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74화 (874/925)

<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15) >

괜찮다는 내 말에도 에일리히는 좀처럼 안심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타락펜스의 입술이 불만스럽게 튀어나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습이 자못 시무룩해 보였다.

자신은 나름대로 나를 조심히 대하고 있는데, 자꾸만 위험 분자 취급을 당하니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저런 모습은 그거대로 신경이 쓰인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저렇게 풀이 죽은 모습에 더 약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타락펜스가 알면 분명 이용해 먹으려 하겠지.

나는 녀석에게 최대한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에일리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진짜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셔도 됩니다. 조금 전에 보셨잖아요?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저한테 신성력을 쓴 거. 그리고 제가 얘한테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도 있어서 그래요."

"거짓말하시는 게 아니라 정말입니까?"

"아무렴 제가 위험한 일을 자초하겠습니까? 책임지고 키워야 할 애도 있는데?"

"···그 말씀을 믿고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창문을 열고 소리치십시오."

내가 창문을 열고 소리치는 걸 타락펜스가 막지 못할 리가 없다.

그걸 에일리히가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한 건 불안감을 덜어보기 위함이리라.

그 마음을 알기에 나는 꼭 그러겠노라 대답했고, 그제야 에일리히가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테이블을 정리한 뒤 타락펜스를 따라 다시 비밀 통로에 발을 들였다.

'설마하니 이대로 저택을 벗어날 생각은 아니겠지?'

내심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다행히도 타락펜스는 나를 세르펜스의 방까지 제대로 안내했다.

"저 화분은···."

방 안에 발을 딛자마자, 타락펜스는 창가에 놓인 유니어에 관심을 보였다.

에일리히가 관리하고 있을 유니어가 세르펜스의 방에 놓여있는 건, 내가 그러길 원해서다.

현재펜스에게 유니어를 선물로 준 이유가 무엇이던가.

녀석이 자신의 방을 돌아가고 싶고 머무르고 싶은 휴식 공간으로 인식하길 바라서다.

그래서 유니어를 이 방에서 키워 달라고 에일리히에게 얘기해 뒀었다.

'정작 우리가 예고하고 방문하면, 팔불출 에일리히가 유니어를 들고 마중 나와서 의미가 퇴색되긴 했지만···.'

현재펜스와 잡담을 하다가 들은 바에 의하면, 에일리히는 편지에 유니어의 근황을 종종 언급하는 모양이었다.

조카와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눌 만한 화제가 그리 많지 않으니 자주 우려먹은 걸 테다.

어쨌든 중요한 건 타락펜스가 유니어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뭐, 비단 편지가 아니더라도 내가 정신없는 틈을 타 별의별 얘기를 다 캐물었으니.

존재뿐만이 아니라 유니어에 담긴 사연을 자세히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테다.

"이 식물이 바로 선우가 내게 생일 선물로 준 '유니어'로군."

곧바로 창가를 향해 직행한 녀석이 유니어의 꽃과 잎사귀를 만지작거렸다.

조심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손길에 내가 주의를 주려는 찰나, 녀석은 거침없이 가지 사이사이를 헤집으며 그 안쪽까지 관찰하려 들었다.

그 결과 가지가 하나 부러지고 꽃도 두어 송이 떨어졌다.

"이런."

"'이런'이 아니잖아?!"

"고의는 아니었다. 새순도 자세히 살펴보고 싶고, 가지와 잎사귀, 꽃의 개수도 궁금해서···."

실수로 물건을 망가트리고 허겁지겁 그것을 숨기려 하는 아이처럼, 타락펜스는 떨어진 꽃과 부러진 가지를 그러모으며 자기변호를 했다.

녀석이 일부러 나와 유니어를 조심성 없이 대한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아주 잘 알 것 같다.

'단 한 번도 소중한 것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그것을 대하는 방법을 몰라서 자꾸만 실수하게 되는 거겠지.'

그걸 알기에 식물을 그렇게 막 다루면 어쩌냐고 녀석을 혼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녀석에게 핀잔을 주는 대신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내 반응을 보며 타락펜스가 유니어를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일단 식물도 생명이니 신성력을 쓰면···."

