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69화 (869/925)

869회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10)

* * *

결국 제국의 수도에 오고야 말았다.

공작저와 연결된 비밀 통로로 나를 안내하며, 타락펜스는 기대감에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냈다.

반면에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타락펜스를 위해서라면 수도에 온 건 잘한 일이다.

과거의 녀석이 성검의 주인 내정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대외펜스 연기를 훌륭히 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에일리히 님께 몹쓸 짓을 저지르는 것 같단 말이지···?'

그는 과연 '다른 회차의 세르펜스'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게 걱정이다.

물론 똑같이 애정을 보이기야 할 테다.

그러나 그 깊은 애정만큼 다른 회차의 세르펜스가 겪은 비극에 가슴 아파하겠지.

에일리히의 처지에서도 이것저것 고려해 봤어야 하는데,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를 만나러 와 버렸다.

"흐음, 바로 이 뒤쪽이 응접실이기는 한데···."

타락펜스가 비밀통로의 한쪽 벽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 눈에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벽처럼 보였지만, 숨겨진 버튼이라도 있는 거려니 하고 넘길 수 있다.

이 비밀 통로에 들어올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으니까.

그보다 지금은 비밀 문이 아니라 타락펜스의 중얼거림이 더 신경 쓰였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선우의 말에 따르면 집무실에는 내 백부라는 자와 할버드를 쓰는 이단 심문관. 이렇게 두 명만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 혹시 누가 더 있어?"

"신성력을 지닌 두 명 외에 한 명이 더 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신성력이나 마력, 오러와 같은 능력은 익히지 않은 듯하고, 으음···. 내가 모르는 사람인가? 아니면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희미해진 탓에 구분을 못 하는 건가?"

비밀 통로는 방음이 확실하긴 하지만 사람의 기운까지 막아주지는 못한다.

타락펜스가 눈을 감고 집무실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집중하는가 싶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뜨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무래도 '세르펜스'는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기운과 기척을 전부 외운 모양이다.

하긴 그래야 침입자와 아닌 자의 기척을 구분할 수 있을 테니, 의심병에 시달리는 녀석이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았다.

"아무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면 업무 보고하러 온 행정관 아닐까? 내가 공작저에 오고 나서 현재펜스의 업무를 줄이려고 행정관을 좀 더 뽑으라고 했거든."

"그건 아닌 것 같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신성력을 보유한 둘 중 한 명이 선우의 기척을 느낀 것인지 응접실로 넘어왔다. 그 누군지 모를 한 명과 함께."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온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해 행정관을 대동할 리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짚이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이제는 제온 로베르토가 되어버린 구(舊) 제온 리벨론이다.

타락펜스는 제온을 만난 적이 없을 테니, 기척으로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라시더스 가문의 집사와 정보 단체의 수장을 겸하고 있는 제온을 빼면, 공작저의 비밀 통로를 당당하게 돌아다닐 만한 일반인은 나 정도다.

또한 전·현직 이단 심문관은 교단을 통해, 내가 세르펜스와 단둘이 비밀 임무에 나섰다는 정보를 들었을 터.

'그러니 비밀 통로에 있는 게 나라고 생각해서, 나와 그럭저럭 친한 편인 제온과 함께 응접실로 이동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퍼즐이 딱 들어맞는다.

우리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한 명 늘어나긴 했지만, 원래 계획대로 진행해도 별문제 없을 것 같다.

그 계획이란 내가 앞장서서 에일리히에게 따로 할 말이 있으니, 알타르에게 나가 달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여기에 제온이 추가된다고 한들 바뀌는 건 없다.

그의 입이 무겁다는 건 옛날 옛적에 확인했으니까.

사실 계획이란 표현도 무색한 정면 돌파였으나 별수가 없다.

어차피 알타르가 타락펜스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고 알타르가 자리를 비울 때까지, 주야장천 기다리는 건 과도하다 못해 심각한 시간 낭비다.

직선 거리를 놔두고 길을 돌아온 만큼 괜한 것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타락펜스는 아레나 왕국의 악숭 거점에 쳐들어가려면 본인이 있어야 하니, 한 달을 넘겨도 그 핑계로 머무를 작정인지 내심 시간을 끌고 싶어 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속전속결로 에일리히와 타락펜스의 자리를 주선하고자, 이런 방법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럼 제온일 거야. 제온에 관해서는 내가 얘기했지? 괜찮으니까 그냥 계획대로 가자."

"밖에서 비밀 통로를 열려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얼른 신성력 흘려서 너도 같이 와 있는 거 알리고 뒤로 물러나 있어."

만에 하나 에일리히와 알타르가 비밀 통로에 있는 게 나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다짜고짜 공격이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래서 '세르펜스'와 함께 와 있다는 걸 알리고자 녀석에게 기운을 드러내게 시킨 거다.

타락펜스가 후드를 푹 눌러쓰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마침 타이밍 좋게 벽이 움직이며 보이지 않던 문이 생겨나 소리 없이 열렸고, 세르펜스와 똑 닮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온 님···? 어째서 들어오시지 않고 그곳에 가만히 서 계시는 겁니까?"

에일리히가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지며, 타락펜스가 있는 비밀 통로 안쪽을 살펴보려고 들었다.

아직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는데 타락펜스를 내보일 수는 없다.

나는 에일리히가 아예 비밀 통로로 들어오려 하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세르펜스의 말에 따르면 에일리히 님과 알타르 님 말고도, 다른 인기척이 느껴진다고 해서요.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특별한 능력이 없는 일반인 같은데, 그러다 보니 누구인지 분간하느라 시간이 좀 걸려서···."

