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76화 (876/925)

< 87. 공작님의 버킷 리스트 (17) >

'타락펜스가 숨어서 나를 지켜본다니 상상만 해도 찜찜하네. 그래도 내 옆에 앉아 있겠다고 하지 않는 게 어디랴 싶기도 하고···?'

잘 생각해 보니 타락펜스를 누군가의 앞에 내보이는 것보다, 내가 녀석에게 관찰당하는 게 나은 것 같다.

다시 시온의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관찰 당하는 게 찜찜하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근심하며 속앓이를 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비비는 악마 숭배자들을 전부 처리할 때까지는 비밀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었지만···.'

애초에 그건 내가 신의 사자라는 게 알려지면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까 봐 그랬던 거다.

그런데 이미 내 정체는 까발려졌고 비비 본인이 위험한 일을 겪었다.

그 결과 시온의 어머니는 극도로 불안에 떨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지금은 제 어머니의 걱정을 덜기 위해서라도 진실을 밝히고 싶을 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시온이 아니며 진짜 시온은 늘 가족들과 함께였다는 것만 얘기하고 오자.

그렇게 마음을 굳히려는 찰나.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선우가 차지한 몸의 원주인이자, 내 보좌관이었던 자도 이곳에 와 있다고 했던가? 한 번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군."

타락펜스가 비비를 언급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이 자리에는 에일리히도 함께 있으니까.

에일리히의 앞이라고 해서 타락펜스가 말을 조심할 리 없다.

비비에 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녀석은 필시, 자신의 보좌관이던 시온을 제 손으로 직접 죽였다는 얘기를 거리낌 없이 내뱉을 테다.

그건 안 될 일이다.

또한 녀석이 비비를 만나는 것도 절대 안 될 일이다.

"나는 반대야."

"어째서지? 그자는 이 세상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상관없잖은가?"

"상관이 없긴 왜 없어?!"

그거야말로 문제라는 걸 진짜 모르는 건지 타락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녀석이 비비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것 같지는 않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두 사람을 만나게 둘 수는 없다.

다른 범죄도 아니고 무려 자신을 죽였던 자와 마주하는 걸 피해자가 원할 리 없으니까.

사과든 뭐든 필요 없고 그냥 마주치지 않기만을 바라겠지.

현재펜스야 시온을 죽이지도 않았을뿐더러 시온의 몸에 들어간 나를 몹시 따랐으니, 비비가 금방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지만.

타락펜스는 진짜로 시온을 죽였으며 눈빛만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이 녀석이 어떤 말로 구슬리려 하든 비비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대체 비비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어. 반대를 무를 생각은 절대 없으니까."

"너무하는군."

"아무튼 네가 비비를 보고자 한다면 난 시온의 부모님을 보러 안 갈 거야."

내가 별관에 가지 않고 여기에 있겠다는데, 타락펜스가 혼자 비비를 만나러 갈 리 만무하다.

어차피 이 녀석이 비비와 대화를 나누려 하는 건 가벼운 흥미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비비를 만나겠다고 떼를 쓰는 대신 다른 것에 관심을 보였다.

"그건 조금 아쉽군. 내가 곁에 없을 때의 선우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도대체 그런 걸 왜 궁금해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목적이라면 내가 시온의 부모님과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이 녀석이 비밀통로를 박차고 나올 일은 없을 것 같다.

끝까지 나를 구경해야 하니까.

"네가 비비를 만나겠다고 떼쓰지 않고, 내가 시온의 부모님과 대화를 나눌 때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구경이든 관찰이든 감시든, 뭐든 해도 좋아."

"정말인가?"

"그래. 대신 이번에도 약속을 또 어기면 앞으로 절대 한 침대에서 같이 안 잘 거야. 당연히 잠들기 전 토닥토닥도 없어."

"······!"

타락펜스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상태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다.

고작 엄포를 놓은 것만으로도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그 정도로 나와 함께 잠들며 토닥토닥을 받는 게 좋았나 보다.

앞으로 이 녀석에게 약속을 받아낼 일이 생긴다면 또 이 방법을 써야겠다.

"정말 세르펜스를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잠시만이라도 내가 타락펜스와 떨어져 있길 바랐던 에일리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타락펜스가 나와 떨어지려 하지 않는 이상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타락펜스를 달고 시온의 부모님을 만나느냐 아니면 아예 만나지 않느냐.

하지만 내일 공작저를 떠나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진실을 밝히는 걸 미룰 수는 없다.

그러니 결국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제가 없을 때 이 녀석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저도 얘랑 떨어지는 건 좀 불안했는데 마침 잘 됐죠. 절 따라오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숨어 있겠다니."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에일리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에일리히 님께서도요?!"

"세르펜스와 대화를 나누겠다는 이유로 오늘 업무를 중단한 터라, 두 분이 별관에 가시면 저는 이곳에 혼자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홀로 남아 불안해하느니 세르펜스와 같이 비밀 통로에 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어쩔 수 없이 나는 두 명의 프라시더스와 함께 별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본관과 별관을 잇는 지하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됐다.

원래 귀족들 저택은 이렇게 비밀 통로가 많은 걸까? 아니면 프라시더스 가문이 유난스러운 걸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귀족들의 집 구조 따위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래서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이 통로는 집사가 본관과 별관을 오가며, 외부에서 온 손님들을 감시할 수 있게 만들어 둔 것이다.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았다면 현 집사도 이 통로에 관해 알고 있을 터. 그러니 대화가 끝나거든 그자에게 길을 열어 달라고 해라."

타락펜스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내 귀에다 속닥거리며 설명했다.