"멈춰!"

나는 녀석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타락펜스는 정말 순순히 멈춰 줬다. 왜 멈추라고 한 건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긴 했지만.

"너 유니어한테도 신성력을 마구 퍼부으려고 했지? 그게 식물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건 과해서 좋을 건 없어. 수분과 영양조차 과하면 식물을 죽이는 독이 되는 법이니까. 신성력도 아마 비슷하겠지."

"···여러모로 선우와 닮았군."

대체 뭐가 '여러모로' 닮았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부러진 가지를 이리 달라는 뜻으로 타락펜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녀석이 가지와 꽃을 창가에 가지런히 내려놓고 내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이미 한 쪽 손을 잡고 있었던 탓에 본의 아니게 두 손을 맞잡고 마주 본 상태가 되었다.

순간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이를 훈육하기에 딱 좋은 자세다.

그냥 이대로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다.

"생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조심히 다뤘어야지. 그리고 신성력으로 뭐든 해결하려는 버릇 고쳐. 애초에 너는 신성력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어째서 신성력 만능주의자처럼 구는 거야?"

"선우의 말대로 나는 신성력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어했다. 타인보다 강한 신성력이 내가 불행해진 원인처럼 느껴졌으니까."

유달리 강한 신성력 때문에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 추켜세워지고, 교육이란 이름의 학대를 당하고, 끝내 성검의 선택을 받지 못하여 온갖 비난에 시달렸으니.

타락펜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구나 싶다.

무슨 말을 해야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고민에 잠기려는 찰나, 녀석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선우는 알고 있는가?"

"뭘?"

"내가 신성력을 버리는 데 실패했으나 동시에 성공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마왕의 힘을 가로채서 신성력을 없애버린 걸 두고 성공했다고 말한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던진 질문에 부정이 돌아왔다.

그렇다는 건 녀석이 막 악숭 세력에 들어가서, 신성력을 버리려 했을 때의 일을 말하는 걸 테다.

시기는 감이 왔으나 그 이외에는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다.

"자세히 설명 좀 해 줄래?"

"내가 살았던 시기에는 리벨론 가문에 넷째는 태어나지 않았다."

"비비는 시온의 환생 같은 거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그 육체에 담긴 신성력은 어디서 기원한 거라고 생각하나?"

"리벨론 가는 물론이고 시온의 어머니 쪽 가문도 신성력과는 연이 없으니, 룩스메아가 준 거 아냐?"

"나 또한 마찬가지다."

"···응?"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녀석의 말은 룩스메아가 일부러 세르펜스에게 강한 신성력을 안겨줬다는 뜻이다.

성검이 대륙에 내려온 시점에 룩스메아가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세르펜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녀석을 성검의 주인으로 점찍어 두고, 신성력을 냅다 때려 부었다는 거야···?'

머릿속이 멍해져서 아무 반응도 못 하고 있자, 타락펜스가 슬그머니 한 쪽 손을 놓았다.

그리고 녀석의 손에서 은색이 아닌 백색의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언뜻 보면 비슷할지 몰라도 둘은 명백히 다른 색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백색이 은색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설마 악숭 살롱에서 보았던 의문의 하얀 신성력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답변이라도 하듯이.

타락펜스가 백색의 신성력에 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것이 내가 본디 지니고 태어난 신성력이다. 신이 내게 부여한 신성력에 가려져, 나조차 있는 줄 몰랐을 정도로 아주 약하고 보잘것없지. 내가 이 미약한 힘을 발견한 건 이것을 버렸을 때다. 있을 땐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아무런 존재감이 없었던 주제에, 사라지고 난 이후에는 그 빈자리가 왜 그리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지···. 내가 버리려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만약 살롱에서 본 것이 없었다면, 타락펜스가 성검을 통해 룩스메아의 힘을 끌어와 장난질이라도 치는 줄 알았을 테다.

