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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888화 (888/925)

< 88. 공작님과 약속의 날 (6) >

돌연 타락펜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만 파티를 끝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

"벌써?! 아직 케이크도 한 조각밖에 안 먹었잖아. 좀 더 놀다가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공작저로 출발하자. 에일리히 님한테 작별 인사하고, '나의 벗'도 봐야 하지 않겠어?"

"······."

"아!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 너는 휴가를 즐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지? 일행들이 공작저로 찾아올 때까지, 악숭 세력 일은 잠시 잊고 나랑 같이 침대에서 뒹굴거리면서 푹 쉬자. 그러다 일행들이 찾아오면 다 함께 송별회를 여는 거야. 어때, 재밌겠지?"

"······."

원인 모를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이 장황해졌다.

타락펜스는 두서없는 내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살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보는 내 마음이 먹먹해질 정도로 서글퍼 보이는 미소다.

"왜 아무런 대답이 없어?"

"으음···. 선우의 말대로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즐겁겠군."

그렇게 말하는 타락펜스의 두 눈은 이룰 수 없는 꿈을 그리듯 애달픈 빛을 띠고 있었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녀석에게 따지고 말았다.

"어째서 못 할 것처럼 말하는 거야?"

"그러는 선우는 꼭 나와 더 함께 있고 싶은 것처럼 말하는군."

"그야···. 성검을 반납하려면 휴마누스와 만나야 하고, 그러려면 그때까지 함께 지내야 하잖아."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의 의미를 이해해 버렸다.

"설마···, 온 거야?"

"···그러하다."

"아니, 어떻게?"

"일부러 근처를 지날 때 기운을 흘리기도 했고, 대놓고 신의 힘을 빌려와 거대한 결계를 펼쳤으니까. 그런데도 기운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성검의 주인' 자격이 없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덤덤하게 설명하는 녀석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속으로 최선을 다해서 타락펜스를 아껴주겠노라 다짐하며, 짧은 시간이나마 최대한 활용하여 즐겁게 지낼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때.

이 녀석은 진작에 이별 준비를 마치고, 코앞까지 다가온 '끝'을 기다리며 초읽기에 들어가 있었다니.

"근처를 지나···? 일행들의 근처를 말하는 거야? 세르펜스 너, 일행들의 위치를 계속 파악하고 있었어?!"

"계속은 아니고, 아레나 왕국의 국경을 막 넘었을 때 그자들의 기운을 느꼈다."

"일행들이 먼저 와 있었다고? 아니, 어떻게?"

"행적을 수소문하여 뒤를 쫓는 방법으론, 평생 가도 우리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쯤은 그들도 눈치챘을 테지. 그렇다면 그자들이 다음에 할 행동이 무엇이겠는가?"

"경로상 다음 행선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가서 대기하는 거···?"

"그래, 그 수밖에 없겠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차분하게 말하는 타락펜스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녀석은 한참 전부터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쩐지 나와 녀석의 관계가 뒤집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있을 수 없는 미래를 바랐던 건 타락펜스고, 나는 어서 이 생활이 끝나길 바랐는데.

그간 타락펜스는 줄곧 이런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이래서 당장 파티를 열자고 했던 거야?"

"그렇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던 거야?"

"선우의 웃는 얼굴을 더 보고 싶어서."

참으로 이기적인 녀석이 아닐 수가 없다.

이렇게 끝낼 거면서 오늘을 기억해 달라는 소리를 했다니, 잔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눈물이 차올랐다.

"나, 나는 아직···, 이별의 준비가 안 됐단 말야···!"

"오늘이 오기를 계속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휴마누스에게 성검을 반납하러 가는 데 최소 며칠은 걸릴 테니까, 계약한 기간의 마지막 날일 뿐. 너와의 마지막 날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미련이 생겨버릴 터이니."

어떻게 저런 다정한 표정으로 매정한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걸까?

정말 너무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너무하다.

"이제야 너의 좋은 면모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진심으로 네게 애정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붙어서, 네가 떠나기 전까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오늘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복한 날이었다."

"그러게 진작 회개했으면 좋았잖아, 이 멍청아!"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있자니 나를 감싸 안으며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울음을 그치면, 이 녀석은 곧장 밖으로 나가 휴마누스에게 성검을 넘기고 사라지겠지.

"···일행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송별회를 열 생각은 없어?"

"재밌는 말을 하는군. 그자들 중 절반 이상이 내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은 건가?"

"······."

하기야 이 녀석 입장에서는 그들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겠지.

휴마누스와는 선택의 날 이전에도 불편한 관계였고, 그 이후에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

2회차 당시 성검 일행이던 리에나, 아니마, 푸로르, 유지스는 자신이 죽였던 사람이고.

흑기사 윈스톤과는 같은 편이었으나 서로를 거의 혐오하다시피 했으며, 에드나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생판 남이었으니까.

그런 사람들과 파티를 해 봤자 하나도 즐겁지 않겠지.

그래서 그들이 오기 전에 나와 둘만의 파티를 열고자 했던 걸 테다.

"파티에는 역시 '선물'이 빠질 수 없겠지?"

난데없이 타락펜스가 선물 타령을 했다.

치사하게 혼자서 이별 준비도 끝내고, 선물까지 마련해 놨나 보다.

나는 킁 하고 코를 훌쩍이며 녀석의 품을 빠져나왔다.

"혼자 이별도 준비하고, 선물도 준비하고. 아주 바빴겠어?"

"그동안 선우는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었잖은가. 그러니 오늘은 내가 준비한 선물을 받아다오."

"···무슨 선물인데?"

"그건 곧 알게 될 거다. 특별한 선물이 될 거라고 장담하지."

