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9회
86. 공작님의 납치 (17)
내 말을 들은 타락펜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녀석의 눈썹이 올라가고 눈매가 가늘어졌다. 찡그리고 있던 미간이 펴지긴 했으나 썩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선우는 내가 무엇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가?"
타락펜스가 내 생각과 감정을 물었다.
하지만 나를 이해하고 싶어서 묻는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 줄 테니 어디 한번 떠들어 보라고 하는 듯한 말투다.
타협점을 찾아보자는 내 말이 우습나 보다.
청자의 태도가 매우 불성실하여 내 얘기가 통할까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대화를 포기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아도르가 내게서 현재펜스를 빼앗아 갔다는 생각에 화가 났어. 게다가 아도르는 나오자마자 나와 동료들을 속여서 그 녀석의 자리를 꿰차려고 했잖아? 그래서 더 불안했어. 하루빨리 내가 아는 그 세르펜스를 되찾아야 할 것 같았어."
"내 탓을 하고 싶은 건가?"
"그런 건 아니야. 오히려 사과하고 싶어. 내 불안감 때문에 아도르가 느꼈을 불안을 눈치채 놓고도 외면했어. 내 간절함이 앞서서 아도르가 평생 가슴 속에 품어왔던 간절함을 마주 보지 못했고."
타락펜스는 끝내고 싶었던 삶을 마침내 끝내 놓고도, 다시 살고자 발버둥 치고 있었다.
오직 나라는 사람 한 명에게 기대를 걸고.
그런데 나는 녀석이 간절하게 원하던 것을 슬쩍 보여주기만 했을 뿐.
내어줄 수 없으니 사라지라는 소리를 반복적으로 해왔다.
녀석이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하루빨리 그 불안을 해소하고 싶어서, 조급한 마음에 과격한 행동을 하게 된 것도 당연하다.
"아도르,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해. 하지만 나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해. 현재의 세르펜스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의지하는 대상이자, 정말 소중하고 제일 가까운 사람이거든."
"···그 역할을 내게 맡겨 주면 안 되는 건가? 나를 '그 세르펜스'라 여겨다오."
"그건 안 돼. 이제껏 함께해 온 현재펜스를 배신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다른 누군가를 대신하며 살아가는 건, 아도르 네게도 괴로운 일이 될 테니까. 절대 그럴 수 없어."
현재펜스와 타락펜스를 동일시해 봤자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삶을 빼앗긴 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현재의 세르펜스는 물론이거니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타락펜스. 그리고 스스로를 속여야 하는 나까지.
"타협점을 찾아보자고 말하지 않았었나? 그래놓고 시작부터 절대 안 된다고 선을 그어버리다니. 과연 타협이라는 게 가능하긴 한 건지 모르겠군."
타락펜스가 이죽거리며 내 언행을 비꼬았다.
내가 하는 말이 녀석에게 그런 식으로 들릴 거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시작부터 타협할 수 없다고 선을 그어버린 건 바로 녀석이다.
"가능해. 아도르, 네가 진짜로 바라는 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 신이 되어 수많은 사람에게 숭배받길 원하는 건 더더욱 아니고."
"어째서 그렇게 단언하나?"
"너에 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멋대로 이상적인 잣대를 들이밀며 기대하는 건, 선택의 날 이전의 삶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까. 내 말이 틀렸다면 어디 말해 봐. 그때처럼 자기 자신을 감추고, 거짓을 연기하며. 강요된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싶노라고."
"······."
타락펜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로 그러한 삶을 바란다고 말해 봤자 나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하지만 순순히 내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지, 죄 없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다가 기어코 피를 보았다.
"그만해, 피 나잖아!"
"나는 괜찮다. 그런 삶을 살아도···. 그로 인해 괴로워져도. 선우가 내게 온정을 베풀어 준다면···."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계속 얘기했다.
"잘 알고 있네. 본인이 뭘 바라고 있는지. 자신의 진실한 면을 마주하고도 모두 이해해 주고 진심 어린 온정으로 품어주는 거. 굳이 많을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해 줄 사람이 딱 한 명만 있어도 되는 거잖아? 그래서 일행들 곁에 머무르지 않고 나만 납치해 온 거고."
"그래···. 그게 내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다. 신이 되어 마왕을 처치하는 것 따윈 사실 안중에도 없다. 다만 그렇게 해야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있고, 그래야 선우가 내 존재를 인정해 줄 테니까···."
타락펜스가 대륙을 구원하는 일은 그저 수단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며,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듯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인정받으려면 마왕을 무찔러 쓸모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 지내온 세월 때문이겠지.
그 이후로 참 많은 일을 겪었을 텐데.
녀석은 아직도 그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때의 사고방식에 갇혀있었다.
"아도르, 내가 이 얘기를 했는지 안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말이야, 한때 내가 살려면 세르펜스를 아군으로 포섭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악숭 세력에 넘어가면 큰 위협이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세르펜스는 강하고 지략도 뛰어나니, 마왕을 무찌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그저 세르펜스를 비롯한, 내가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길 바랄 따름이야."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타락펜스의 반응을 살폈다.
녀석은 얌전히 앉아서 내가 말을 이어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 세상이 평화로워져도 내 소중한 사람들이 불행해진다면, 다른 세상에서 온 이방인인 내겐 아무 의미가 없어. 달리 말해 아도르가 마왕을 무찌르더라도, 내 가장 소중한 친구가 곁에서 웃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굳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정말 잔인한 말이로군."