하지만 악마를 상대로 시간을 끌다가 신성력이 거의 바닥난 순간.

현재펜스의 간절한 마음이 어딘가에 깊숙이 묻혀 있던 힘을 끌어낸 거라면···.

'···말이 되긴 하네.'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백색의 신성력은 서서히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나름대로 악마를 막아내는 데 일조한 힘이다. 그러니만큼 아무것도 안 하고 빛만 냈는데 벌써 힘을 다했을 리는 없다.

타락펜스가 일부러 거둔 거겠지.

그걸 아는데도 서서히 희미해지다 사라진 그 힘이 정말 작고 연약하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프라시더스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신성력은 은색 아냐? 에일리히 님도 너랑 같은 은색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어머니의 신성력이 백색이었다."

"그렇···구나···."

너무 충격적이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원래 다른 얘기 중이었던 것 같은데.

본래의 화제를 기억해 내려 했으나, 하얀 신성력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려서 집중이 안 된다.

"아도르···, 그때 알았던 거야? 널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 만들었던 은색 신성력이 룩스메아가 내린 힘이라는 걸···?"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내가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다. 신께서 친히 신성력을 내려주었음에도 타고난 성품에 문제가 있어서, 성검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고···. 결국 폐기된 거라고."

"그런 이유는 아닐 거야, 절대로. 동의도 없이 날 이 세계로 납치하듯 데려온 룩스메아가 난 정말 싫지만, 하는 짓도 무능하기 짝이 없어서 짜증도 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건 아도르, 널 아끼고 사랑한다는 거야. 거의 편애하다시피···."

편애···는 혹시 사과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실수로 인해 불행해진 아이를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올라 혀가 굳었다.

과연 명불허전 트롤메아. 트롤링을 한 가지만 한 게 아니었나 보다.

아득한 정신세계를 헤매며 무능한 트롤메아를 욕하고 있는 그때, 손바닥에 무언가 간질간질한 것이 닿았다.

고개를 내려 확인해보니 유니어의 부러진 가지가 손바닥에 올려져 있었다.

간지러웠던 건 보송보송한 솜털이 난 가지와 그에 달린 잎사귀 때문이었다.

"아까 내가 이걸 달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는 걸 알면서, 대뜸 손을 잡았다는 거지?"

"내밀어진 손을 보니 잡고 싶어서 그랬다."

"그런 이유면 어쩔 수 없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자 타락펜스가 설렘과 희열이 뒤섞인 미소를 지었다.

정신이 얼떨떨한 와중에 녀석이 현재펜스처럼 말하니, 나도 모르게 현재펜스처럼 녀석을 대해버린 거다.

아차 싶었으나 이제 와서 무르는 게 더 이상하겠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잡혀 있던 한쪽 손마저 빼내어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였다.

꺼낸 건 물이 든 작은 유리병이다.

뚜껑을 열어 부러진 유니어의 가지를 병 안에 꽂았다.

"물꽂이···인가?"

"응, 유니어의 품종인 블루 데이즈는 물꽂이가 잘 되는 식물이라고 들었거든. 이렇게 해 두면 금방 뿌리가 생길 거야."

"그건 내가 가져도 되는가?"

타락펜스가 물꽂이한 유니어 가지를 보며 소유욕을 드러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라고 하고 싶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두 가지나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이 가지는 녀석의 폭력성으로 인해 생겨난 거다.

그리고 두 번째는 타락펜스가 곧 떠나야 할 사람이라는 점이다.

"···가지고 다니는 건 안 돼."

고민 끝에 내가 내놓은 대답은 이러했다.

타락펜스는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으나, 창가에 놓인 유니어를 보고는 혼자 알아서 납득했다.

"알겠다. 대신 이···, 으음···. '나의 벗'은 선우의 방에 두겠다. 지금 말고, 내일 이곳을 떠날 때."

잠깐 생각에 잠겼던 녀석은 유니어 가지에 '나의 벗'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유리병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듯 잡았다.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이는 녀석의 모습이 묘하게 순수해 보였다.

그 탓에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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