"시온아, 아빠다!"

에일리히나 알타르, 제온의 것이 아닌.

은근히 익숙한 듯하면서도 한없이 낯선 목소리가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 에일리히의 어깨너머로 매우 익숙한 녹갈색 곱슬 머리카락이 언뜻 보였다.

'설마, 리벨론 백작···? 저 사람이 대체 왜 여기 있어?!'

리벨론은 리벨론인데 전 리벨론인 제온이 아니라 현 리벨론이었다.

공작저에 오는 건 비비와 리벨론 백작 부인뿐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째서 리벨론 백작이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비밀 통로의 어둠 속에 내 모습을 숨겼다.

"어어···, 오랜만입니다. 어째서 아버지께서 이곳에 와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급히 에일리히 님과 따로 나눠야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잠깐 알타르 님과 함께 자리를 비켜 주세요."

"아, 알았다. 그런데 방에서 나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게 해 주면 안 되나?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지, 하도 오래돼서 이러다 얼굴 다 까먹겠구나."

"까먹긴요, 거울 보시면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하긴, 네가 날 많이 빼닮긴 했지!"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분일초가 즐겁다는 듯, 리벨론 백작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실제 그 아들은 늘 곁에 있었을 테고 나는 생판 남이지만.

'기껏 타락펜스에게 비비의 위치를 파악해 달라고 한 뒤, 별관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마음 편하게 이리로 온 건데···!'

리벨론 백작 부인은 비비와 떨어지려 하지 않을 테니, 비비만 피하면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여기서 리벨론 백작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리벨론 님, 오랜만에 아드님을 보셔서 기쁘신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시온 님께서는 에일리히 님께 급한 용무가 있다고 하시니, 저희는 나가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 목소리는 알타르다.

그는 내가 '시온 리벨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곤혹스러움을 알아채고 리벨론 백작을 치워 주려 하는 걸 테다.

리벨론 백작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으나 아들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알타르와 함께 얌전히 응접실을 나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일에 집중하느라 알타르 님께서 먼저 선우 님의 기척을 알아채고, '시온 님의 기척이 느껴집니다.'라고 말해버리는 바람에···. 그래도 못 오게 말렸어야 했는데···."

두 사람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자, 에일리히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변명 섞인 사과를 해 왔다.

세르펜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보다 내게 사과하는 걸 우선시하다니.

내가 어지간히도 난감해 보였나 보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리벨론 백작이 대체 어째서 이곳에 와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건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에일리히의 목소리가 점차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소심하게 내 눈치를 살피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현재펜스의 모습이 떠올라 혼란스럽던 감정이 가라앉았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에일리히에게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다.

그의 얘기에 따르자면 리벨론 백작은 어린 자식과 아내만 멀리 떠나보낼 수 없어, 자발적으로 수도행을 결심했다는 것 같다.

영지는 카론에게 넘겨 줘 버리고 말이다.

리벨론 백작은···.

아니다, 이제 은퇴했으니 전 리벨론 백작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는 시온의 어머니와 비비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여관방을 전전하며 이따금 공작저로 찾아왔다고 한다.

너무 자주 찾아오는 것도 폐가 될까 싶어 매일 오지도 못하고, 외로이 여관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이 안쓰러워서.

에일리히가 그에게 별관은 넓으니 들어와서 가족들과 함께 살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러자 시온의 아버지는 자기까지 공짜로 공작저에 눌러앉을 수 없다며, 뭐든 돕게 해 달라고 했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에일리히의 보좌관 업무를 수행하느라 집무실에 함께 있었던 거라니···.'

얘기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된다.

비비가 살해 위협을 당했을 때 충격받은 건 그의 어머니뿐만이 아니었겠지.

전 리벨론 백작도 불안한 마음을 달래지 못해 수도까지 따라온 걸 테다.

그리고 에일리히는 가족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그러다가 늦어버렸을 때의 고통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전 리벨론 백작과 에일리히,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저였어도 전 리벨론 백작에게 들어와 살라고 했을 테니까, 너무 제게 죄송해하지···."

마세요, 그 세 글자를 말하려는 순간 뒤에서 지그시 등을 떠미는 힘이 느껴졌다.

얼떨결에 서너 걸음 앞으로 나아가 제자리에 멈춰 섰을 땐, 어두침침한 비밀 통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우, 내가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

분명 세르펜스의 목소리와 일치하건만, 묘하게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에 에일리히의 얼굴에 의문스러움이 떠올랐다.

동시에 나는 아차 하며 이곳에 온 본 목적을 떠올렸다.

"에일리히 님. 이건 진짜 정말 비밀인데요, 지금 이 세상은 파멸을 맞이한 후 재 시작한 세상입니다."

"네?"

"그리고 지금 제 옆에 있는 이 녀석은 바로 그 시절의···."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해하기 힘드시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선우 님. 안색이 너무 안 좋잖습니까?! 통로 안에 계셨을 땐 단순히 그림자가 져서 그런 줄 알았는데···."

에일리히가 놀란 표정으로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따뜻하고 온화한 기운이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가며 활력이 샘솟았다.

[연재] 공작님, 회개해주세요!

출판등록: 2019년 1월 28일

지은이 : 별볆볆별명

발행처 : 글고운

주소 :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광로139번길 11, 1103호

E-mail : [email protected]

ISBN :979-11-89786-03-8

© 별볆볆별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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