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2회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3)
나는 저 사람의 말이 맞느냐는 물음을 담아 타락펜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녀석이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당당한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할 일이 많은 건 사실이잖습니까? 더욱이 이곳을 발견한 건 예정에 없는 일입니다. 갈 길이 바쁜데 계획과 무관한 일로 오래 붙잡혀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에인젤 주교님께서는 다정한 분이시니, 저자들이 애원하며 매달리면 곤란해지실까 봐 미리 설득해 뒀습니다."
사람들의 태도로 보아 녀석에게 겁먹은 게 확실하거늘 설득은 개뿔.
심지어는 내 핑계까지 대는 게 아주 가관이다.
입 가리고 고양이 흉내를 내도 유분수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배려해 줘서 고맙다고 생각할 줄 알았나?
이 녀석이 멋대로 구는 건 늘 있는 일이었기에 이 정도로는 화조차 안 난다.
하지만 에인젤 주교는 다르겠지. 설정상 아랫사람이 기어오르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잣말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리며 코웃음 쳤다.
"하, 내 의견을 확인하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거면서 날 생각한 척하긴."
"네, 사실 주교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게 싫어서 그랬습니다. 하나 제가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습니까?"
"프레이 신관님, 방금 그 얘기는 월권입니다."
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꾸짖는 투로 말했다.
현재펜스가 연기하는 '프레이 신관'이라면 기죽은 표정으로 사과했을 터.
그러나 타락펜스는 '프레이 신관'의 캐릭터를 다르게 해석했는지, 도도하게 턱 끝을 올리며 방자한 태도를 보였다.
"성기사도 아닌 제게 억지로 검을 들게 하며, 그 대신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주교님의 애정을 독점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를 받아들였기에 다른 지원자를 받지 않고 저와 단둘이 길을 나선 것 아닙니까?"
타락펜스가 예고도 없이 새로운 설정을 꺼내 들었으나 여기서 밀릴 내가 아니다.
설정 놀이를 하며 애드립은 지겹도록 많이 해 봤다.
"이번 임무는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하니까, 다방면으로 뛰어난 프레이 님만 데려가는 거라고 설명해 드렸잖습니까?"
"그냥 한 말씀이신 줄 알았습니다."
뻔뻔하게 대답하는 타락펜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이도 없고 할 말도 없다.
어린애가 떼쓰며 우기는 것도 아니고.
'가만, 아닌 게 아니라 그게 맞나?'
타락펜스 버전의 '프레이 신관'은 고분고분한 현재펜스 버전과 달리, 반항기에 접어든 듯한 느낌이다.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녀석을 어떻게 대해야 '에인젤 주교'다운 행동일까 고민하던 그때.
"저, 저기···. 저희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조금 전 타락펜스에게 귀찮게 굴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다며, 고자질했던 사람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타락펜스가 말다툼을 벌이는 듯하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두려워 빨리 집에 가고 싶어졌나 보다.
'마음 같아서는 안전하게 마을까지 바래다주고 싶긴 한데···.'
타락펜스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이제 3주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낯선 사람들과 나눠 쓰고 싶지 않을 테니까.
지금 하는 모습을 보면 약속한 날이 와도 성검을 반납하지 않고 버틸 것 같긴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내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 염려한 것인지, 녀석은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내 관심과 애정을 최대한 누리고자 했다.
"프레이 님, 저분들 가시는 길 알려 드리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타락펜스가 슬쩍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내가 따라주어서 기쁜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녀석에게 휘둘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다녀오기나 하라는 뜻을 담아 훠이훠이 손을 내젓자, 타락펜스가 납치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그대로 사람들과 같이 나갈 줄 알았건만.
타락펜스는 현관문을 기준으로 몇 시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으로 꺾어야 하는지 말로 대충 때운 후 내 곁으로 돌아왔다.
정말 성의 없는 설명이었지만, 사람들은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우르르 지하실을 떠났다.
다소 걱정스럽긴 했으나, 길을 잘 살펴보면 그들이 타고 온 마차의 바퀴 자국이 아직 남아있을 거다.
그 흔적만 따라가도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 나올 테니 가다가 길을 잃는 일은 없겠지.
'내가 지금 남 걱정할 땐가?'
