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8회
86. 공작님의 납치 (16)
씻고 방으로 나오자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타락펜스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공간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었는데, 자세히 보지는 못했으나 종이 뭉치처럼 보였다.
순간 녀석이 또 내가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뜯어서 읽은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언뜻 본 바로는 서류철 처리가 되어있었으니 그건 아닐 테다.
나는 안심하며 타락펜스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또 나랑 현재펜스가 나눈 필담을 읽은 거야?"
"···나도 씻고 오겠다."
타락펜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밧줄을 꺼내 들었다.
방금 읽고 있던 건 필담이 아닌 롤링 페이퍼이며, 자신이 씻는 동안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묶어두겠다는 뜻이다.
반항해 봤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할 게 뻔하다. 까딱 잘못해서 타락펜스의 심사가 뒤틀리면 다칠 위험도 있고.
그러니 몸에 밧줄이 감기는 걸 내버려 두긴 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나는 도망 안 가니까 이런 짓은 안 해도 돼."
"그걸 어떻게 믿지?"
"아도르가 작정하고 혼자서 잠적 타면 아무도 못 찾을 게 뻔하니, 나라도 옆에 꼭 붙어야 하지 않겠어?"
"···성검 때문에 그러나? 아니면 내가 지난 삶에서 자행했던 짓을 반복할까 봐?"
"아니. 아도르를 놓치면 현재의 세르펜스는 영영 되찾을 수 없게 될 테니까."
내가 현재펜스를 언급하기가 무섭게 밧줄의 장력이 강해졌다.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세르펜스를 찾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시위하는 거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온다고 해서 내 마음이 변할 것 같아?"
"물론이다. 폭력에 굴복하면 생각이 바뀌고, 그러고 나면 마음도 자연히 따라 변하는 법 아니겠는가?"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진심이 아니야."
"알고 있다. 그러니 선을 넘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잖은가?"
"그럼 지금 이 행동은 뭔데?"
"경고."
타락펜스가 단어 하나를 입에 담으며 밧줄을 힘껏 잡아당겨 단단히 매듭지었다.
이를 꽉 악물었는데도, 밧줄이 피부를 파고드는 것 같은 고통에 '윽!'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힘 차이 때문인지 에드나에게 묶였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아프다.
"아도르···. 너는 내가 다정함으로 현재펜스를 변하게 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배운 것은 이런 강압적인 수단뿐이니까! 지금 이 상황은 선우가 자초한 것이다.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선우가 먼저 그 '다정함'이란 것으로 나를 가르쳐 변화시켰어야지."
타락펜스가 가혹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바다.
하지만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무릇 사람은 잘못된 행동을 보면 그대로 배우는 게 아니라, 그것이 그릇되었음을 인지하고 올바른 길을 찾아내는 능력도 갖추고 있으니까.
옳은 것을 보고 똑같이 따라하는 것보다, 잘못을 뒤집어 올바름을 추구하는 게 훨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잘못을 인지해 놓고도 그대로 답습하며 남을 탓하는 건 변명이라고도 할 수 없다.
아주 비겁한 행동이다.
"변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딴 소리 하지 마. 아도르는 그냥 현재펜스가 누리는 것을 고스란히 누리고 싶을 뿐이잖아. 그런데 내가 그것을 내어주지 않으니까 분풀이나 하는 주제에 지금 누굴 탓해?"
"그렇게 매정하게 말하지 말아다오."
타락펜스가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가당찮은 소리를 해댔다.
저게 사람을 의자째 밧줄로 묶어놓고 할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지금 내 꼴이 이런데 고운 말이 나오게 생겼어?"
"나오지 않을 것도 없잖은가? 선우를 묶은 것이 내가 아닌 현 시간대의 나라면 다정하게 타일렀을 거면서···."
"현재펜스는 나한테 이런 짓 안 해."
"만약 한다면?"
나는 현재펜스가 타락펜스와 비슷한 이유로 나를 묶어 놓는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이러는 거라며, 현재펜스가 나를 구속하려 든다면.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울면서 사과까지 한다면.
일단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앞으로도 쭉 곁에 있어 주겠다고 말할 것 같다.
불안감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는 거라면 안심시켜주는 게 우선이니까.
그러고 난 다음에 사람의 자유 의지를 침해하는 건 나쁜 행동이니까,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일렀겠지.
"표정을 보아하니 내 말이 맞는다는 걸 깨달았나 보군."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타락펜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현재펜스에게 물렀다.
그리고 타락펜스는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나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현 시간대의 나에겐 그렇게 지극한 애정을 쏟아 주면서, 어째서 내게는 그리해 주지 않는 건가?"
"말했잖아. 아도르, 네가 현재펜스의 자리를 빼앗으려 들어서···."
"빼앗지 않으면 존재할 수조차 없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지?"
타락펜스가 내 말을 끊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할 말이 떠오를 것 같지는 않다.
현재펜스와 타락펜스의 영혼은 한 사람의 것이라 동시에 존재할 수 없었으니까.
"얼굴조차 모르는 타인에게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려 했으면서···. 그렇게나 자상한 사람이 어째서 내게는 단 한 번의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 거지? 내가 이미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러나? 이전 삶에서 수없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거두었으니, 교정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건가?"
처음에는 타락펜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얼굴조차 모르는 타인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그 타인이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깨닫게 되었다. 악숭 양성소의 아이들을 말하는 거였다.
