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46화 (846/925)

846회

86. 공작님의 납치 (14)

* * *

타락펜스를 옆에 눕혀 놓고 토닥거리다가 잠든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꿈 내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끔찍했다.

꿈 속에서 반쯤 썩은 쥐와 박쥐 떼가 내게 달려들었다.

기겁하며 세르펜스를 향해 손을 뻗은 그 순간 녀석의 머리칼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마왕펜스는 새까만 눈동자로 내가 쥐와 박쥐 떼에 파묻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서운 건 썩어 문드러진 쥐와 박쥐 떼 따위가 아니었다.

나를 언제나 지켜주었던 세르펜스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그래서 새벽에 잠시 잠에서 깼을 때.

"악몽이라도 꾼 모양이군. 많이 겁먹은 것 같은데, 원한다면 신성력으로 정신을 안정시켜 줄 수도 있다."

타락펜스가 꾸며낸 다정한 음색에 경계심이 풀려, 하마터면 녀석이 권하는 신성력을 그냥 받아들일 뻔했다.

내가 제안을 거절하자, 타락펜스는 꿈속의 마왕펜스와 똑 닮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얘기하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강제로 신성력을 밀어 넣는 게 아니라 의견을 물어봐 준다는 게 다행스럽긴 했으나, 위로의 말 한마디 없는 녀석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타락펜스만 재워 놓고 깨어 있을 걸···. 어차피 어제는 늦게 일어나서 졸린 것도 아니었는데···.'

타락펜스가 세르펜스의 몸을 차지하고 난 후.

악몽을 꾸고도 남았을 상황이었지만, 타락펜스가 잠든 내게 신성력을 불어넣은 까닭에 악몽을 꾸지 않고 넘어갔다.

그래서 그만 방심해 버렸다.

밤새 악몽에 시달린 탓일까?

잠들기 전보다 일어나고 난 다음이 더 피곤하고 몸이 무거웠다.

그래도 아침은 챙겨 먹어야 하기에 카야잼 버터 토스트를 꺼내어 간단하게 때웠다.

그저께 저녁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서, 세르펜스의 육체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덧붙여 원흉인 타락펜스에겐 하나도 안 미안했다.

아무튼 그렇게 비몽사몽간에 식사를 마치고, 타락펜스에게 들려서 도시까지 이동하는 동안 다시 잠을 청했다.

원래는 이 시간에 2회차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 질문할 시간은 많으니까 다행···은 아니겠지.'

다소 찜찜한 생각을 하며 잠이 들긴 했으나 이번에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밝은 햇빛과 맑은 공기. 그리고 기분 좋게 간질거리는 바람 덕분이겠지.

타락펜스의 탑승감도 꽤 괜찮았고.

"흐아암~! 그런데 여기 어디야?"

땅에 내려 선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자고 일어나면 도시 풍경이 펼쳐져 있을 줄 알았는데, 사람은커녕 건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이목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성문을 통해 들어갈 생각이다. 다행히도 아공간 주머니를 확인해 보니 위조 신분증이 꽤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더군."

타락펜스가 내게 위조 신분증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하기야 갑자기 하늘에서 사람이 뚝 떨어지면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겠지.

착지 지점을 외진 골목으로 잡아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건 멀리서도 잘 보이니까, 도시 사람들이 못 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더군다나 이 세상에는 마법사가 있으며 악숭 세력의 주요 전력은 흑마법사다.

도시의 경비들이 하늘을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적의 등장을 경계한다는 건, 이 세상의 기초 상식이다.

여기가 제국이라면 그냥 신성 결계를 무시하고 성벽에 바짝 붙어 몰래 뛰어넘었을 거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가려는 곳은 펠로 왕국의 시르틸 후작령이다.

이곳은 펠로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도시로, 외부의 침입에 대한 방비가 잘되어 있다.

성벽 위쪽으로 마법 결계가 형성되어 있어 그냥은 못 뛰어넘는다.

타락펜스의 말대로 차라리 성문을 통해 들어가는 게 더 안전하다.

하지만···.

