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4) >
커다란 천막 안에는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곳에 누운 세르펜스는 첫 번째 용사의 무구인 휴마누스의 검집을 손에 쥔 채였다.
분명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침대도 꺼내고 검집도 쥐여준 걸 테지.
'다른 일행들은 전부 옆 천막으로 옮긴 건가?'
세르펜스에게도 용사의 무구 기능이 적용될지는 미지수다.
더욱이 첫 번째 용사의 무구는 '성검'의 힘을 조절하는 것이지, 성검과 접촉한 이후의 후유증까지 조절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렇기에 휴마누스는 기절한 일행들과 녀석을 따로 분리해 둔 게 아닐까 한다.
아니면 이제껏 세르펜스가 성검과 접촉한 이후에는 늘 일행들과 분리해 뒀으니, 이번에도 별생각 없이 이렇게 한 걸 수도 있고.
'저 용사의 무구가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있다면, 이번에도 세르펜스를 묶어 둬야 하나···?'
휴마누스가 세르펜스를 묶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먹은 건지, 정신을 잃은 녀석의 모습을 보고 차마 묶지 못한 건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으나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세르펜스가 성검과 접촉한 후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 공격성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뿐이었으니까.
'성검펜스의 기억을 보고 나면 울거나 멍하니 있을 뿐이었고, 타락펜스의 기억을 봤을 때는 뭐···.'
통계를 내기에는 표본이 적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타락펜스가 한참이나 머물다 갔으니, 이번에 세르펜스가 볼 기억은 아마 2회차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타락펜스는 무턱대고 누구를 죽이지 않고, 상황 파악을 우선시하는 성향이 강하다.
볼타 산맥에서 세르펜스가 타락펜스의 기억을 보았을 때만 해도 그러하다.
깨어난 직후 나를 '자신이 죽인 리벨론 경'으로 착각했음에도, 단숨에 내 목을 꺾는 대신 틀어쥐기만 했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거다.
'···라는 건 변명이고, 사실은 그냥 녀석을 묶고 싶지 않아서 내버려 둘 뿐이지만.'
막 기절한 직후라면 모를까.
한창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세르펜스의 얼굴을 마주 보며, 녀석을 묶을 자신이 없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의자를 꺼내어 앉아 녀석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은 이마며 뺨이며 목덜미며 할 것 없이 피부에 들러붙었고, 꽉 다물린 입에서는 미약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검집을 쥔 손가락에는 어찌나 힘이 들어갔는지 하얗게 질린 채로 가늘게 떨고 있었다.
'지금 깨우면 일어날까?'
타락펜스와 헤어질 땐 눈물이 나올 정도로 몹시 아쉬웠는데.
지금은 그저 세르펜스와 빨리 만나고 싶을 따름이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만난다.'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나, 똑같은 얼굴이라서 그런가 아직 녀석이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세르펜스."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살짝 흔들어 보았으나 그 어떤 반응도 없다.
아무래도 좀 더 기다려야 하나 보다. 어째서인지 야속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리고 손에 들려있던 아공간 주머니를 웃옷 안주머니에 넣으려는 그때.
- 바스락.
종이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타락펜스가 쓴 편지에 생각이 미쳐 손가락 끝에 걸린 종이를 꺼내 보았다.
아까 봤던 '친애하는 나의 벗 <선우>에게'라는 글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걸 읽기에 지금만큼 적절한 시기도 없지 않나?'
나는 봉랍 처리된 편지 봉투를 그냥 잡아 뜯으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이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건넨 편지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기왕이면 봉투째로 고이 간직하고 싶다.
따라서 세르펜스에게 편지 칼을 빌리기로 했다.
녀석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편지 칼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그러고 나서 다 쓴 물건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데, 세르펜스가 자신의 생일 선물로 에드나에게 요청한 마법 시약이 떠올랐다.
'그것도 슬쩍 빌려 쓸까···?'
시약이 든 병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았으므로,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는 건 무척이나 쉬웠다.
하지만 생일 선물인 데다가 소모품이라 그만두기로 했다.
뭣하면 나도 에드나에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나는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를 녀석의 품 안에 넣어 놓고, 잠시 무릎에 올려놓았던 편지 봉투를 다시 손에 들었다.
편지지를 꺼내는데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괜히 천막 입구와 세르펜스를 한 번씩 쳐다보고 난 후,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편지지를 꺼내어 펼쳤다.
[ 나의 유일한, 착하고 어진 벗 <선우>에게. ]
착하고 어진 벗이 '선우'의 뜻인데 이렇게 쓰면 겹말 오류 아닌가?
아직 본격적인 내용은 읽어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울컥하고 치밀어오른 감정을 달래기가 힘들다.
그래서 괜한 트집을 잡아 술렁이는 마음을 달래며 다음 줄을 읽었다.
[ <선우>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내가 그대를 놓아 주었다는 뜻이겠지.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사실 나조차 이 편지가 <선우>에게 무사히 전달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당신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잠적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쉬이 떨칠 수가 없으니.
내게는 <선우>의 반항을 억누르고 강제할 힘이 있다.
폭력으로써 당신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신성력으로써 안락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장담하건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선우>는 내게 의존하며 매달리게 될 거다. ]
거기까지 읽었을 때 내가 편지지를 접고 주변을 둘러본 건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이 녀석은 대체 왜 편지에 이딴 내용을 써서, 잘 시간에 부모님 눈을 피해 몰폰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걸까?
