이야 했겠지만, 진심으로 행복을 빌어줄 수는 없었겠지.
나는 세르펜스를 지금만큼 소중히 여기지 못했을 테고, 타락펜스는 나를 자신의 소유물쯤으로 여겼을 거다.
사실 지금도 타락펜스는 나를 그렇게 여기는 것 같다.
"정신을 무너트릴 생각은 없었다."
"사람이 약해진 틈을 타서 파고들 생각을 했고, 억지로 그러한 틈을 만들어 내서 뒤흔들었으면서 그런 소릴 해?"
"약해진 마음을 억지로 봉합해 뒀던 것을 발견하고 위로해 주었을 뿐이다!"
"위로는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거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도르, 너는 단 한 번도 나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존중해주지 않았잖아? 나는 그런 사람을 상대로 온정을 느낄 수 없어. 그렇기에 나는 네게 애정을 줄 수도 없어."
"……."
내 말에 타락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제 입술을 짓씹었다.
무표정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언뜻 화가 난 것처럼 보이면서도 초조해 보였다.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