"그 신분증이라면 아마 교단에서 준비해 준 걸 텐데 써도 괜찮겠어?"

"교단에서? 흐음···,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황태자는 내가 성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처지니까, 교단에 우리를 추적해 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거다."

"아, 그것도 그렇네?"

우리의 실종 기간이 길어지면 일행들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될지도 모르나, 당분간은 교단이 준비해 준 신분을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그때.

"선우는 일행들이 자신을 빨리 찾아내길 바라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반응을 보니 아닌가 보군."

타락펜스가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기쁘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내 목에 줄이 달린 개목걸이를 거는데,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그냥 지나쳐 버릴 뻔했다.

만약 내가 세르펜스의 웃는 얼굴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녀석의 미소에 정신이 팔려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겠지.

"내가 일행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건 맞지만, 아도르랑은 다른 이유거든? 그리고 내 목에 대체 뭘 걸고 있는 거야?!"

"처음도 아니면서 너무 유난이군."

"경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 문제잖아! 노예도 없는 세상에서 이런 걸 걸고 다니면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쪽 취향이라 생각하겠지."

내가 목에 걸린 개목걸이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치자, 타락펜스가 멀뚱멀뚱 눈을 깜박이며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넋을 놓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었다.

이렇게 녀석의 페이스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목줄에 끌려다니는 건 더더욱 안 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겠지만, 악숭이로 오해받을 수도 있으니까 평범하게 손잡고 다니자. 응? 가벼운 조사라 해도 신전에 불려 가면 정체가 바로 탄로 날 텐데, 그럼 피차 곤란해지잖아."

잠깐 상상해 봤는데 곤란함을 넘어 아찔해졌다.

정체를 숨긴 프라시더스 공작이 신의 사자이자 자신의 보좌관인 내게 개목걸이를 걸고, 본인은 목줄을 손에 쥔 채 길거리를 활보하다 걸려서 조사를 받았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여기서 더 문제가 되는 건, 이러다 들키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준 것뿐이라며 타락펜스가 오리발을 내밀 게 뻔하다는 점이다.

악숭 살롱에서 내가 펼친 연기가 있으니 억울하다고 항변도 못 한다.

"확실히···. 그런 일이 생기면 황태자와 그 일행들에게 우리의 소식이 전해지는 건 시간문제겠군."

내 간절함이 통했는지 타락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비록 녀석은 나와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내 목에 걸려있던 개목걸이가 아공간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으니, 그거 하나는 다행이다.

나는 가슴 깊이 안도하며, 아공간 주머니 속에서 예전에 싸 놓았던 위장용 짐가방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본 타락펜스가 자기 것도 꺼내 달라며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를 내밀었다.

왠지 아니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것과 내 것까지, 두 개의 가방을 녀석에게 떠넘겼다.

"성문이 보일 때까지만 들어 줘."

"알겠다."

타락펜스는 군말 없이 가방 하나를 등에 메고 다른 하나는 한 손으로 든 채, 내게 남은 손을 내밀었다.

저 손을 확 쳐내고 싶다는 충동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 목에 다시 개목걸이가 채워지겠지.

나는 치솟는 반항심을 억누르며 녀석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 보니 교단에서 성직자 신분까지 내어준 적이 있다지?"

타락펜스가 걸음을 옮기며 내게 물었다.

나는 길을 모르니 녀석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걸으며 혀를 내둘렀다.

신성력 때문에 감정이 널뛰는 바람에 내가 정신없는 틈을 타서, 정말 별의별 것을 다 캐물었구나 싶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나에 관한 정보만 탐했던 게 아닌 모양이다.

나와 세르펜스가 함께한 추억까지 탐낸 게 틀림없다.

본인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 추억을 언급하는 녀석의 행동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내가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현 시간대의 나는 성검의 주인도 아닌데, 교단이 여러 방면으로 지원해 주고 있나 보군. 신의 사자인 선우와 함께하기 때문인가?"