이제 3주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초조함을 느껴야 하는 건 타락펜스가 아닌 나다.
과연 그때까지 타락펜스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마주 보게 하고, '사랑받는 삶'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끊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프레이 님이 회개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럴 수 있도록 잘 인도하여 주십시오."
타락펜스가 얄미워 보일 정도로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걱정하느라 생각에 잠긴 것이 아니라,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만족한 모양이다.
자기 혼자 만족하지 말고 나도 좀 만족하게 해 주면 좋으련만.
이 녀석은 대체 언제쯤 반성이란 것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그건 차차 해 나가기로 하고···. 일단 기절한 놈들을 깨워서 사람들을 납치하여 뭘 어쩔 생각이었는지, 그거나 물어봅시다."
내 말에 타락펜스가 기절한 법숭이들에게 작은 신성력 구체를 쏘아 보냈다.
신성력이 스며들자, 놈들이 '끄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번쩍 떴다.
몸 안에서 흑마력과 신성력이 충돌했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다.
차라리 발로 차서 깨우든가, 고문이나 다름없는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으윽···. 프라시더스 공작이 대체 어떻게 여기에···?!"
"헉, 프라시더스 공작!?"
"그렇다면 옆에 있는 저놈은 신의 사자인가···?"
눈을 뜬 법숭이들이 타락펜스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고 떠들어댔다.
기껏 프레이 신관 분장을 하고 있는데 속아주는 척이라도 해 주면 어디 덧나나 보다.
설마하니 에인젤 주교와 프레이 신관의 외양까지 악숭 세력에 알려진 걸까?
"여기 있는 사람은 프라시더스 공작이 아니라 프레이 신관입니다. 입가의 점이라든가, 순진무구와는 거리가 먼 도발적인 표정만 봐도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이 빡 오잖아요?"
"에인젤 주교가 신의 사자이며, 프레이 신관은 프라시더스 공작이란 사실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악숭 세력은 에인젤 주교와 프레이 신관이 나와 세르펜스라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별개의 사람으로 인식해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어림도 없었다.
"설마하니 사람들 앞에서도 프레이 님을 프라시더스 공작이라 부른 건 아니겠지?"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인젤 주교님. 저자들이 입을 열기 전에 전부 기절시켰으니, 방금 나간 자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법숭이들에게 따졌는데 대답은 타락펜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쩐지 놈들이 깨어나자마자 타락펜스의 얼굴을 보고 놀라더라니.
반응할 새도 없이 기절 당해서 그랬던 건가 보다.
그리고 내가 위층에서 혼자 기다릴 때 결계가 사라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건, 법숭이 제압과 무관하게 납치된 사람들을 을러대느라 그랬던 걸 테고.
그런 행동을 해댔으니 르웰이 그러했듯, 그 사람들도 프레이가 친절하기로 유명한 세르펜스라고는 의심하지 못하리라.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겠다.
"아, 그래? 그럼 됐어. 어차피 이 법숭이 놈들을 풀어줄 것도 아닌데, 프레이든 프라시더스 공작이든 마음대로 부르라지!"
"그래도 이 복장을 한 동안에는 설정 놀이를 계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죠, 뭐."
우리의 대화를 듣던 법숭이들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붉으락푸르락 하며 얼굴빛이 변했다.
자신들을 조롱하느라 일부러 우리가 장난치고 있다고 착각했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굳이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멋대로 부르는 걸 허락해 줬으니, 그쪽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악마 숭배 세력의 정보를 말해 줬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리석군! 우리가 그런 걸 순순히 얘기할 것 같으냐?!"
"그러지 말고 일단 사람들을 납치해서 뭘 할 생각이었는지, 그것부터 차근차근 알려주세요."
물어보나 마나 악마 소환의 제물로 써먹기 위해서일 게 뻔하나, 숨기는 것을 알아내려면 이런 가볍고 쉬운 질문부터 꺼내는 게 좋다.
질문과 대답이 반복되다 보면 어려운 질문에도 쉽게 입을 열게 되니까.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가 첫 질문에 협조적으로 나와야 써먹을 수 있는 수법이다.
"그런 걸 우리가 얘기해 줄 것 같으냐?!"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입을 열지 않을 거다!"