타락펜스가 나를 달래며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었다.

일행들이 오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더니, 이제는 준비한 선물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을 작정인가 보다.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을 준비했길래 이러나 싶어서.

"별것 아니기만 해 봐."

"후후후···. 그럴 일은 없다. 그보다 선우는 나를 믿는가?"

"믿어.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묶여다오."

내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타락펜스가 대답을 내놓았다.

의문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심화됐다.

특별한 선물과 나를 묶는 것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묶여야 받을 수 있는 선물이 뭘까 고민해 봤지만, 그딴 게 존재할 리 없다는 결론만 얻었다.

"나를 위한 선물을 주려는 거 맞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될 거다."

"그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나를 믿는다는 말은 거짓이었나?"

서운함을 토로하며 입을 삐죽이는 타락펜스를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녀석이 '선우가 나를 믿어주지 않아서 기껏 준비한 선물을 주지 못했다.'라는 한을 품고, 끝을 맞이하게 둘 수는 없다.

한두 번 묶여본 것도 아니고 한 번 더 묶인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

"알았어. 믿을 테니까 어디 마음대로 해 봐."

"믿어줘서 고맙다."

내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타락펜스가 밧줄을 꺼내어, 숙달된 움직임으로 나를 꽁꽁 묶었다.

그러더니 거기에서 끝내지 않고 재갈까지 꺼내 들었다.

"잠깐!! 세르펜스 너, 선물을 주고 나면 바로 성검을 반납해 버릴 거지?"

"그럴 예정이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지금이 마지막이겠네?"

"음···,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럼 지금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 줘."

"알겠다."

타락펜스가 밧줄에 묶인 채 바닥에 누워있는 나를 앉혀놓고, 앞에 쭈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살다살다 밧줄에 묶인 채, 나를 묶은 사람과 이별의 말을 주고받게 될 줄은 몰랐다. 앞으로도 이런 날은 평생 오지 않겠지.

여러모로 오늘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거다.

"8월 24일, 오늘을 꼭 기억할게."

"고맙다."

"잘 가, 세르펜스. 네가 그리울 거야."

"···잘 있어라, 선우."

타락펜스가 먹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 입에 재갈을 물렸다.

감동을 할 거면 감동만 하고, 재갈을 물릴 거면 재갈만 물릴 것이지.

그 두 개를 같이 하니까 되게 이상하다.

내가 떨떠름해하는 사이.

녀석은 내 아공간 주머니를 가져가서, 먹다 남은 케이크와 우리가 앉았던 탁자랑 의자를 챙겨 넣었다.

그리고 세니어를 꺼냈다.

'오랜만에 보네.'

바쁜 일이 없다면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세니어의 자태를 감상하며 손질했었는데.

최근에는. 아니, 타락펜스가 내게 악숭이를 죽여보라며 강권했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내지 못했다.

세니어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는데.

룩스메아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걸 듣고 나서 그런가, 괜히 빛 한 점 없는 공간에 가둬 놓은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내가 그런 감상을 떠올리고 있을 때, 타락펜스가 느슨하게 묶인 밧줄과 내 몸 사이의 틈에 세니어를 끼워 넣었다.

처음부터 세니어의 부피를 계산하고 묶었던 건지, 밧줄이 팽팽해지며 딱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조였다.

'진짜 뭐하는 거야? 이제 슬슬 얘기해 주면 안 되나?'

의문이 떠올랐으나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물어볼 수 없었다.

타락펜스는 그런 나를 번쩍 들어 올리고 방을 나섰다.

통로를 지나 계단만 덩그러니 놓인 이상한 공간에 도착하자, 녀석이 레버를 당겼다.

- 쿠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천장이 열리며 모래가 우수수 쏟아졌다.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시 입구로 가서 들어와야 한다던 법숭이의 말은 진짜였는지, 천장이 곧바로 닫히기 시작했다.

타락펜스가 나를 든 채로 날렵하게 계단을 올랐다.

악숭 거점의 변두리 쪽으로 나온 것인지, 벽처럼 보이는 오색 빛 결계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거대한 마법진과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매우 반가우면서도 묘하게 유감스럽다. 딱 하루만이라도 늦게 와 줬으면 좋았을 텐데.

"세상에···! 선우, 괜찮아요?!"

"조금만 기다려 곧 구해줄게!"

"아···, 신 룩스메아시여···."

"기사 나리, 얘기했던 거랑 다르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냥 추측일 뿐이라고 얘기했잖소."

유지스와 휴마누스는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고 리에나는 탄식했다.

푸로르는 어째서인지 윈스톤을 타박했으며, 그에 윈스톤은 무언가 찔리는 표정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에드나와 아니마는 집중해서 마법진을 구성하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듯했다.

"괜한 노력을 하는군. 설마하니 마법으로 결계를 부술 생각이십니까?"

거대한 마법진을 살펴본 타락펜스가 가소롭다는 투로 말했다.

내게 주겠다던 선물은 대체 어쩌고, 느닷없이 일행들을 도발하는 건지 모르겠다.

것보다 휴마누스를 만나자마자 성검을 반납하는 거 아니었나?

마음 같아서는 무슨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입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일단 녀석을 믿고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몸에 힘을 쭉 빼고 있으려니,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자신을 믿고 가만히 있는 내 행동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니면 떠나기 전에 한 번쯤 쓰다듬어 보고 싶었거나.

"모처럼 아량을 베풀어 살려두었건만···. 기어코 이렇게 찾아오다니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가?"

타락펜스가 악당처럼 목소리를 내리깔며 악당 같은 소리를 해댔다.

그 발언에 일행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겁을 먹은 게 아니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모두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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