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61화 (861/925)

861회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2)

악숭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한 건지 타락펜스가 이동을 멈췄다.

아마 놈들이 은신처에 들어가길 기다리는 걸 테다.

타락펜스는 보는 눈이 사라졌다는 판단이 들고 나서야 고도를 낮춰 지상으로 내려갔다.

주변에 있는 거라곤 나무뿐인 거로 보아 여기서 옷을 갈아입고 접근하려나 보다.

"내가 또다시 성직자 행세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타락펜스와 함께.

아공간 주머니에 있던 주교복으로 갈아입은 뒤, 허리에 천을 매고 있자니 감회가 새롭다 못해 실감이 안 난다.

그래도 에인젤 주교를 연기한 기간이 꽤 길었던 덕분일까?

거울을 꺼내 보며 양쪽 눈가에 점을 찍는 동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면서 힐끔 곁눈질로 타락펜스를 살펴보니, 녀석은 환복을 마쳤을 뿐 아니라 염색까지 끝내 놓고 멀뚱멀뚱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리 와, 아도르도 점 찍어야지."

나는 가까이 다가온 타락펜스의 턱을 잡고 입술 왼쪽 아래에 점을 콕 찍었다.

하지만 아직 이 정도로는 프레이 신관이라 부를 수 없다.

녀석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가르마 방향을 바꾸고, 세르펜스의 안경 보관함에서 프레이가 착용했던 모노클을 찾아서 씌웠다.

내친김에 도발적인 표정까지 지어 보라고 하려 했으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냥 내 분장이나 제대로 끝마치자.

"나도 염색약 줘."

"다른 색으로 염색하려면 기존 염색약 효과를 지워야 한다. 그러려면 신성력을 써야 하는데 괜찮겠는가?"

"···그럼 어쩔 수 없지."

대답을 마치자마자 타락펜스의 손이 내 머리 위에 얹어졌다.

지난날 타락펜스가 내 감정을 쥐락펴락했을 때, 녀석의 손은 머리가 아닌 등에 얹어졌다.

하지만 몸 안에 흘러들어왔던 신성력이 머리 쪽으로 향하긴 했다.

그 때문인가 나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긴장한 것도 잠시뿐.

타락펜스는 딱 머리카락에 깃든 마력만 밀어내고 이내 손을 거뒀다.

그러고는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흰색 염색약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머리에 쏟은 후 눈썹과 속눈썹까지 꼼꼼히 염색했다.

"자, 그럼 어서 출발합시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막내 신관님?"

"이곳에는 저와 에인젤 주교님뿐인데 계속 '막내'라는 호칭을 쓰실 생각입니까?"

일리 있는 지적이다.

어차피 에인젤은 프레이를 어릴 적부터 키웠던 터라 그의 이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름으로 불러도 설정 오류는 아닐 터.

"아이고, 내가 실수했네! 그럼 프레이 님? 안내하시죠."

"그 전에···. 에인젤 주교님의 안전을 생각해서 검을 내어 드리긴 하겠지만, 허튼짓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사람들을 구하려는 건 어디까지나 주교님께서 그것을 바라기 때문이니 말입니다."

타락펜스가 내게 세니어를 건네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거나 그러려고 시도하면, 악숭이들에게 납치된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소리다.

타인의 목숨줄을 잡고 협박하는 모양새가 좋아 보이진 않았으나 화가 날 정도는 아니다.

직접 죽이겠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락펜스치고는 제법 유하게 말한 편이니까.

"그런 걱정일랑 넣어두고 길 안내나 해요."

"알겠습니다."

말로는 알겠다고 하면서 타락펜스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각자의 역할 때문에 목줄을 채워 끌고 다닐 수 없으니 손이라도 잡고 다니자는 뜻이다.

내가 그 손을 붙잡고 나서야 녀석이 발걸음을 뗐다.

혹여 이러다가 싸울 때도 내 손을 계속 잡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졌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악숭 은신처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마자 녀석은 내 손을 놓고 성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나를 감싸는 결계를 펼쳤다.

오색찬란한 빛깔로 보아 룩스메아의 힘을 빌려서 만든 게 분명하다.

어차피 세니어가 있으니까 그냥 내버려 둬도 됐을 텐데. 그 정도로는 영 불안하다면 자신의 신성력을 써도 되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뭣 하러 이런 낭비를 하는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이래서야 성검을 가지고 있다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렇다고 해서 타락펜스가 생각 없이 룩스메아의 힘을 끌어다 쓴 건 아니었다.

납치된 사람들은 안쪽 방이나 지하실에 옮겨 놨는지, 결계를 목격한 사람은 악숭이들 뿐이었다.

심지어 그놈들마저 결계를 제대로 살펴볼 새도 없이 단칼에 베이거나 찔려 죽었다.

놈들이 남긴 단말마의 비명을 듣고 다른 악숭이들이 나타났지만, 그들 또한 앞서 죽은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이제 남은 건 지하에 있는 흑마법사 몇 명뿐입니다. 제가 내려가서 처리할 테니 이곳에 얌전히 계십시오."

일개 신관이 주교에게 하는 말치고는 심각할 정도로 버르장머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꼰대짓을 하며 녀석을 혼낼 때가 아니다.

적이 나타나 아군을 모두 죽였는데 법숭이들이 지하에 콕 틀어박혀 올라오지 않는다면, 그 이유야 뻔하다.

'누가 들이닥친 건진 모르겠지만, 이기긴 글러 먹은 것 같으니 납치한 사람들을 혈옥으로 만들고자 서두르는 중이겠지. 부피가 작아지면 마법으로 다른 곳에 보내버리기 용이할 테니까.'

