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65화 (865/925)

865회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6)

내 질문에 타락펜스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살짝 기울어진 고개가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는 문제와 맞닥뜨렸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제껏 녀석이 내게 해 온 짓들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모든 짓이 일부러 나를 망가뜨리려고 그런 게 아니었던 거야···?'

억하심정이 끓어올랐으나 그것을 토해내지 않고 삼켰다.

타락펜스는 자신의 감정을 마주할 줄 모르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녀석의 잘못된 행동을 무조건 이해하며 견디겠다는 건 결코 아니다.

먼저 던져 놓은 질문의 답을 아직 듣지 못했으니 뒤로 미루는 것뿐이다.

이는 대인 관계에 서투른 타락펜스를 몰아붙이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나···.

'나를 위해서지.'

만약 내가 앞서 던졌던 질문에 녀석이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자신의 마음 가는 방향을 제대로 알고 행동하라는 조언은 가급적 삼가야 한다.

녀석이 본격적으로 나를 망가뜨리고자 작정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우선은 그런 마음을 먹는 게 옳지 않다는 걸 먼저 이해시켜야 한다.

"흐음, 그렇군."

타락펜스가 작은 목소리로 독백했다. 드디어 결론이 나왔나 보다.

나는 잔뜩 긴장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자신의 행동에 반성하며 사과해 준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겠지만, 가능성은 무척이나 희박하니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반대로 '선우가 나와 같아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확률은 높으니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선우가 나처럼 변한다면 나를 잘 이해할 수 있을 테고, 내게 모든 걸 의탁한다면 더 이상 현 시간대의 나를 찾지 않겠지. 그렇게 된다면 무척이나 기쁠 것 같다."

이 녀석이 그러면 그렇지.

상상만 해도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타락펜스가 언뜻 해사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겉보기에는 정말 밝은 웃음이었으나 오싹할 정도로 서늘함이 느껴졌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는 아니니 침착하자.

그나마 다행인 건 녀석의 최종 목적이 나를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녀석에게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얘기는 아예 통하지 않을 터.

가능하면 타락펜스가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녀석의 결론이 잘못되었음을 설명해야 한다.

나는 할 말을 고르고 골라 신중히 말문을 열었다.

"엄청 섭섭했구나? 내가 네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서. 괴로움에 익숙해지고 견디는 것만이 아도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다짜고짜 그러지 말라고 해서 미안해."

"어째서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내가 또다시 선우에게 살인을 시킬까 봐 뒤늦게 걱정이라도 된 모양이지?"

"아도르가 섭섭하고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과한 것뿐이야."

내 대답에 타락펜스가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내긴 했으나 은근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어쨌거나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내 태도에 만족한 모양이다.

"그리고 살인···에 관해서도 할 말이 있어. 아도르는 날 괴롭히고 싶어서 그걸 강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 내가 평온해질 거라고 생각해서. 나를 위해 그랬던 거지?"

"그렇다. 또한 내가 선우의 방식을 따르겠다고 했으니, 선우도 내 방식을 경험해 보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표정은 진실했다. 나를 속이려는 의도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면 타락펜스는 그동안 내게 악의를 품고 해치려 든 적이 없다.

내게 법숭이를 죽이라 했던 건 방금 녀석이 말했던 이유 때문이었고.

신성력으로 내 감정과 정신을 제멋대로 조작해 댄 건, 단지 내 경계심을 허물고 더 가까워지기 위함이었다.

그 밖에도 납치한 일이라든지, 화가 났을 때 내 손목이나 발목 등을 꽉 움켜잡는다든지.

녀석이 보인 모든 폭력적인 행동은 그저 투정에 불과했다.

문제가 있다면 어린애나 다름없는 정신연령에 비해, 녀석이 너무 강한 힘을 지녔다는 점이다.

반면에 나는 저항할 능력이 전혀 없다.

"아도르에게 나쁜 의도가 없었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 방식을 내게 추천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게 있지 않아?"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생명을 앗아가는 것에 익숙해지고 나서, 아도르는 평온을 얻었어?"

"그러하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진짜로 아무 문제도 없었는지."

자신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내 말이 탐탁잖았던 걸까?

타락펜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고 대화를 이어 나가도 상관없지만, 최대한 녀석을 잘 달래야 원만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겠지.

불만스럽게 튀어나온 녀석의 입술을 손으로 꾹 눌렀다.

손바닥을 통해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녀석의 기분이 좋아진 것 같으니 이 틈에 조금 예민한 말을 꺼내야겠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익숙해지고, 아도르는 자기 자신을 악인이라 규정하며 혐오했잖아. 선인이 되고 싶어서 남들이 제시한 이상적인 모습을 따라잡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잖아."

"으음···."

타락펜스가 입꼬리를 끌어 내리며 침음을 흘렸다.

나는 부정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부정해 보라는 의미로, 녀석의 입을 누르던 손을 치웠다.

그래도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녀석이 꾹 다물려있던 입술을 뗐다.

"하지만 선우는 계속 이 세상에서 살아갈 생각이라 하지 않았나? 결정적인 순간에 적을 죽이길 망설이다간 위험에 처하게 될 거다. 나는 그때를 위해서라도 미리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내 손으로 누군가를 해쳐야 할 날이 올 수도 있겠지. 그래도 타인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혹시 모를 앞날을 대비하여 '연습 삼아' 그러고 싶지는 않아. 그런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거, 아도르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

"······."

