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75화 (875/925)

<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16) >

"그나저나 내게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타락펜스가 '나의 벗'에서 눈을 떼며 질문했다.

그 물음을 듣고 나서야 깜박 잊었던 게 떠올랐다.

에일리히가 오기 전에 그 얘기를 빨리해야 하는데, 이 녀석이 유니어를 향해 직행한 탓에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도르, 너···! 그냥 좋게좋게 대화만 나누다 가기로 했잖아. 그런데 자신이 1회차의 성검펜스가 아니라는 걸 은연중에 티 내는 거로도 모자라, 에일리히 님 앞에서 내게 그런 짓까지 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런 짓이라면 선우에게 신성력을 사용한 것을 말하나, 아니면 내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알려준 것을 말하나?"

"둘 다!"

내 대답에 타락펜스가 입을 꾹 다문 채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마치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선우는 나와 현 시간대의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잖은가. 그런데 내 백부 되는 사람이 '성검의 주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나'를 아껴주는 게, 대체 '나'에게 무슨 가치가 있지?"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타락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이 녀석의 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 시간대의 나를 연기하며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온전히 '나'로서 애정을 받고 싶다. 나를 부정 당하고 싶지 않다."

그럼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녀석도 말하지 못한 걸 테다.

에일리히에게 2회차 일을 밝히자고 하면 내가 결사반대할까 봐.

'물론 타락펜스로서는 내가 반대를 하든 말든 강제로 끌고 다니면 그만이긴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이 녀석 나름대로 나를 신경 써 준 거라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나는 이 녀석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겉으로 크게 표가 나지 않았을 뿐,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나 보다.

"선우는 내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그래서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유일한 핏줄이라던 백부님께도, 내 존재를 숨기려 한 건가?"

"그런 이유가 아니야. 에일리히 님은 이단 심문관이었으니까, 네 얘기를 들으면 혼란스러우실 것 같기도 하고···. 그분은 세르펜스의 어린 시절을 거의 다 알고 계시거든. 아! 원래 알았던 건 아니고, 나랑 현재펜스가 얘기해 줘서 아시는 거야."

"그 얘기라면 이미 선우에게 들었다. 구구절절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분이 모든 것을 알고도 나를 방치했다는 오해는 하지 않는다."

설명을 건너뛸 수 있는 건 편하지만, 그 이유를 떠올리면 참 뭣 같다.

나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가슴 속 깊숙이 파묻으며 마저 얘기를 이어나갔다.

"아무튼 그런 과거를 겪고도 현재펜스는 순수하게 빛나며 이 세상을 지키고 싶어 해. 보통 강인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그런데 그럴 수 있는 녀석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대륙을 멸망으로 몰아갔었다는 얘기를 들어 봐. 대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웠길래 그랬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될 거 아냐? 게다가 에일리히 님은 아직도 어린 세르펜스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에서 사로잡혀 계셔."

"즉, 백부님을 걱정하여 내 삶을 밝히지 않으려 했다는 뜻인가? 선우는 참···, 많은 이들을 신경 쓰는군."

그렇게 말하는 타락펜스의 표정에서 질투와 집착이 읽혔다.

나는 그 점을 지적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감정이라는 게 고치라는 말을 듣고 곧장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은 녀석에게 해야 할 말도 있으니까.

"그래, 에일리히 님을 걱정했던 거야. 하지만 네 기분을 고려하지 못한 건 내 실수니까 사과할게. 미안해, 아도르."

"사과만 하지 말고 위로도 해 다오."

그렇게 말하며 타락펜스가 머리를 살짝 낮췄다. 하여간 기회를 안 놓치는 녀석이다.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녀석이 눈을 감고는 만끽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모르게 '픽-.' 하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정말 미운 짓을 많이 하는데도 내가 타락펜스를 미워할 수가 없는 건, 녀석에게도 이런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존재하는 까닭일 테지.

비록 그 순수함이 꼭 선한 쪽으로만 나타나는 게 아니긴 해도.

"아도르, 그런데 있지? 아무리 너 자체를 사랑해 주길 바라더라도, 네 마음대로 굴면서 '이런 나라도 사랑해 줘!'라고 주장하는 건 잘못됐어."

"그럼 내가 예전처럼 남들이 바라는 모습이라도 연기해야 하나?"

"그건 나도 싫어. 내 말은 일부러 비뚤어진 모습을 보여주며, 사람을 시험대 위에 세우지 말라는 뜻이야.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와 에일리히 님의 진심이 보이잖아. 왜 그걸 믿지 못하고 사람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한계까지 몰아붙이려 하는 거야?"

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리며 최대한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질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애쓴 덕분인지, 내 귀로 듣기에도 퍽 온화한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타락펜스가 듣기에도 그러한지 기분 상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비록 돌아온 대답은 무척이나 형편없었지만.

"사람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성격 또한 내 본질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건 변명일 뿐이야. 너도 네 행동이 옳지 않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전대 공작이 네게 주입한 엉터리 사상으로 분석한 게 아니라 네 마음이 알잖아. 그럼 고쳐야지. 너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에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게 아니라, 달라지려고 노력할 수는 없는 거야?"

"또 노력인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타락펜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선택의 날이 오기 전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참고 또 참아 왔으니, 당연히 인내가 지겹겠지.

