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73화 (873/925)

<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14) >

"네가 대륙을 짓밟은 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복수라든가 반항이라든가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붙일 수 있다지만. 차라리 내게 원망의 말을 쏟아내며 함부로 대한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선우 님에겐 그러면 안 돼."

"저는 제 나름대로 선우를 존중하려 애쓰며, 그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데 왜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타락펜스가 에일리히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불만 가득한 녀석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내게 그러했듯 에일리히에게도 과격한 짓을 저지를까 우려스럽다.

나야 저항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으나 에일리히는 다르다.

자칫 잘못하면 전투로 번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결과는···, 뻔하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미리 녀석의 팔을 붙잡았다.

내 힘으로는 타락펜스를 절대 붙들어 놓을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 녀석이 먼저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을 터.

아니나 다를까 타락펜스는 내 손을 힐끔 쳐다보고는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얘야, 후회할 행동은 하지 말렴. 선우 님은 정말 네게 특별하고 소중한 분이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네 앞에서 무고한 존재이자, 현 시간대의 네가 무너지지 않고 도리어 나아갈 수 있게 도와준 분이란다. 그리고 지금도 너를 위해 변호하고 계시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우의 모든 애정과 관심을 오직 제게만 베풀어지길 바랄 따름입니다."

에일리히 앞에서도 타락펜스는 제 독점욕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자신의 생각에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고 묻는 듯한 녀석의 표정은 순진 그 자체였으나, 한 꺼풀 아래에 자리한 잔혹함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에일리히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하아···.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가지만 필요한 게 아니란다. 비옥한 토양과 물, 그리고 햇빛이 필요하지. 그리고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너도 선우 님도, 더 많은 이들을 곁에 두어야 해."

"저는 선우만 있어도 충분하고, 선우도 곧 그렇게 될 겁니다."

타락펜스가 선언하듯 말했다.

자신이 내게 집착하는 것처럼, 나 또한 자신에게 매달리게 될 거라고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이제껏 타락펜스가 내뱉은 많고 많은 말 중에서 가장 소름이 끼쳤다.

내가 아무리 버텨도 결국은 녀석의 말대로 될 것 같아서.

타락펜스는 사람의 마음을 주무르는 데 도가 텄다.

그 단적인 예로 2회차 때 베일을 죽였던 '세라투 후작'을 들 수 있다. 그자는 타락펜스를 그냥 따르는 정도가 아니라 추종했다.

만약 이 녀석이 작정하고 내 마음을 꺾으려 들면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이미 진행 단계를 밟아 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왕이면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싶지 않니?"

"어차피 제 모든 것을 알고도 애정해 줄 사람은 선우 밖에 없습니다."

"그를 유일하게 생각한다면 어째서 그를 망가트리려 하는 거니?"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세르펜스···. 너는 네 욕심에 눈이 멀어 선우 님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구나."

에일리히가 어지럽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타락펜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을 맞추고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린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이렇게 안색이 나빠졌지?"

그게 할 소리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게 의미가 있기나 한 걸까 의문이 들었다.

이 녀석은 정말 몰라서 물어본 거니까.

에일리히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내뱉은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염두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에일리히 님께 2회차의 일을 설명하면서도, 내가 이 녀석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신경 썼는데···.'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눈가가 시큰거리는 게 느껴졌다.

지금은 울고 싶지 않아서 눈에 힘을 주고 타락펜스를 노려봤다.

그러자 녀석이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싶다. 더는 타락펜스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이 녀석은 끝까지 아무것도 모를 거다.

말을 한다고 해서 이 녀석의 태도가 나아질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뱀에게 붙잡힌 먹잇감이 발버둥치길 포기하고 의식을 잃는 순간 어떻게 되겠는가?

한 입에 집어 삼켜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테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부질없는 발버둥일지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의지를 다잡으며 내가 느낀 감정을 솔직히 얘기했다.

"아도르, 네가 나를 대등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게 너무 여실히 와 닿아서···. 그리고 그 취급이 영영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좀···. 아니, 많이 암담해졌어."

"그렇지 않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많이 나아지지 않았는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바뀐 것뿐이지, 네 생각과 마음이 바뀐 건 아니잖아. 아도르, 너는 나를 존중해 주고자 태도를 바꾼 게 아니야. 그냥 내게서 애정을 얻어내기 위해 더 효율적인 방식을 택한 거지."

"그렇게···, 느끼고 있었나?"

타락펜스가 어딘지 모르게 멍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런 게 아니었는데.'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질 뻔했으나 그래서야 애써 말을 꺼낸 의미가 사라진다.

"그런 게 아니면 뭔데?"