"그런 이유도 있긴 하지만···. 그냥 세르펜스가 악숭이들과 싸우는 데 필요하니까,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어도 교단은 흔쾌히 도와줬을걸? 내가 없더라도 말이야. 성검이 다른 사람을 선택했다고 해서, 세르펜스가 25년간 쌓아온 이미지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럴 리는 없다."

타락펜스가 내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그것도 깊이 생각해 볼 가치조차 없다는 듯, 단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녀석이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나는 알고 있다.

"아도르는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을 때 세상 사람 전부가 너를 비난했다고 생각하지?"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또한 1회차와 2회차를 통틀어, 세상 모든 사람이 성검의 주인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그러고도 모자라 악담까지 퍼부었다고 생각하겠지."

"그 또한 사실이다."

"둘 다 사실이 아니야."

"거짓말을 하려거든 좀 더 그럴듯하게 해라. 사람들이 성검의 주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악의를 보내는 건 현재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타락펜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 눈을 내리뜨고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시선에는 불신이, 목소리에서는 조롱이 묻어났다.

방금까지는 기분이 좋아 보이더니만, 좋게좋게 얘기하면 어디 덧나나 보다.

태도가 불만스럽긴 했으나 녀석의 말대로다.

이전 회차보다 상황이 훨씬 좋은 현 회차에서조차, 사람들은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를 깎아내렸다.

"하지만 세상 사람 전부가 그러한 건 아니야. 선택의 날, 아도르를 걱정하는 사람은 분명 존재했을 거야. 악숭 세력의 이간질이나 악의 가득한 여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검의 주인을 진심으로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고."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들어본 적이 없지?"

"큰 목소리로 떠드는 건 언제나 염치없는 이들이고, 대다수의 사람은 큰 목소리에 휩쓸리기 마련이니까. 선한 목소리는 금방 파묻혀 버리고, 악의에 찬 말은 뾰족한 가시가 있어서 쉽게 머리와 가슴에 들어와 박히니까. 그러니 듣지 못한 것도 당연해."

나는 목에 힘을 주어 타락펜스의 귀에 똑똑히 들리도록 말했다.

그러자 녀석의 고개 각도가 살짝 아래로 내려왔다.

녹색 눈동자에 드리워진 불신이 완전히 걷힌 건 아니었으나, 제대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진지하게 생각하며 대화를 나누겠다는 신호다.

"어째서 그렇다고 확신하나?"

"아도르도 공작저 사람들이 쓴 롤링 페이퍼···. 편지 뭉치라고 해야 이해하기 쉬운가? 아무튼 그거 읽었으니까 알 거 아니야? 선택의 날 이전에도 '성검의 주인 내정자'가 아닌, '세르펜스'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자들도 많았다는 걸."

"그자들이 좋아한 건 내가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서 연기해 온, 거짓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도망치고 싶고 자신에게 모질게 구는 세상이 원망스럽더라도. 고통을 감내하고 자신을 희생해가며 올바른 길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사람을 두고, 보통은 '정의롭다.'라고 표현해."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정의롭기를 포기한 녀석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물었다.

나름 겁을 줄 요량으로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한 듯한데, 어수선한 마음이 슬쩍 드러난 것 같아서 으스스하다기보다는 쓸쓸해 보였다.

"부담감에 짓눌려 무너질 만도 한데 그러지 않고, 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는 너를 진심으로 존경하던 사람이 많았을 거란 얘기?"

"······."

"네가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주변을 보지 못했을 뿐. 그들은 선택의 날 이후 불안정해 보이는 아도르를 걱정했을 거야. 진심으로."

나는 공작저의 사람들이 얼마나 세르펜스를 좋아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렇기에 떨리는 타락펜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목소리에 확신을 담아 말할 수 있었다.

"···설령 선우의 말대로라 하여도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상관없지 않아. 네가 알게 되니까."

이 대화를 끝으로 우리는 성문에 다다를 때까지 조용히 걷기만 했다.

타락펜스가 입을 꽉 다물고 앞만 바라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서라도 떠들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키뿐만이 아니라 다리 비율까지 차이가 나는 까닭에, 반쯤 뛰다시피 끌려가다 보니 말을 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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