과거 회상이라도 하는 건지 타락펜스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런 녀석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그러자 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정말로 잡아주는군."

"그러겠다고 했잖아."

"괜찮다는 말은?"

"이제 할 거야. 아도르는 더 이상 무력한 어린아이가 아니니 앞으로는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괜찮아."

이대로 단순히 위로만 하고 끝낼 생각은 없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녀석의 손을 단단하게 잡으며 눈을 맞췄다.

지금부터 내가 할 말을 오해하지 말아 주었으면 해서.

"아도르. 너는 그때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해. 네가 당했던 대로 남을 대해서는 안 돼. 내가 괴로움에 빠져 허덕인다고 해서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건 아니야. 도리어 너를 돌볼 여유가 사라지게 될 테고, 어쩌면 너를 원망하게 될지도 몰라. 진정으로 그런 걸 바라는 거야?"

"그건 절대 아니다."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서 나를 납치까지 했던 녀석이니만큼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

나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 나갔다.

"있지, 그거 알아? 비슷한 고통을 겪은 사람끼리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꽤 많다는 거. 자신은 더 힘든 일을 견뎌냈는데 고작 그 정도로 힘들어하는 거냐면서."

타락펜스가 살던 시기의 사람들은 대부분 삶의 보금자리를 위협당하고,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을 겪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서로 화합하지 못했다.

원인 제공자이자 그런 상황을 유도했던 타락펜스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듣고 보니 그런 경우를 종종 봐 왔다."

짐작했던 대로 타락펜스는 내 얘기를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신과 같아져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침울해졌는지 표정이 어둡다.

이번에는 녀석이 좋아할 만한 말을 해줄 순서다.

"비슷한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무조건 상대방이 이해되는 게 아니듯, 사람은 비슷한 고통을 겪지 않고도 얼마든지 타인을 이해할 수 있어. 이해심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심에서 나오는 거니까. 물론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가끔 착각이나 억측도 하고, 남을 위해 마음을 쓸 여유가 없으면 종종 상대방이 바라는 것을 놓칠 때도 있긴 해. 그래도 그런 건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진 말고."

"선우가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 내게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가? 그리고 그건···, 내 탓인가?"

나는 그렇노라고 직접 말하는 대신에 다른 표현을 찾아보기로 했다.

녀석이 작게나마 깨달음을 얻고 반성할 수 있도록.

"배려심은 서로 주고받아야 오래 유지될 수 있어.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겠다고 우기는 순간, 이해는커녕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질 거야. 그러니 아도르, 널 위해 나를 배려해 줘. 그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며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야."

"···현 시간대의 나와 선우처럼?"

"그렇게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

"······."

내 목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반사되며 생긴 울림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타락펜스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노력하기 싫어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건 아닌 듯 보였다.

침울해 보이는 녀석의 표정으로 보아, 가만히 놔뒀다간 오늘이 다 가도록 답을 듣지 못하게 생겼다.

나는 '응?' 하는 소리를 내어 대답을 보챘고 그제야 타락펜스가 말문을 열었다.

"···나는 자신이 없다. 배려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선우를 이해하는 방법은 더더욱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째서 선우가 나를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건지도 이해가 안 간다. 내게 있어 선우는 불가해한 존재다."

"아도르가 날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나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서야. 우선 그 생각부터 고치고 나를 다시 자세히 살펴봐 줘. 내 감정을 무시하지 말아 줘. 그러면 어떻게 나를 대해야 할지 알게 되면서, 자연히 배려할 수 있게 될 거야."

"······."

타락펜스가 어딘지 모르게 먹먹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이 내게 법숭이를 죽이라고 종용했을 땐 살짝 밉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너무 안쓰러웠다.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지그시 누르듯 끌어당겨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기대게 했다.

그리고 가만가만 등을 토닥였다.

"아도르가 서툴다는 건 내가 이해할게. 잘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그러니까 노력해 주겠다고 약속해 줄래?"

"그 전에···, 한 가지만 확인하게 해 다오."

"어떤 거?"

"선우를 몇 번이고 울렸던 나를 이렇게 보듬어 주고, 내가 흑마법사를 고문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건···. 혹시 현 시간대의 내 의식이 깨어있기 때문인가?"

타락펜스가 질문을 던져 놓고 답을 확인하는 게 무섭다는 듯 내 품에 파고들었다.

단 한 번도 이 녀석에게 그 얘기를 꺼낸 적 없었기에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여기서 동요하면 또 무슨 오해가 생길지 모른다.

나는 머릿속으로 평정심을 되새기고 토닥임을 계속 이어 나가며 말했다.

"그런 이유도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하지만 나는 너랑도 잘 지내고 싶어. 기왕 이렇게 만나서 한 달 동안 함께하게 된 거,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들을 꼭 이뤘으면 좋겠어. 이 마음은 진심이야."

"그 말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다."

"그럼 믿어 줘."

"···노력해 보겠다. 선우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것도. 하지만 내 능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니 선우가 꼭 도와줘야 한다."

"응,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만약 내게 미흡한 점이 있다면 얘기해 줘. 고치도록 노력할게."

"······."

타락펜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어깨에 이마를 문댔다. 알겠다는 뜻일 테다.

드디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 기분이다.

[연재] 공작님, 회개해주세요!

출판등록: 2019년 1월 28일

지은이 : 별볆볆별명

발행처 : 글고운

주소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광로139번길 11, 1103호

E-mail : [email protected]

ISBN :979-11-89786-03-8

© 별볆볆별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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