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3회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4)
"혹시 제가 저자들에게서 정보를 끌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프레이 님의 실력이라면 제가 잘 아는데 설마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어째서 저자들을 그냥 죽이라 말씀하신 겁니까?"
타락펜스가 누군가를 고문한다면 현재의 세르펜스도 덩달아 그 광경을 보게 될 테다.
그건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내가 타락펜스를 말리고 싶은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그야 '당신'이 고문 같은 걸 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양, 타락펜스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불쑥 얼굴을 들이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녹색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른거렸다.
"지금 '나'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자신을 '저'라고 지칭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표현을 쓰는 거로 보아, 내가 설정 놀이의 일환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악마 숭배 세력의 정보를 얻어낼 기회를 왜 제 발로 차겠습니까?"
"흐음···."
내 대답에 기뻐하거나 의아해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타락펜스는 침음을 흘리며 무언가 갈등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대체 왜 저러나 싶어 물어보려던 그때.
녀석이 느닷없이 법숭이들의 후두부를 내리쳤다.
'죽인 건가?!'
축 늘어진 법숭이들을 보고 영락없이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냥 기절한 거겠지.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타락펜스가 굳이 놈들의 뒤로 다가가서, 후두부를 때리는 번거로운 짓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당신이라는 호칭 말고 세례명으로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헤세드 님?"
다시 내게 가까이 다가온 녀석이 에인젤 주교의 세례명을 입에 담았다.
아도르라고 불리고는 싶은데 설정 놀이는 계속하고 싶은가 보다.
하기야 놀이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도중에 끊으면 아쉬울 만도 하다.
그래도 지금은 '역할'에서 빠져나와야 할 때다.
"오늘처럼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할 일이 생기지 않아도, 설정 놀이를 하고 싶다면 언제든 주교복을 입어 줄게. 당장 내일이라도.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편하게 얘기하면 안 돼? 나는 프레이 신관이 아니라 아도르랑 대화하고 싶어."
"알겠다. 그럼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해 주지 않겠나?"
"아도르가 고문 같은 건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이제 만족해?"
내 말에 타락펜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곱게 접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녀석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웃는다는 건 내 얘기대로 하겠다는 뜻인 줄로만 알고.
"그런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고문을 통해 정보를 끌어내는 건 이단 심문관들도 하는 일이며, 악마 숭배자들이 숨어서 일을 꾸미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닐진대 내 행동을 제지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 세상의 규칙과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건···, 나도 인정할게. 하지만 나는 '그 누군가'가 아도르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야."
"더더욱 이유를 모르겠군. 악마 숭배자를 제압하고 그 자리에서 심문하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지 않나? 정보란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떨어지는 법이잖은가. 그렇기에 나는 고문 기술을 익혀야만 했고, 지금이 바로 그것을 써야 할 때다."
악숭이들이 무슨 산지에서 바로 회 떠 먹는 생선도 아니고, 즉석에서 족쳐야 한다고 말하는 타락펜스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보에 신선도가 중요하다는 건 맞는 말이다. 정보를 캐내는 동안 악숭이들이 가만히 있는 건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런 논리를 내세워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애에게 그 기술을 익히도록 강요한,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 놈을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심지어 그냥 가르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 작은 아이에게 무시무시한 연장을 들이대며 고문까지 해댔다.
예비 이단 심문관들도 고문하는 법을 배우기만 할 뿐 서로의 몸에 실습해 보지는 않는다.
더구나 이단 심문관이 되는 건 강요가 아닌 선택이기도 하고.
"그걸 내가 모를까 봐? 알고 있어. 그래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내게 고문은 익숙한 일이다. 이제 와서 하지 말라고 한들,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부터라도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도록 해.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에 익숙하다는 거,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니까. 특히 아도르 네게는 더더욱."
"······."
타락펜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한 말의 의미를 분석하고 있는 걸 테다.
과연 녀석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슨 결론을 내릴까?
정적이 길어질수록 긴장감과 기대감이 뒤섞여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꽉 움켜쥔 주먹에서 땀이 배어나는 게 느껴졌다.
"이해가 안 된다."
"그래도 괜찮아."
녀석의 말에 실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건 진심이다.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솔직한 대답을 들려줬으니까.
모르는 건 내가 알려주면 그만이다.
"아도르가 배운 고문 기술이란 자신이 직접 겪어본 고통이잖아. 괴로워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는 게 익숙해졌다는 건, 아도르가 겪었던 고통을 되새기는 일 또한 익숙해지고 무뎌진다는 뜻이고."
"고통에 무뎌진다는 건 좋은 일 아닌가?"
"그렇지 않아. 무뎌진다는 건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게 아니니까. 그저 인지하지 못할 뿐, 모든 감정과 생각이 그 고통에 집어삼켜져 일상까지 잠식되어 버리는 거야."
고통은 당장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경고다.
그 경고를 무시한다면 결국에는 망가질 뿐이다.
지금 내 눈앞에서 멀뚱멀뚱 눈만 깜박거리는 타락펜스처럼.
"선우가 보기에 내가 지금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러니까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내게 매달리는 거잖아. 아니야?"
"내가 괴로운 건 그때 겪었던 고통 때문이 아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외롭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나를 통해 달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옛날 겪었던 고통은 어떻게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외면하는 거겠지."
나를 바라보는 타락펜스의 시선이 싸늘해지는 게 느껴졌다.
녀석은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다가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홧김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참고 있는 걸 테다.