더군다나 녀석은 타락한 이후 충동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고, 그렇게 억눌린 분노를 맘껏 표출해 왔다.

그러니만큼 참는 게 힘들 만도 했다.

"이젠 나도 알아, 너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걸. 그래도 더 노력하자, 네게 소중한 것이 될 수 있었던 무언가를 또다시 네 손으로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응?"

"선우는 이미 내게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이다."

"그럼 더더욱 노력해야지. 그 대상이 나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네가 예전처럼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알겠다."

내 말이 끝난 후 몇 초가 더 지나고 나서야 타락펜스가 힘없이 대답했다.

자신의 바람을 깨달았으나 돌이킬 수 없었던. 그래서 최악의 결말로 끝낼 수밖에 없었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 시기의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거려나?

만약 그런 거라면 무슨 말을 건네든 위안이 될 수 없을 테다.

조용히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는 그때.

-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타락펜스가 문으로 향하려는 나를 저지하고, 직접 방문을 열어 에일리히를 맞이했다.

에일리히가 나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갈 줄 아나 보다.

"고맙구나."

방 안으로 들어온 에일리히가 타락펜스에게 감사를 표하는 한편, 멀쩡한 나를 보고 안도했다가 엉망이 된 유니어를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타락펜스의 손에 들린 '나의 벗'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백부님께서 유니어를 관리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이 '나의 벗'은 선우의 방에 놓고 기를 생각이니, 같이 관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의 벗'···. 그런 이름이니?"

"네."

"······그래. 알겠다, 정성스럽게 돌볼 터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대답이 나오기까지 묘하게 텀이 길다.

실은 다른 말이 하고 싶었던 거겠지.

식물을 기르겠다니 정말 현재펜스의 몸에 쭉 눌러앉을 생각이냐고 따진다거나.

아니면 내가 걱정되니 자신도 함께 다니면 안 되느냐고 부탁한다거나.

착잡하기 그지없는 에일리히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뭐라도 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타르 님한테 설명 잘하고 오셨어요?"

"아, 네. 그보다 리벨론 님께서 선우 님께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제게요?"

의아한 마음에 검지로 나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가 급히 손을 내렸다.

나는 그를 '남'이라 여기지만 그쪽은 내가 아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기 때문이다.

머쓱한 마음에 괜스레 헛기침이 나왔다.

"흠, 흠! 뭐라고 하셨는데요?"

"리벨론 부인이 둘째 아들을 많이 그리워하니 보러 와 줬으면 한다더군요."

"···혹시 제가 온 거, 벌써 시온의 가족들에게 알린 건 아니겠죠?"

"선우 님과 세르펜스는 비밀 통로를 통해 몰래 오셨잖습니까? 그래서 공작저 방문을 알리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아서, 알타르 님이 리벨론 님 옆에 붙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도록 감독했다고 합니다."

감시를 감독으로 잘못 말한 거 아니냐고 딴지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결과 자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교황의 심부름꾼 내지는 에일리히의 부하 같은 느낌이었는데, 역시 알타르도 이단 심문관인지라 눈치가 제법이다.

타락펜스와 만나지 못하게 하길 잘했다.

"어차피 시온의 어머니는 제가 여기에 와 있다는 걸 모르는데, 그 말을 굳이 제게 전달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시온의 부모님을 대하기 어려워한다는 건 에일리히도 알고 있을 테다.

아들의 자리를 빼앗은 것 같아서 내가 그들에게 미안해한다는 것까진 모르더라도, 일단 내가 시온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얘기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괜히 신경 쓰이지 않도록 에일리히 선에서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을 전달하는 거로 보아, 에일리히는 내가 시온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길 바라나 보다.

"우선 리벨론 부인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공작저에는 전·현직 이단 심문관이 버티고 있는 데다가, 최근에는 신성 결계까지 설치해 놓았잖아요. 황궁 못지않게 안전한 장소가 바로 이 공작저인데 여전히 불안하시대요?"

"막내 아들은 안전해졌지만, '유독 소심한' 둘째 아들은 누구보다도 위험한 장소를 돌아다니고 있잖습니까."

"······."

아무래도 비비가 죽을 뻔한 이후, 시온에 대한 걱정이 덩달아 커진 모양이다.

정작 그 몸 안에 들어앉은 건 생판 남인데도 말이다.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게 좋으려나···?'

가까이 있는 아들을 멀리서 찾으며 계속 마음 졸이게 둘 수는 없다.

원망의 말을 좀 들을 수도 있지만, 비비가 나서 준다면 큰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도르, 이 녀석을 데리고 시온의 부모님과 비비를 만나러 갈 수는 없어요."

"잠시라도 세르펜스와 떨어져 계시는 게 선우 님께 좋을 것 같아서, 이 얘기를 전한 겁니다."

어쩐지 조금 전에 '우선'으로 운을 떼더라니.

에일리히는 내가 시온의 어머니를 만나러 별관으로 가야 할 이유를 하나 더 꺼냈다.

타락펜스가 불쾌해할 게 뻔한 내용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녀석의 표정을 살폈는데 이게 웬걸? 의외로 동요가 없었다.

"그럼 나는 비밀 통로에서 선우를 지켜보고 있겠다."

녀석이 감시 혹은 관찰하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시온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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