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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883화 (883/925)

< 88. 공작님과 약속의 날 (1) >

나라고 시간을 끌고 싶어서 끄는 게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얼른 타락펜스의 의중을 파악하고 싶다.

하지만 불안해서 말이 안 나오는 걸 어쩌겠는가.

앞서 자신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노라 말해 놓고, 약속에 관해 질문해 보라며 재촉하다니?

뭘 어떻게 생각해 봐도 클레임 각이다.

타락펜스의 표정이나 목소리 톤은 차분하기 그지없지만, 모든 주도권을 움켜쥐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불안할 것도 없겠지.

나는 먹다 만 러스크를 마저 와삭와삭 씹어 먹으며 분한 마음도 함께 삼켰다.

타락펜스는 그런 나를 느긋하게 관찰하며, 통 안에서 러스크를 하나 더 꺼내어 야금야금 먹었다.

역시 계약을 연장할 생각인 것 같다.

예상 못 한 일은 아니다.

처음부터 타락펜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걸, 알고도 제안했던 일 아니던가.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실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걸까?

내심 이 녀석도 세르펜스니까, 내 의견을 존중해 줄 거라고 믿었나 보다.

"약속···, 지켜 줄 거야?"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반쯤 단념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어서 물어보라며 재촉할 땐 언제고 타락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체 뭐하는 건가 싶어 머리를 들어 올려 녀석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타락펜스는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내 물음에 긍정한 것이다.

혹시 내가 '약속 안 지킬 거지?'라고 물어봤던 건 아닐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나는 약속을 지켜 줄 거냐고 물은 게 확실했다.

"어···, 정말로···?"

"반응이 왜 그렇게 떨떠름하지? 굉장히 기뻐할 줄 알았거늘. 혹시 나와 더 함께하고 싶었나?"

"아니!!"

행여나 타락펜스가 결정을 번복할세라,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다급해져 크게 소리치며 부정하고 말았다.

아차 했을 땐 이미 늦었다.

타락펜스가 침울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내가 선우에게 준 건 괴로움뿐이었으니."

"아도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다만, 그 몸은 현재의 세르펜스의 것이니 그 녀석에게 돌려줘야 하고···. 이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돌아다니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구태여 변명까지 늘어놓으며 나를 달래 줄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나는 성검을 반납하고 나면 사라져 버릴 허상에 불과한 존재잖은가?"

이 녀석은 나와 지내는 동안 줄곧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공작저에서 잠깐 머물렀을 때,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것도 그래서였을까?

"방금 상처를 준 내가 할 소리는 아니긴 하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은 누가 뭐라 해도 진짜니까."

"선우는 그냥 '선우의 아도르'를 돌려받으면 그만이다. 내 감정 같은 건 모르는 척하는 게 더 편할 텐데, 어째서 신경 쓰는 거지?"

그러게나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 녀석이 '역시 선우와 더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다.'라며 마음을 바꿀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나는 타락펜스를 외면하지 못하고 똑바로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우는 아이가 있으면 위로해 주는 게 당연하잖아."

내 말에 타락펜스가 움찔 놀라더니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눈가를 매만졌다.

눈물 같은 건 흐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녀석이 날 지그시 노려봤다.

자신을 속인 거냐고 따지는 걸 테다.

"나는 울고 있지 않다."

"정말로?"

"그야···."

타락펜스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정말이냐고 물어본 그 순간, 녀석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이내 뚝뚝 흘러내린 까닭이다.

그동안 녀석이 내게 해 온 강압적인 행동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오해해 버렸다.

'고민하는 건 나뿐이고, 타락펜스는 제멋대로 굴고 있을 뿐이라고 말이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처음 느껴보는 애정을 놓치지 않으려 발악했으면서.

성검을 놓으면 자신의 존재는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쭉 인지하고 있었으면서.

나와의 약속을 그저 이용만 할 생각이었으면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이 녀석은 홀로 얼마나 많은 고뇌를 해 온 걸까?

울고 있는 녀석을 보듬어주고 싶은데 손에 들고 있는 게 거치적거린다.

나는 러스크가 든 통을 닫은 후 그냥 놔 버렸다. 어차피 결계 안에 떨어질 테니 괜찮겠지.

"아도르도 열심히 참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살며시 타락펜스를 끌어안으며 사과하니 녀석이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본인이 펼친 결계의 크기가 작아서 별 의미 없는 행동이 되고 말았다.

가만가만 등을 토닥여주자, 타락펜스가 말을 꺼냈다.

"나쁜 건···, 나다. 선우가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은 울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타락펜스는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마저 억지로 진정시키려 했다.

그래서 녀석의 반성이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이 급급한 나머지, 타락펜스에게 제대로 신경 써 주지 못한 탓이다.

"사실 약속 같은 건 지키고 싶지 않다. 아무래도 내가 신이 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으니, 이대로 선우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버리고 싶다. 대륙 따위 망하거나 말거나 내 알 바가 아니니까."

"그런데도 나와의 약속을 지켜 주겠다고 결심해줘서 고마워."

"으읏···."

품 안에 있는 녀석이 흠칫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그 떨림을 붙잡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녀석을 세게 끌어안았다.

'진작에 얘기를 나눠볼걸···.'