안에서도 비밀 통로를 열 수 있는데 굳이 제온에게 부탁하라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날 관찰하러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걸 제대로 숨길 생각인가 보다.

사실상 대화 도중 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기에 좀 안심했다.

그리고 녀석이 목소리를 낮춘 건 이 비밀 통로는 방음 처리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공작저로 들어올 때 써먹었던 비밀 통로는 바깥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여차했을 때 도주용으로 써먹기 위해 방음을 철저히 했으나 여긴 아니니까.

지금도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리벨론 가 남자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 아직 오늘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데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해?"

"조, 조금만 더 있어 봐라. 비비가 형이랑 더 놀고 싶어 하잖냐."

"내가? 아닌데?"

방금의 대화로 추측해 보건대, 시온의 아버지가 아무 설명도 없이 일하던 제온까지 데려다 앉혀 놨나 보다.

제온이 자리를 뜨기 전에 빨리 나가야겠다.

타락펜스의 팔을 툭툭 치자 녀석이 벽 어딘가를 누르더니 문이 생겨났다.

"어?! 갑자기 비밀 통로가 왜···."

"여기 저런 게 있었어?! 제오니는 알고 있었던 거야? 근데 왜 말 안 해써!"

"와 줬구나!"

"뭐, 뭐예요···? 오다니 누가···."

제온은 갑자기 비밀 통로가 열려서 당황한 듯했고 비비는 마냥 신기해했으며, 시온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리고 시온의 어머니는 목소리에서부터 겁먹은 게 느껴졌다.

더 불안해하시기 전에 얼른 나가서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어, 음···. 저 왔어요···?"

통로에서 나오고 나서야 인사말을 미리 생각해 두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되는대로 말하며 어색하게나마 웃으려 애썼다.

꽤 효과가 있었던 건지, 시온의 어머니가 비비를 단단히 끌어안았던 팔에 힘을 풀었다.

"시온···!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우리 아들!"

시온의 어머니는 비비를 자신의 남편에게 넘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감격에 겨운 미소를 만면에 띠며 두 팔을 활짝 벌린 자세로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만난 둘째 아들을 안아보고 싶었나 보다.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려는데 등에 벽이 닿았다.

비밀 통로 입구가 벌써 닫혔나 보다.

하지만 나는 윈스톤에게 열심히 굴려지며 검술을 배웠다.

검을 들어본 적조차 없는 사람의 손길을 피하지 못하고 붙잡힌다면, 윈스톤을 볼 면목이 없다.

'옆구리가 비었네!'

나는 한눈에 빈틈을 파악하고 자세를 낮추며 재빨리 몸을 빼냈다.

졸지에 아들을 끌어안는 대신 벽을 짚게 된, 시온의 어머니가 어리둥절한 낯으로 뒤로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서러움과 섭섭함이 표정과 시선에 그대로 드러났다.

"아, 하하하···. 여기엔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데···. 그걸 설명하려고 온 거니까 일단 앉으세요."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포옹을 피하다니, 무슨 이유인지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시온의 어머니가 나를 흘겨보며 그리 말하고는 제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비비도 다시 품에 안아 들었다.

저번에 비비를 봤을 땐 정말 작았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많이 자랐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은 0살부터 시작해서 해가 지날 때마다 한 살씩 더해나가니, 올해 비비의 나이는 두 살이려나?

"와 줄 거라 믿었다. 기왕이면 네 엄마의 포옹을 받아줬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시온의 아버지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째 포옹을 거부당한 시온의 어머니보다 더 서운해하는 눈치다.

하긴 아까 응접실에서 만났을 땐 내가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그때의 앙금이 아직 남아있었나 보다.

"형이 왔다는 보고는 못 받았는데, 혹시 몰래 온 거야?"

"응, 비밀 통로를 통해서 들어왔어. 그러니까 내가 여기 왔다는 건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

같이 공작저에서 생활하며 자주 부대낀 덕분인지 제온을 상대하는 건 좀 편했다.

나는 제온의 옆에 앉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척. 리벨론 가 사람들 모두에게 내가 이곳에 왔다는 건 비밀로 해 달라는 뜻을 전달했다.

"그보다 사정이라는 건 대체 뭐야?"

제온이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내가 리벨론 가문의 사람들을 대하기 껄끄러워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다른 가족들이 나서기 전에 먼저 말을 붙여, 내가 편하게 얘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말문을 여는 게 가장 힘든 일인지라 제온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일단 비비에게 사과부터 할게. 아니, 사과하겠습니다. 제가 신의 사자라는 게 알려지는 바람에 무서운 일을 겪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짜고짜 '나는 다른 세상에서 온 이방인이며, 비비야말로 진짜 시온이다!'라고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온의 부모님이 너무 큰 충격을 한 번에 받지 않으시도록, 나는 비비에게 존댓말로 사과하며 은연중에 내가 진짜 시온이 아니라는 티를 흘렸다.

현재펜스나 유지스라면 내가 왜 이러는지 곧바로 이해하고 맞춰 줬을 텐데, 애석하게도 비비는 그 정도로 눈치가 빠르지 못했다.

비비는 내가 말실수라도 한 줄 알고 당황하다가, 자신도 덩달아 말실수를 했다.

"으에, 왜 막냇동생에게 존대를 쓰시는 겁니까?!"

"세상에, 비비가 형에게 존대를 쓰잖아?! 얼마나 둘째 형이 낯설었으면···."

시온의 어머니가 비비를 가여워하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어째 비비가 말하는 걸 처음 본 제온의 반응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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