타락펜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조소를 머금었다.
상처받았다는 그 표정을 보자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녀석이 또다시 폭력적인 수단을 써서 나를 억압할까 봐 긴장했나 보다.
다행히도 녀석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안도하며 몸에 과도하게 들어간 힘을 빼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편히 앉았다.
이런 내 모습을 찬찬히 살피던 타락펜스가 입을 열었다.
"선우는 어떻게 해서든 현 시간대의 나를 돌려받고 싶은가 보군. 하지만 나는 선우의 곁에 있고 싶다. 우리의 입장이 이러한데, 타협점을 찾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본인의 목적과 수단을 헷갈린 거 아니야? 아도르는 내 곁에 있고 싶은 게 아니라 애정을 받고 싶은 거잖아."
"결과적으로는 같다."
어떻게든 타협의 여지를 없애고 싶은가 보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우기고 있을 뿐이니 생각을 바로잡아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바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한 달 뒤에 휴마누스에게 성검을 반납하기로 약속해 줘. 그럼 그전까지 아도르가 바라는 대로 해 줄게."
"내가, 바라는 대로···?"
"응. 한 달 동안 아도르가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으음···."
타락펜스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 보며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내심 내 제안이 혹했는지 눈동자에 기대감 어린 이채가 반짝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하다.
일단 약속을 해서 내게 원하는 것을 받아낸 뒤, 입을 싹 닦을 생각 따위를 하는 거겠지.
"···어떤 식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거지?"
"투정을 부리면 받아주고, 울면 눈물을 닦아주고. 외로워 보이면 손을 잡아줄 거야.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하면 칭찬하며 머리도 쓰다듬어 줄 거고. 그러다가 만약 아도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혼내 줄 거야. 그러고 나서 네가 의기소침해지면 기운 나게 보듬어 줄게."
"내가 바라는 것을 얘기하면, 뭐든지 다 해주겠다는 뜻은 아니었군."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잖아."
오냐오냐하며 아이가 해달라는 것을 다 해 주다 보면, 그게 너무 당연해져서 오히려 부모의 애정을 느낄 수 없게 되는 법이다.
아이에게는 조건 없는 사랑 말고도 진심 어린 걱정도 필요하다.
"아도르가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지는 않겠지만, 아도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줄게."
"만일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앞으로 아도르랑 대화 안 할 거야."
"내가 그렇게 둘 것 같나?"
타락펜스가 가소롭다는 듯한 비웃음을 머금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어쩐지 고양이를 맞닥뜨린 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입을 다물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로 열게 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힘을 동원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 나를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아도르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할 테니까."
나는 타락펜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닫힌 입을 열게 하려고 녀석이 내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녀석은 내가 제시한 '타협안'을 받아들일 테니까.
"···정말로 약속만 하면 되는 건가? 그러면 내가 바라는 대로···. 현 시간대의 나처럼, 선우의 애정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응. 나도 약속할게."
"나를 방심하게 하여, 기회를 틈타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런 거 아니야. 정 걱정된다면, 혼자 둘 땐 오늘처럼 묶어놓고 재갈을 물리던가."
신성력을 지닌 녀석을 근처에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면, 적어도 마시는 즉각 목숨을 잃는 극독이라도 구해서 마셔야 한다.
그런 독을 어디서 구하느냐는 둘째 치더라도, 타락펜스의 반응 속도를 생각하면 그마저도 실패할 확률이 높다.
더군다나 이 녀석은 성검을 통해 룩스메아의 힘을 마구 빼다 쓸 수 있다.
'세상을 통째로 다시 시작하는 것도 가능한데, 막 죽은 사람 하나 정도는 가볍게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죽어서 고향에 돌아가는 건 고려도 안 해 봤지만, 정말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타락펜스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다."
"응, 물어봐."
"내가 한 달 뒤에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나?"
한 가지만 묻겠다던 말과 다르게 의문문이 두 개다.
그래도 요지는 하나였고 내가 답할 내용 또한 하나였으니,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아도르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힘없는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내가 아도르를 잘 못 가르친 거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그리고 한 달 더 약속을 연장하든가, 안될 걸 알면서도 침묵 작전을 쓰든가 해야겠지."
"결국 내가 만족할 때까지 애정을 베풀어주기로 결정한 건가?"
"아도르가 만족할 때까지가 아니라, 딱 한 달이거든?! 약속할 거면, 머리에 기간 똑바로 새겨 둬!"
"알겠다."
타락펜스가 매우 성의 없이 대답했다.
벌써부터 이게 잘한 짓일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방도가 없다.
녀석을 잘 키워서 회개시키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다.
'그래···. 타락펜스에게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내 방식대로 녀석을 대할 수 있다는 게 어디야? 만약 타락펜스가 먼저 비슷한 제안을 해 왔다면, 나는 녀석이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야 했을걸?'
그렇게 생각하니 빨리 말하길 잘 한 것 같다.
되도록이면 녀석에게 정을 붙이고 싶지 않았으나 이건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타락펜스 또한 세르펜스인지라, 애초에 정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니까.
원래 가까운 사람을 잃고 나면 잘해 준 것보다 못해 준 것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다.
미운 정이 들어서 헤어질 때가 되어 후회하는 것보다, 곁에 있을 때 최선을 다하여 아껴주는 게 미련도 덜 남고 훨씬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