"반성은 누구라도 할 수 있어. 그러니 네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싶다면 도와줄게. 하지만 반성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아도르, 너는 네 선택으로 이루어진 삶을 받아들여야 해."
"결국 사라지라는 소리군."
덤덤하게 말하는 타락펜스의 목소리를 듣자 숨이 콱 막혔다.
차라리 화를 내면 역시 타락펜스는 폭력적인 녀석이라 생각하며 경계했을 텐데.
동정심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나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되도록 차갑게 말했다.
"전부 끝내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그래, 끝내고 싶었다. 성검의 선택을 받든, 받지 못하든. 나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다음' 같은 건 없었으면 했다. 하지만···. 하지만, 동시에 기대했다. 만약 세 번째 삶이 주어진다면, 그땐 남들처럼 행복이란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녀석의 목소리가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나를 원망스레 쳐다보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이내 흘러넘쳤다.
"황태자는 현 시간대의 나에게 성검을 쥐여 주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선우는 내게 희망을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다. 가능성을 본 이상, 절대 포기 못 해···. 억지로라도 이 삶을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
마치 다짐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다.
광기가 느껴지는 그 모습에 등골이 선뜩하여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타락펜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굳어있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선우는 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러니 다른 세상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잘 붙잡아 놔야겠지."
녀석은 그렇게 말하더니 아공간 주머니에서 재갈을 꺼내어 내 입에 강제로 쑤셔 넣었다.
자기가 눈을 뗀 사이에 내가 혀를 깨물어 죽기라도 할까 봐 방지책이랍시고 한 행동이다.
그러고는 세니어를 검집째 내 의자 밑에 놓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내 안전을 생각해주는 게 이렇게나 안 고마운 건 처음이다.
'이거···, X 된 것 같은데?'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칠까 봐, 비속어를 최대한 지양하는 나였으나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다.
입이 막혀있지 않았다면 순화되지 못한 욕설이 그냥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래도 전혀 다행스럽지 않았다.
'다정하게 대해주며 살살 구슬렸어야 했나···?'
타락펜스는 자신이 폭력적으로 구는 게 내 탓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녀석이 삐뚤어진 까닭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 두 단어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가 가슴에 돌처럼 무겁게 얹혔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치고 나온 녀석이 밧줄과 재갈을 풀고, 세니어까지 챙겨서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피가 안 통해서 저릿해진 손발을 주무르고 있자니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타락펜스가 수건을 푹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리고 문을 열었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왔으나 입맛이 돌지 않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문하신 음식이 워낙 많다 보니···. 아! 뭐라고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저야 오랜만에 매상을 올릴 수 있으니 좋죠! 하하하! 그런데 두 분이서 정말 이 많은 음식을 드실 수 있으세요?"
"예. 그러니 저녁과 내일 아침도 같은 양으로 준비해 주십시오."
타락펜스가 그렇게 말하고는 여관 주인에게 거금을 떠안긴 후 꺼지라는 손짓을 했다.
낯선 사람과 길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어후! 이러면 안 되는데. 원래는 제가 직접 상까지 차려 드려야 하는데···."
여관 주인이 돈 주머니를 소중히 끌어안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룰루랄라 물러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소리가 울렸고, 타락펜스가 머리에 쓴 수건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문 밖에 놓인 서빙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3단짜리 카트에는 최소 12인분은 되어 보이는 음식들로 꽉 차있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빈 도시락 통을 꺼내어 음식들을 부지런히 옮겨 담았다.
가방에 들어가지 않는 양의 음식을 잔뜩 사서 떠나면 수상하게 여길 테니,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게 되었다.
"그렇게 앉아만 있을 거야?"
현재펜스라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움직였을 텐데.
타락펜스는 멀뚱멀뚱 나를 구경하다가, 내가 빈 도시락 통을 들이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당장 먹을 2인분의 음식만 남기고 전부 통에 옮겨 담아, 아공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아도르가 씻고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생각을 해 봤는데, 시작이 좀 어긋났던 것 같아."
내가 자리에 앉으며 그렇게 말문을 열자, 타락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두 눈에 살짝 기대감이 서린 걸 보면 내 말이 이해되지 않아서 저러는 건 아닌 것 같다.
자세히 말해 보라는 거겠지.
"아도르는 겨우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도로 뺏길 것 같아 조급해졌던 거지? 게다가 자신의 의지로 현 시간대에 불려 나온 것도 아닌데, 멋대로 필요하다며 불러놓고 돌아가라 하질 않나. 자꾸만 현재의 자신과 본인을 차별하기까지 하니, 서운하기도 하고."
내 말에 타락펜스는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어린아이 같은 그 행동을 보고 있자니 현재펜스가 겹쳐 보였다.
그 덕분에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해해 줄게, 아도르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하지만 아도르도 나를 좀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를 이해해 주겠다더니, 그게 결론인가?"
"잠깐, 오해하지 마. 내 뜻대로 하자는 게 아니니까. 이해한다는 건 상대방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거지, 행동까지 따라야 하는 게 아니야."
나는 급하게 타락펜스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한 번 구겨진 녀석의 표정은 다시 펴질 줄 몰랐다.
"내가 바라는 대로 해 줄 수도 없다는 뜻이군."
"타협점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는 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