"외면하지 않으면, 다시 그 시절 겪었던 고통을 되새기며 괴로워하라는 건가? 아니면 선우가 애정을 담아 나를 학대하며 그때의 기억을 덮어써 주기라도 할 텐가?"
"그런 짓은 안 해. 애초에 그런 게 도움이 될 거란 보장도 없고, 무엇보다도 아도르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설마하니 기껏 무뎌진 고통을 일깨워 놓고 그냥 방치할 셈은 아니겠지?"
"고통에서 진정으로 벗어나려면 아도르가 그것을 마주 보고 스스로 이겨내야 해. 그러는 동안 외롭지 않게 곁을 지켜줄게. 손을 꼭 붙잡고 이제는 괜찮을 거라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함께 아파하고 응원할게.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어도 아도르 혼자서 과거의 기억과 싸우게 두지는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내 손을 마주 잡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타락펜스는 물끄러미 내 손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손을 잡아주길 기다리는 일분일초가 억겁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가만히 있는 건지, 의구심이 초조함으로 변하고 또 조급함으로 발전했다.
그러다 마침내 녀석이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도 모르게 안도의 미소가 지어졌다.
조금 전 지하실로 내려온 나를 보며 타락펜스가 기뻐하던 것이 살짝 공감됐다.
"선우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노력해 보겠다."
"정말로?! 고마워!!"
"어째서 선우가 고마워하는지 모르겠군."
"아, 그게···. 아도르가 노력해 준다니까, 너무 기뻐서 나도 모르게···."
머쓱하게 웃고 있는데, 어느 순간 타락펜스는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녀석은 집요한 시선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할 말이라기보다는 묻고 싶은 게 있다."
"얼마든지 물어봐, 질문은 언제나 환영이니까."
"그럼 묻겠다."
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거길래, 묻기 전에 내게 허락까지 받는 걸까?
이제껏 내 의사를 무시하며 제멋대로 굴던 녀석이 이러니까 괜히 불안해졌다.
"선우는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중 아니었나?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내가 악마 숭배 세력의 사제를 죽이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잖은가. 그건 '죽음'에 익숙해지기 위한 행동인 줄 알았는데?"
"나는 그저 외면하지 않으려는 것뿐이야.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고 나 몰라라 하고 싶지 않으니까. 익숙해지더라도 아도르처럼 무뎌질 생각은 없어. 끝없이 경계하고, 죽고 죽이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할 거야."
"흐음···."
타락펜스가 묘한 콧소리를 흘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아픈 걸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고통을 자초하느냐는 질문이라도 던지려는 걸까?
그런 게 아니라고 반박할 말들을 떠올려 보고 있는데, 타락펜스의 입에서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선우가 저자들을 죽여 보겠는가?"
"···뭐?"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어리둥절하고,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이 전부 날아가 머릿속이 텅텅 비었다.
나는 자꾸만 멍멍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그러면서 방금 타락펜스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아도르, 너···. 방금 내게, 그···."
"저들을 죽여 보라고 했다."
"······."
"왜 그렇게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지? 책임을 떠넘기고 싶지 않다고 선우가 자기 입으로 말했잖은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타락펜스를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잘난 척 떠들어 댄 주제에 고작 이 정도 각오조차 하지 않았느냐고, 질타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숨이 턱 막히고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럽고 정신이 아찔하다.
"선우가 그럴 각오도 없이 가볍게 입을 놀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이라 어려워서 그런 거라면 내가 도와주겠다."
타락펜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살거리며, 검집에 든 세니어를 뽑아 내 손에 강제로 쥐여줬다.
세니어가 '검'이라는 사실이 무서우리만치 실감 났다.
어느새 내 뒤에 선 타락펜스가 내 손을 겹쳐 잡았다.
그러한 까닭에 손가락에 힘을 풀어도 세니어를 놓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훌륭한 검을 지니고도 이제껏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다니, 아깝지도 않은가?"
"자, 잠깐···. 아도르, 이건 아니야. 이러지 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받아들일 수가 없다.
눈앞이 흐려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목소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다 떨렸다.
뒤에서 떠미는 힘에 의해 균형이 무너지며 반사적으로 한쪽 발이 앞으로 내디뎌졌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으나 압도적인 힘 차이는 내 의지 따윈 가볍게 묵살해 버렸다.
"내 생각에 선우가 죽음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건, 누군가를 죽여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해 보면 알겠지. 혹시 아는가? 막상 첫 살인을 경험하고 나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
귓가에 조곤조곤 들려오는 목소리가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봐도 녀석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오히려 버티는 힘만 빠져서 두 발짝 앞으로 떠밀렸다.
그리고 툭, 발끝에 무언가 닿았다.
"제발···, 흐윽! 그만둬, 아도르···! 부탁할게, 제발, 제발···!"
다급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타락펜스는 멈추지 않았다.
손이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려졌다는 걸 자각한 순간,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숨이 가빠졌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꺽꺽거리며 눈을 질끈 감은 그때.
"으음···."
묘하게 익숙한 침음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몸이 뒤로 끌어당겨졌다.
타락펜스의 손이 떨어져 나가며 세니어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나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재] 공작님, 회개해주세요!
출판등록: 2019년 1월 28일
지은이 : 별볆볆별명
발행처 : 글고운
주소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광로139번길 11, 1103호
E-mail : [email protected]
ISBN :979-11-89786-03-8
© 별볆볆별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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