"난 정말로 바뀌려고 노력하고 있다. 선우가 아끼고 그리워하는 현재의 나처럼 되기 위해서. 그리하여 나의 선하고 어진 벗이 나를 유일한 '아도르'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대한 나 자신을 억누르며 참고 또 참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고 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타락펜스의 두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한 빛을 띠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온몸이 굳었다.

귓가로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나와 시선을 맞춘 채 녀석이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눈꺼풀 너머로 눈동자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날 때마다 광기는 점차 옅어졌다.

평소의 눈빛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야 타락펜스가 내게서 눈을 뗐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는지 반사적으로 '허억!' 하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게 됐다.

"···님, 선우 님! 괜찮습니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점차 뚜렷해졌다.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자, 에일리히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위치상으로 보아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려던 것 같다.

하지만 타락펜스의 기운에 눌려서 도중에 움직이지 못하게 된 걸 테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에일리히 님은 괜찮아요?"

"···네."

에일리히가 면목없다는 듯 이를 악물며 고개를 떨궜다.

반면에 이러한 상황을 만든 타락펜스는 당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알겠는가? 내가 얼마나 '선우가 바라는 내 모습'에 맞추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아도르, 내가 바라는 건 그런 연기가 아니야."

"알고 있다. 선우가 바라는 건 현 시간대의 나를 돌려받는 거잖는가."

"한 달째 되는 날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왜 약속을 어길 것처럼 얘기해?"

"음···."

아차 싶었는지 타락펜스가 침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나는 잠시 녀석에게서 신경을 끄고 에일리히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타락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거로 보아, 타락펜스가 현재펜스의 자리를 뺏으려 한다는 걸 진작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걱정하지 마세요, 에일리히 님. 본래의 세르펜스를 반드시 되찾고 말 테니까."

에일리히에게 하는 위로의 말이자,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다.

약속한 한 달이 벌써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때까지는···.

아니, 그 이후로도 녀석을 되찾을 때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방에 가서 쉬고 싶다."

속으로 각오를 다지고 있는데 타락펜스가 돌연 느닷없는 소리를 꺼냈다.

대체 지금 이 타이밍에 방에 가서 쉬겠다는 얘기가 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표정이 마치 상처라도 받은 것처럼 보여서,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불쌍해 보이기 위한 고도의 술책인 건지 진짜로 상처받은 건지 분간이 안 된다.

그래서 순수하게 동정할 수 없고 온전히 경계하지도 못하겠다.

이도 저도 아닌 마음가짐으로 타락펜스의 저의를 유추해보려 한들,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가 없다.

그냥 이 시간에 녀석의 말대로 방에 올라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게, 생산성 있지 않을까 싶다.

'일단 알타르 님이 시온의 아버지를 데리고 자리를 피해 주긴 했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나으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락펜스도 나를 따라 일어났고,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에일리히도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방에 가실 생각이십니까?"

"여긴 알타르 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요."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업무 중이셨던 거 아닙니까?"

"리벨론 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급한 일은 전부 처리했습니다. 나머지는 나중으로 미룰 수 있는 것들입니다."

에일리히는 그렇게 말했으나 어째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타락펜스를 단둘이 둘 수 없어서, 앞뒤 안 가리고 같이 가겠다고 나섰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만약 타락펜스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면 최대한 빨리 서류를 처리한 뒤 따라갈 테니, 먼저 올라가 있으라고 했겠지.

'따라오시게 둬도 괜찮으려나···?'

나는 옆에 선 타락펜스의 표정을 살폈다.

에일리히를 떨어뜨리고 나와 둘만 있고 싶어서 방에 가겠다고 한 거라면, 고개를 흔들든 따라오지 말라고 말하든 했을 텐데 별 반응이 없다.

단순히 약속에 관해 얼버무리고 싶어서 장소를 옮기자고 한 거였을까?

고민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하던 대화나 이어나가기로 했다.

"저희는 비밀통로를 통해서 갈 테니까, 에일리히 님은 알타르 님께 얘기하고 오세요. 아! 진짜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전부 얘기하라는 게 아니라···."

"오랜만에 가족끼리 만나서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 오늘 하루는 쉬겠다고 얘기하면 됩니까?"

"네. 그리고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를 물으면 마침 이 근처를 지날 일이 생겼는데, 세르펜스가 에일리히 님을 보고 싶어해서 잠깐 들렀다고 대답해 주세요."

이런 말을 해두지 않으면, 알타르는 우리가 업무적인 얘기를 나누려고 찾아온 줄 알 테다.

그럼 에일리히에게 우리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캐물으려 하거나, 우리와 만나서 직접 얘기를 들으려 하겠지.

어차피 타락펜스가 에일리히를 보고 싶다고 해서 공작저에 오게 됐다는 건 사실이다.

거리낄 것은 없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알타르 님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괜찮아요. 이제까지 쭉 이 녀석과 둘이 다녔는걸요, 뭘."

그리고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단둘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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