"고문 따윈 두렵지 않다!"
뻔하고 뻔한 대답조차 말하지 않으려 하는 게, 다른 질문은 물어보나 마나일 것 같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제물로 쓸 사람들을 납치해 왔고 그들을 혈옥으로 만들려 했다면. 그리고 위층에서 다른 악숭이들이 죽어나가는 걸 번히 알면서 일을 진행하려 했다면.
이들은 혈옥을 보낼 위치 좌표를 알고 있다는 뜻일 터.
'악숭 세력의 행태를 생각하면 그곳에서 바로 악마를 소환하는 건 아니고, 거기서 또 다른 곳으로 옮길 것 같긴 해.'
그렇다 하더라도 들어 둬서 나쁠 건 없다.
또한 법숭이도 일단 마법사의 일종이니까 어쩌면 '마탑의 배신자'에 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마하니 아무것도 몰라서 대답을 못하는 겁니까? 그 정도로 마왕이나 '대사제'에게 신뢰를 받지 못한 거라면 좀 불쌍한데···."
"그래,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냥 죽여라!"
피식피식 웃으면서 말하는 꼴이 내가 도발하고 있다는 걸 알고 받아친 게 분명하다.
구슬리는 건 안 될 것 같으니 협박이라도 해야 하나 싶다.
"순순히 말로 할 때 아는 바를 얘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래 봬도 우리 프레이 님은 이단 심문관 교육도 받아서 심문도 아주 잘하거든요. 이단 심문관의 심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죠?"
"고문 따윈 두렵지 않다고 했을 텐데?"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죠. 직접 당해보기 전까지는."
"그럼 해 보든가."
"이 녀석의 백부님이 교단에서 제일가는 고문계의 스페셜리스트였다는 거, 알고는 있죠? 얘는 에일리히 님보다 한 수 위입니다.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정보를 내놓는 게 어때요?"
"우리는 결코 마신 테네브리오 님을 배반하지 않는다!"
에일리히까지 들먹였는데도 쓸데없이 충성심만 뛰어난 법숭이들이 배짱을 부렸다.
진짜 고문을 당하고도 입을 열지 않을지는 알 수 없으나, 말뿐인 협박만으로 정보를 얻어내는 건 불가능할 성싶다.
"주교님, 지금 이자들을 고문하면 되는 겁니까?"
"잠깐만 기다려요."
나는 앞으로 나서려는 타락펜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내 입으로 이단 심문관의 심문, 즉 고문을 운운하긴 했으나 진짜로 타락펜스에게 그 짓을 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다섯을 셀 때까지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땐 진짜 죽여 달라고 애원할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될 테니 잘 생각하길. 5, 4, 3, 2, 1···."
목소리를 최대한 냉정하게 내려 노력하며 협박성 멘트를 꺼낸 뒤, 나는 5부터 숫자를 거꾸로 세 나갔다.
'1'까지 왔는데도 갈등하기는커녕 그 누구도 겁에 질린 얼굴을 하지 않았다.
초연한 표정을 짓거나 결의에 찬 표정을 짓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미지를 구기면서까지 '반의반, 반의반의 반···.'을 입에 담으며, '0'을 세길 미뤄보아도 그새 마음이 바뀐 법숭이는 없었다.
"소용없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최선을 다 하셨으니, 이제 제게 맡기십시오. 만일 고문 장면을 보고 싶지 않으셔서 이러시는 거라면, 잠시 기절시켜 드릴 수도 있습···."
"근처 신전에 인계할 생각은 없는 거죠?"
타락펜스가 말을 실행으로 옮기기 전에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급하게 되는 대로 말하느라 그 안에 담긴 의미도 채 곱씹어보지 못했다.
뒤늦게 아차 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타락펜스는 나른한 미소를 짓고는 성검 손잡이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정녕 그러길 바라십니까?"
"됐습니다. 그냥···, 죽이세요."
힘겹게 꺼낸 말에 타락펜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마치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다.
[연재] 공작님, 회개해주세요!
출판등록: 2019년 1월 28일
지은이 : 별볆볆별명
발행처 : 글고운
주소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광로139번길 11, 1103호
E-mail : [email protected]
ISBN :979-11-89786-03-8
© 별볆볆별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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