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2회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13)
"억지로 캐묻고 싶진 않지만···. 방금 본 것이 있는 만큼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혼란스러운 뇌리에 차분하지만 강단 있는 에일리히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어차피 타락펜스가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이상 더는 에일리히를 속일 수 없다.
이젠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우 님, 홀로 감당하지 말고 사실을 말씀해 주십시오."
마치 간청이라도 하듯이 말하며, 에일리히가 몹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순 그에게서 현재펜스의 모습이 보였다.
단순히 얼굴이 닮아서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미 에일리히는 내 옆에 있는 녀석이 성검펜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분위기와 나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이 녀석이 마냥 착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챘을 테다.
또한 내가 숨기려 하는 것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진실이란 것을 모르진 않겠지.
그런데도 에일리히는 사실대로 말해 달라 얘기했다.
호기심 때문도, 조카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욕심 때문도 아닌.
내가 걱정되어서.
'세르펜스···. 그 녀석도 지금 나를 걱정하며, 누구에게든 털어놓으라 말하고 싶어 하려나?'
내가 아는 그 세르펜스라면 분명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을 포함하여 그 무엇보다 나를 가장 우선으로 여기니까.
소심하고 겁이 많긴 해도 용기를 내야 할 땐 용기를 낼 줄 아는 녀석이니까.
2회차의 자신이 타락했었단 사실을 에일리히에게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조금이라도 덜 괴로워할 쪽을 선택했을 테다.
"에일리히 님께서 짐작하신 대로···, 얘는 성검의 선택을 받았던 1회차의 세르펜스가 아닙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에일리히는 그럴 줄 알았다며 젠체하지도, 어서 자세한 설명을 해 보라며 독촉하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잘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만 했다.
내가 압박감에 시달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편히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거겠지.
'세르펜스에 관한 일이니 조급해할 만도 한데···.'
침착한 에일리히의 태도를 마주하고 있노라니 나도 덩달아 침착해지는 기분이다.
에일리히는 전직 이단 심문관이며 교단을 나온 지금도 여전히 신앙심이 깊었다.
그래도 그는 조카인 세르펜스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진실을 알게 된 후, 충동적으로라도 자신의 조카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을 내뱉지는 않겠지.
누군가에게 그 얘기를 발설하여 현재펜스를 곤란하게 만들 일은 더더욱 없을 테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불안감을 다스렸다.
그리고 다시 입을 뗐다.
"이 녀석은 2회차의 세르펜스로 1회차 때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된 건 1회차의 세르펜스가 무너진 것과 비슷한 이유 때문인데···.'
에일리히가 이해해 줄 거라고 믿긴 하지만.
그리고 그 시기 타락펜스가 저지른 짓이 잘못되었다는 건 알지만, 나는 변호하는 말을 섞어가며 2회차의 일을 얘기했다.
이 녀석에 관해 마냥 나쁘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얘도 사정이 있었으니 죄를 참작해 줘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는 아니다.
잘못을 저지른 건 이 녀석뿐만이 아니라는 걸 제대로 설명하고 싶어서다.
에일리히에게도, 타락펜스에게도.
2회차의 세르펜스가 이처럼 변해버린 건 개인의 타락이 아니라, 그 시기의 사람들이 불러일으킨 재앙이라고 봐야 한다.
그자들이 세르펜스의 험담을 쏟아내며 그를 깎아내린 건 만만하다고 여겨서다.
강한 무력과 권력을 모두 갖춘 그를 누가 만만히 볼 수 있겠느냐마는.
그렇게 따지자면 휴마누스는 현재 황태자 지위가 여전히 공고함에도 불구하고, 온갖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휴마누스는 세르펜스든, 언제까지고 정의의 편에 서 있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자신들에게 위해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한 걸 테다.
그래서 자신들이 비난하는 대상이 강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쉽게 짓밟을 수 있는 약자로 취급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 녀석이 이렇게 어긋나 버리게 된 겁니다. 얘가 악숭 세력에 들어가고 난 이후의 일은 굳이 얘기하지 않을게요. 3회차인 현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대충 짐작이 가실 테니까."
나는 어째서 타락펜스가 악숭 세력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 과정만 설명하고 말을 마쳤다.
이 또한 타락펜스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 타락펜스가 저지른 짓을 일일이 열거하는 건 시간 낭비일 뿐.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아는 까닭이다.
"마음을 크게 다쳤구나···."
에일리히가 딱하다는 눈으로 타락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 타락펜스는 생긋 웃어 보이며 기뻐했다.
어딘가 망가진 것이 확실한 그 반응을 보고, 에일리히가 참담하다는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휴마누스가 그러했듯.
에일리히 또한 타락펜스가 저렇게 된 것에 큰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실상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말이다.
"세르펜스가 어째서 저렇게 변했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얘기해야 할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한참 동안이나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과 감정을 추스르던 에일리히가 고개를 내리고 나를 향해 물었다.
어째서 이런 위험한 녀석과 단둘이 돌아다니고 있는지 설명해 달라는 뜻일 테다.
나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저기···. 자는 동안 납치당했어요."