나는 타락펜스에게 어서 갔다 오라고 얘기했고, 녀석은 주변에 성화의 불씨를 흩뿌려놓고 지하로 내려갔다.

나름대로 시체 사이에 혼자 서 있을 나를 배려한답시고 그런 걸 테다.

성화는 빠르게 덩치를 키워 악숭이들의 시체를 살라먹고 신기루였던 것처럼 사라졌다.

벽과 바닥에 그을음조차 남지 않아서, 그 누구도 이곳에서 불길이 일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리라.

'그나저나 이 결계는 외부의 공격을 막기만 할 뿐만이 아니라, 안에서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구조겠지?'

살짝 건드려 보는 것만으로도 내 추측이 맞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타락펜스가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그러하다면 결계를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어쩐지 보이지 않는 목줄에 매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목을 매만지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세르펜스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어린 세르펜스와 지금의 내 상황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를 묵살당하며 남이 바라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한다거나,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지금은 아무런 자각이 없으니까 내게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겠지···?'

나도 나고 타락펜스도 타락펜스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장 괴로워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이 모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현재의 세르펜스다.

분명 현재펜스도 지금 내 처지를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니 숨이 콱 막혀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호흡에 집중했다.

그때 갑자기 타락펜스가 펼쳐 놓았던 신성력 결계가 사라졌다.

'이건 또 무슨 의미지?'

마왕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신의 경지에 근접한 타락펜스를 위험에 빠트릴 만한 자는 존재하지 않을 터.

그러니 녀석에게 무슨 문제가 생겨서 결계가 사라진 건 절대 아닐 거다.

즉, 타락펜스가 직접 거둔 거라고 봐야겠지.

'행여 내가 도망치기라도 할까,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던 녀석이 갑자기 나를 풀어 줄 생각이 들었을 리는 없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녀석이 먼저 내려간 지하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아 내려갈수록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마침내 지하실에 다다르자 타락펜스가 곧바로 내게 말을 붙여왔다.

"와 주신 겁니까?"

생략된 목적어는 분명 '이곳에'가 아니라 '내게'일 테지.

녀석은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밝게 웃고 있는데도 무척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광기가 일렁이는 두 눈을 오래 마주 보고 있기 힘들어, 나는 시선을 돌려 지하실 내부를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눈이 간 건 철창에 갇힌 사람들 쪽이다.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며 나와 타락펜스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들려왔던 웅성거리는 소리가 바로 이들의 목소리겠지.

자신들을 구하러 온 듯한 신관이 철창을 열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계단 앞에 오도카니 서 있으니 의아한 마음에 웅성거릴 만도 하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바닥을 나뒹구는 법숭이들의 모습이다.

미동조차 없길래 언뜻 보고 죽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목에 마력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기절한 모양이다.

이곳은 타락펜스도 몰랐던 장소이니만큼 이따가 깨워서 심문이라도 하려나 보다.

"프레이 님, 수고하셨습니다."

"고작 말로만 끝내실 생각이십니까?"

타락펜스가 새침하게 토라진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철창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쓰다듬을 받겠다고 이러는 건가?

황당하기 그지없었으나 그걸 내색할 수는 없다.

에인젤은 프레이를 잘 구슬려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써먹으려 하고, 프레이는 그 속내를 알고도 관심을 독차지하고자 갖은 수를 쓴다는 설정이니까.

늘 있는 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응해야 한다.

"기껏 이름으로 불러주고 있는데, 하는 짓은 막내 신관을 벗어나지 못했네요."

그렇게 말하며 팔을 앞으로 뻗자 타락펜스가 내 손바닥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남들 앞에서 머리를 쓰다듬 받는 건 처음일 텐데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 모습이다.

심지어 그 '남들'이 철창에 갇힌 채 우리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시선에 내가 다 뻘쭘하여 슬그머니 손을 거뒀다.

"악마 숭배자들을 다 제압했으면 저들부터 풀어줘야지, 뭘 하고 있던 겁니까?"

"주교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풀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를 풀어달라고 부탁했을 땐 귓등으로도 안 들었던 주제에, 타락펜스가 이번에는 순순히 그러겠노라 대답하며 철창의 잠금장치를 베었다.

갑작스런 칼부림에 놀랐는지 사람들이 움찔하며 굳었다.

타락펜스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별 반응 없이 성검을 검집에 꽂았다.

잠금장치가 잘려나갔는데도 사람들은 곧바로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우리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금슬금 서로에게 시선을 던지며 누군가 나서주길 기다렸다.

갑자기 납치된 탓에 겁을 많이 먹었나 보다.

'내가 직접 문을 열어 줘야 하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행동으로 옮기려 할 때, 비로소 철창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쭈뼛쭈뼛 걸어나왔다.

이제 자유를 되찾았는데도 어째서인가 다들 여전히 겁먹은 듯한 표정이다.

"무슨 일 있었···. 아니, 있기야 했겠죠? 악마 숭배자들에게 납치를 당했으니. 하지만 저희가 구하러 와 줬잖습니까? 근데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공손한 그들의 태도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어딘지 모르게 켕기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자니, 그들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까운 마을이 어느 쪽에 있는지 방향만 알려 주시면 알아서 찾아갈 테니, 굳이 신경 써서 데려다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럴 땐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는 게 보통 아닙니까? 수상하게 왜 이러시지?"

"수, 수상하다니요?! 저기 계신 신관님께서 주교님은 공사가 다망하신 분이시니,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런 건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는 게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기야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연재] 공작님, 회개해주세요!

출판등록: 2019년 1월 28일

지은이 : 별볆볆별명

발행처 : 글고운

주소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광로139번길 11, 1103호

E-mail : [email protected]

ISBN :979-11-89786-03-8

© 별볆볆별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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