다행히 휴마누스가 이 편지를 내게 줬으니까 망정이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읽어 버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하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러고 보면 휴마누스는 나를 풀어주며 편지를 발견했을 텐데, 바로 얘기하지 않고 나중에 줬지?'
만일 내가 타락펜스에 관해 변명하고 그 녀석을 두둔하지 않았더라면, 휴마누스는 이 편지를 내게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올곧은 그 성격에 남의 편지를 멋대로 읽지는 않겠지만.
못해도 내가 아닌 세르펜스에게 먼저 건넸을 가능성까지 배제하긴 어렵다.
'세르펜스는 편지의 내용을 알고 있을 테니 곧바로 찢어서 불태웠으려나···?'
아직 초반부 내용만 읽고 속단하긴 이르다.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핀 뒤, 슬그머니 편지지를 도로 펼쳤다.
[ 내가 그러지 아니하고 <선우>에게 이 편지를 건넸다면 가히 기적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기뻐해도 좋다.
당신이 만든 기적이 나를 바꾸었으므로. ]
긴장이 풀리며 내 입에서 자동으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칭찬을 하고 싶었으면 그냥 '선우는 대단하다!'라고 쓸 것이지. 앞에 왜 이상한 얘기를 늘어놔서 읽는 사람 심장 떨리게 하나 모르겠다.
속으로 그렇게 불만을 투덜거리며, 나는 뒤에 아무도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하고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기적이 어쩌고 하는 내용 밑으로, 무려 한 장을 다 채울 때까지 기나긴 사과의 말이 이어졌다.
대충 요약하자면 나를 함부로 대하고 상처 입혀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자신을 용서할까 봐 차마 제 입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못했으나, 이렇게 글로 남기는 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자신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내가 의무감이나 동정심으로 본인을 용서하는 일은 없으리라 판단한 걸 테다.
그래도 완전히 확신한 건 아니었는지, 타락펜스는 편지에도 자신을 용서하지 말아 달라는 글을 적어 놓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편지지를 넘겨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 그렇게나 내가 <선우>에게 몹쓸 짓을 많이 저질렀음에도, 그대는 나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해하려 애쓰며 나를 설득하고자 노력했지.
<선우>. 나는 그대가 그대였기에 소유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대였기에 포기할 마음이 생겼다.
당신을 망가트려 내 곁에 두는 건 쉽고 간단한 일이지만, 그런 짓을 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이 아니게 되어버릴 테니까.
만일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선우>가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대륙을 멸망으로 몰아간 것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를 뻔했다. ]
타락펜스는 '내 정신적 안정'과 '대륙의 모든 생명'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전자를 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 세상에 온 이후, 가장 나를 한계로 몰아갔던 존재가 바로 타락펜스다.
그런데 이런 글을 남기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하···, 하하···."
정말 잘못된 표현 방식이지만, 그 녀석이 나를 진심으로 아꼈다는 사실이 와 닿았다.
얼마나 나를 소중히 대하고 싶어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정말 기뻐서 난감해졌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눈물 자국을 닦아내는 걸 깜박했네···?'
나는 편지를 잠시 접어두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물병을 꺼내어 손수건을 적셔 얼굴을 꼼꼼히 닦았다.
그리고 다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 <선우>와 만나서 기뻤다. 그래도 행복하지는 않았다.
이는 <선우>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불행을 붙들고 놓지 아니한 까닭이다.
당신을 내 불행에 끌어들여서 미안하다. 정말 진심으로.
하지만 나는 이기적이고 못난 사람인지라, 나 따위는 잊고 행복하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군.
부디 나를 기억해다오. 1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를 떠올려다오.
그리고 일생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나를 그리워하며 울어다오. ]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건마는 정말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다음 줄을 읽었다.
[ 더 써 내려가다 보면 욕심이 커질 것 같으니 편지는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선우>, 정말 고맙고 미안했다. 이제는 내가 없는 곳에서 행복하길 바란다.
- 당신의 아도르가 되지 못한 세르펜스가 - ]
왜 벌써 끝내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내뱉어 봤자 들어줄 이는 존재하지 않기에 꾹꾹 눌러 삼켰다.
그 대신 시선을 좀 더 아래로 내렸다. 아직 글이 더 남았다.
[ 추신 : 내가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면 그대는 나를 보며 진심으로 웃어줄까?
바라건대 꼭 그랬으면 좋겠군. 하지만 <선우>가 웃어주지 않았더라도 이 글을 보며 후회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디까지나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으니. ]
이 녀석은 대체 언제 이런 편지를 쓴 걸까?
언제부터 내가 웃어주길 바라며 후회와 자기혐오를 곱씹었던 걸까?
다른 일행들에겐 끝까지 나쁜 사람으로 남으려 했으면서, 내게만 다정한 구석을 보여주다니. 그것도 마지막에 다다르고 나서야.
녀석이 직접 편지에서 언급한 대로 너무 이기적이다.
그래서 이 녀석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한동안 이 녀석을 계속 그리워하겠지.
"선우야, 세르펜스는 어···, 어어···."
휴마누스가 천막 입구의 천을 걷고 들어오려다 말고 뒷걸음질 치며 도로 나가버렸다.
설마하니 내가 우는 걸 본 걸까?
그 얘기를 다른 동료들에게 떠들지 못하도록 휴마누스를 막아야 했다.
나는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아공간 주머니에 고이 담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누군가가 내 손목을 붙들지만 않았다면.
"내가 손짓으로 나가 달라고 한 것이니 그냥 앉아 있어라."
언제 깨어난 건지 모를 세르펜스가 침착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