"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납치라고 하신 것 같은데···. 어쩌다가, 아니,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남들처럼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지고 싶어서, 자신에게 애정을 베풀어줄 사람을 원했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납치라니···."
에일리히의 목소리와 눈동자가 떨렸다.
그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동요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경악하시는 것도 이해가 가긴 하는데, 이래 봬도 얘가 많이 봐 준 겁니다. 이 녀석의 능력이라면 일행들이 전부 덤벼도 가볍게 이길 수 있는데, 모두가 자는 새에 몰래 저를 데리고 나온 거니까요. 만약 이 녀석이 대놓고 저를 납치하려고 일행들과 싸웠다면 다들 크게 다쳤거나···. 심한 경우 누구 하나 죽었···을 수도 있거든요."
심지어 타락펜스는 2회차 때 휴마누스를 제외한 성검 일행을 전부 죽였다고 했다.
또다시 그들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 따위를 느낄 리가 없다.
이 녀석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사람인지 깨달을 때마다.
타인의 감정을 무참히 짓밟으며 자신의 감정을 밀어붙이는 사람이란 게 와 닿을 때마다.
녀석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맞닥뜨릴 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안도하고 만다.
일행들에게 위해를 끼치지 않고 나를 몰래 납치했다는 것에.
대륙의 적이 되어 돌아서지 않고 내게 진심 어린 애정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에.
적어도 내 의견을 들어주는 척 허락을 받으려는 시늉이라도 한다는 것에.
타락펜스에게 나 같은 건 손쉽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나 다름없으니까.
거부를 하든 말든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신성력을 주입하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 수 있으니까.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일리히가 비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시는 거라면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배려라도 받은 것처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에일리히 님은 얘가 얼마나 강한지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겁니다."
"언제든지 쉽게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냥 내버려 둔 건 배려나 양보가 아닙니다. 지금이야 선우 님의 말을 따르는 듯 보일지 몰라도, 그러다 세르펜스가 싫증이라도 내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모든 놀이에는 끝이 있는 법이고, 아이들은 생각보다 금방 질려 하니까.
그래도 애정을 간절히 바라는 녀석의 강한 욕망을 알기에 그리하지 않으리라 믿으며.
타락펜스 또한 세르펜스니까,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고 또 지적하다 보면 고쳐주지 않을까 기대할 뿐이다.
"저는 선우 님께서 훨씬 강하고 단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제 생각이 틀렸나 봅니다. 아니면 저 아이와 함께 다니는 동안 약해지신 겁니까?"
"······."
에일리히의 물음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강한 사람인 줄 알았고,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내가 의연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세르펜스의 보호자'라는 역할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게 의지하며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이 앞에서 무너질 수는 없으니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올바른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세르펜스의 모습에 보람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혹시 이렇게 저를 찾아온 건, 저도 납치하기 위함입니까?"
"저 말고는 납치할 생각이 없다니까 안심하세요."
"그렇다는 건 선우 님이 저 아이와 단둘이 고립되는 기간이 길어진다는 뜻인데, 제가 어떻게 안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에일리히 님도 납치되고 싶으세요?"
"선우 님의 상태를 보면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반 농담식으로 던진 말이건만, 에일리히가 무거운 표정으로 확고한 의사를 표했다.
에일리히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에 당혹스러웠다.
타락펜스는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개를 돌려 녀석의 반응을 확인했다.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얼굴이 보였다.
"어째서 제게 애정을 쏟지 않고, 되려 선우마저 빼앗아 가려 하십니까?"
"빼앗으려는 게 아니란다. 그리고 선우 님을 보호하는 게 곧 세르펜스, 널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걸 모르겠니?"
"제가 선우를 대할 때 조심성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나 해칠 의도는 없었습니다."
"의도와 결과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란다."
부드러운 말씨로 타락펜스를 타이르는 에일리히의 얼굴 가득 걱정이 담겨있었다.
그래서인지 타락펜스는 나를 데리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대신, 맞은 편에 앉은 에일리히를 뚫어지게 노려보기만 했다.
타락펜스의 옆에 앉은 내가 보기에도 날카롭다 못해 섬뜩함이 느껴지건만.
정면에서 그 눈빛을 마주한 에일리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그 시선을 의연하게 받아냈다.
'에일리히 님에게 저런 면도 있었나···?'
프라시더스란 성을 되찾은 이후에는 조카 앞에서 눈치를 살피며, 소심하게 굴던 모습만 봐 와서 내심 세르펜스처럼 챙겨줘야 할 것 같았는데.
확실히 어른은 어른인가 보다 싶다.
"사람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연약해. 특히 선우 님처럼 특별한 힘을 갖추지 못한 일반인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금방 아프고 쉬이 병이 든단다."
"그럴 땐 신성력을 사용하면 됩니다."
"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도 마찬가지란다."
"그때도 신성력을 사용하면···."
"그래서 해결이 된다면, 너는 어째서 그렇게 마음에 깊은 병이 든 거니?"
"······."
자신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긴 한지, 타락펜스가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에일리히는 그런 녀석을 딱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