어느덧 결계는 모래에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결계에서 나오는 빛 덕분에 어둡지는 않았지만,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기에 썩 좋은 장소는 아니다.

하다못해 어젯밤에라도 우리의 약속에 관해 말을 꺼냈어야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이렇게 되어버렸다.

후회와 아쉬움을 느끼는 찰나.

모래밖에 보이지 않던 시야가 갑자기 트이는가 싶더니, 몸이 아래로 쑥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사를 지나 악숭이들이 만든 지하 공동(空洞)에 도착한 걸 테다.

타락펜스가 재빨리 자세를 바꿔서 나를 안아 들었다.

- 카가가가강!

수많은 창이 날아와 결계에 부딪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타락펜스는 안정적으로 착지한 후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뚜껑이 열려서, 내용물이 전부 쏟아진 간식 통은 못 본 셈 치기로 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망가트리는 것뿐이다. 행복을 가져다주는 보물이 눈앞에 나타나도, 욕심이 앞서서 거세게 움켜쥐려다가 부숴버리는 게 나란 사람이다."

"방금 날 지켜 줬으면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단지 내가 아닌 존재가 선우에게 영향을 끼치는 게 싫었을 뿐이다. 게다가 내가 망가트리는 건 신체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걸, 선우가 누구보다도 잘 알잖는가?"

타락펜스가 결계를 해제하고 벽면을 향해 가볍게 성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벽에 그려진 마법진에서 일부 문자가 새겨진 돌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아마 마법진이 발동되는 데 핵심이 되는 문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벽을 부쉈다가 굴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최소한의 충격만 주며 마법을 파훼한 거겠지.

함정은 타락펜스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나는 녀석에게 신경을 써야겠다.

"너는 나쁘지 않아. 단지 잘 몰랐을 뿐이야. 동등한 입장에서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소중한 것은 어떻게 만들고 지켜내야 하는지···."

"몰랐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다른 건 몰라도 네가 나에게 한 행동들은 내가 용서할 수 있어."

"······."

타락펜스가 말없이 고개를 떨구며 벽면을 손으로 짚었다.

숨겨진 버튼이라도 있었는지 달칵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나서야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보아 기계식 함정이라도 있었나 보다.

나는 녀석의 옆에 바짝 붙어 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용서할게. 그러니까 진심을 다해서 사과해 줘."

"그렇다면 더더욱 사과할 수 없다. 내게 용서받을 자격 같은 건 없으니까."

"그걸 정할 수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함정을 파훼하며 걸음을 옮기던 타락펜스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왼손을 들어 올리더니, 돌연 신성력을 일으켰다.

은빛 신성력이 일렁이는 손이 내 머리 쪽을 향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로 그 손을 피했다.

"그런 반응을 보일 거면서 나를 용서하겠다는 말을 쉽게 입에 담지 마라. 용서를 한다는 건 내가 선우에게 한 짓을 덮어주겠다는 뜻이며, 이는 곧 본인이 겪었던 괴로움까지 함께 덮어버리겠다는 거나 다름없잖은가? 지금 선우가 하려는 건 용서가 아니다."

"아니면 뭔데?"

"희생이고 헌신이지. 그렇기에 내게는 무척이나 기껍고도 기쁜 일이지만···. 곧 사라질 나 같은 것의 기분을 위해, 선우를 더 망가트리고 싶지는 않다."

타락펜스에게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자기혐오가 범벅된 체념 어린 말이었지만, 그 밑바탕에 깔린 것은 분명 나를 위한 배려였다.

정말 이 녀석도 세르펜스는 세르펜스인가 보다.

"아도르는 내가 소중해진 거구나. 네 행복을 위해 갖춰져야 할 조건이나 도구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서."

"그럴 수밖에 없잖은가. 내게 희생만을 강요했던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난, 나를 위해 희생해 주는 선우를···, 내가 어찌···."

"왜 말을 하다 말아?"

"선우를 소중히 대하지 못한 내가, 감히 선우가 소중하다 말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떨리는 목소리로 반쯤 웅얼거리다시피 말한 타락펜스가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녀석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인지했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고 말했던, 후회 가득한 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잖아.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지만, 더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

"···이러니, 내가 어찌 선우를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타락펜스가 우는 것처럼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슬픔과 기쁨이 마구 뒤섞인 표정이다.

눈물은 멎은 지 오래였으나 여전히 울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녀석의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문질러 닦아주었다.

"고마워, 소중하다고 말해줘서. 그리고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줘서.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어."

"드디어···, 봤군."

"응? 보다니, 뭐를?"

"나를 향해 밝게 웃어주는 선우의 얼굴을."

그리 말하며 웃는 녀석의 표정은 더없이 순수하여, 현재펜스의 미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나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웃어 보이려 노력할 걸 그랬다.

아니, 그런 인위적인 웃음은 별로 기뻐하지 않았으려나?

'드디어 진심이 통한 것 같은데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갑자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더 함께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지금 받았더라면, 바로 부정하지 못하고 망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휴마누스에게 성검을 반납하러 가는 데 최소 며칠은 걸릴 테니, 오늘이 이 녀석과의 진짜 마지막 날은 아닐 터.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아껴주자.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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