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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899화 (899/925)

<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7) >

돌아온 세르펜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품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는 거였다.

식사도 해야 하고 휴마누스도 앉아야 하니 탁자와 의자를 꺼내기 위함이다.

눈을 가리고 있던 터라 녀석이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이는 동안, 들고 온 음식은 어쨌는지 잘 모르겠다.

대충 침대에 잠시 내려놓았거나 휴마누스에게 맡기거나 했겠지.

내가 안대를 끼기 전에 미리 준비해 뒀어야 했는데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세르펜스가 이유식을 떠먹여 줘야 할 나이에서 벗어나,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다 밥상을 차려 먹을 수 있는 수준까지 자라서 다행이다.

"선우, 잠깐 실례하겠다."

세르펜스의 성장에 뿌듯함을 느낄 무렵.

녀석이 양해를 구하더니 내가 앉은 의자를 살짝 들어서 회전시켰다. 마주 보고 앉아서 식사하고 싶었나 보다.

그때 옆에서 기가 차다는 듯한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내가 흘린 소리는 아니고 세르펜스도 아닐 테니, 소거법으로 생각해 봤을 때 그 헛웃음 소리의 주인은 휴마누스가 틀림없다.

"선우가 네 식사에 관심을 쏟는 거야 늘 있는 일이라지만, 세르펜스 너까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막 정신이 들었을 땐 아무것도 몰라서 그냥 넘어갔다 치더라도, 방금 나와 선우가 나눈 대화를 들었잖아."

"휴마누스는 아직도 선우를 모릅니까? 선우는 제가 식사를 마치기 전까진, 절 걱정하느라 대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럴 것 같긴 해."

세르펜스가 고작 두 문장만으로 휴마누스의 불만을 잠재웠다.

대체 두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의문이 들면서도, 세르펜스의 말이 크게 틀린 것도 아닌지라 반박할 기분도 들지 않는다.

약 24년간 제대로 된 식사도 못 하고 살던 녀석이 내 앞에서 배를 곯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묻는 건데, 세르펜스는 먹으면서 대화하고 있는 거야?"

"지금부터 먹을 생각이었다."

내가 손을 들어 올리며 질문하자, 세르펜스의 다급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껏 음식을 가져와 놓고 아직 입조차 대지 않았나 보다.

누구는 녀석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휴마누스에게 의심을 사 가면서 이렇게 안대까지 쓰고 있건만.

불편한 심기를 한껏 표정에 담아내자 곧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는 식기 소리를 내지 않고 우아하게 식사를 하는 세르펜스지만, 눈을 가리고 있는 내게 식사 중이라는 걸 알리고자 일부러 소리를 낸 걸 테다.

"으음···. 아무튼 선우에 대한 거라면 제가 더 잘 압니다. 그러니 휴마누스는 일단 진정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잘 안다면서, 너는 왜 그렇게 차분한 거야?"

"차분한 게 아니라 섣불리 접근하고 싶지 않은 것뿐입니다. 선우를 걱정하는 그 마음은 저도 마찬가지이기에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 지금 휴마누스는 너무 조급해 보이십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한데, 선우가 자꾸 아무 일도 없었다고 잡아떼니까 그러지."

휴마누스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어떻게든 내게서 지난 한 달여간의 일을 듣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 걸 들어서 좋을 건 하나 없는 데도.

특히나 휴마누스는 세르펜스에게 성검을 건넨 장본인이 아니던가.

내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가장 괴로워하며 후회할 사람은 바로 휴마누스다.

어쩌면 세르펜스보다 더 심하게 자책할 수도 있다.

그 정의로운 성격에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며 넘어갈 리 없으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성검부터 넘겨서, 아니면 자신이 너무 늦게 와서.

혹은 자신이 너무 약해서 일어난 일이라며 책임감을 느끼겠지.

"문제의 원흉이 사라졌으니 일각을 다퉈야 할 만큼 시급한 일은 아닙니다. 우선은 선우가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그러다가 저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면?"

"이미 선우는 2회차의 저에게 정을 주었습니다. 선우에게 있어 그 시기의 저는 안쓰럽고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그 시기의 저에 관해 부정적인 얘기를 꺼내면, 거부감을 느끼며 반발하는 게 당연합니다."

처음에는 세르펜스가 내 편을 들어주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뭔가 이상했다.

말하는 본새만 들어 보면, 어째 휴마누스보다 내 상태를 더 심각하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이 녀석도 유지스처럼 내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그런···거야···?"

"네. 그러니 선우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선우의 문제를 네가 가볍게 여길 리 없고 나는 이런 쪽에 젬병이니까, 네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맞겠···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는 휴마누스의 목소리에서 답답함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비록 내가 눈을 가리고 있기는 하나 귀까지 막은 것은 아니거늘.

듣는 사람 불편하게 어째서 이런 얘기를 당사자 앞에서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보다 더 모르겠는 건 세르펜스의 의중이다.

'나를 가장 잘 파악하는 세르펜스가 저렇게 말해버리면, 내게 문제가 있다는 게 확실시되어 버리잖아···?'

지금 분위기로 봐서 오늘은 휴마누스가 물러나 줄 것 같긴 하다.

그러나 머지않아 또다시 지난날의 일을 캐묻겠지.

내가 입을 열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전전긍긍하며 나를 유심히 살펴볼 테고.

아니, 어쩌면 내가 눈을 가리고 있어서 모를 뿐. 지금도 그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르펜스는 내가 타락펜스와 있었던 일을 모두에게 알리길 바라는 걸까?'

달그락 달그락,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평화로운 식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휴마누스가 있어서인지, 식사하는 동안에도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던 세르펜스는 조용히 먹기만 했다.

그래도 녀석은 일부러 소리를 내 준 덕택에 인기척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반면에 휴마누스는 도통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어째 휴마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방향에서 따끔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눈을 가리기 전에 보았던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올랐다.

'···어쩌지?'

나는 [성검의 주인] 속 그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타락펜스를 포기하지 않으려 발악했던 것을 기억한다.

세르펜스가 나서서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못 박아버린 이상.

휴마누스는 기다릴지언정 포기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대화를 피하는 건 불가능하니, 얘기하긴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지?'

어느 순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세르펜스가 식사를 마쳤나 보다.

바로 안대를 벗어도 되나? 아니면 세르펜스가 이제 벗어도 된다고 말을 하면 벗을까?

갈등하며 안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때.

돌연 세르펜스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요구를 해 왔다.

"선우, 입을 벌려 봐라."

"예?"

"정말 고기를 먹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

"아아···!"

아아, 그래서 입을 벌리라고 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감탄사를 내뱉는 찰나, 입안에 미트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쏙 들어왔다.

새콤한 토마토소스가 혀에 닿았다. 우물우물 입에 들어온 것을 씹으니, 육즙이 소스와 어우러져 진한 감칠맛이 났다.

육류를 먹지 못한 기간이 길어서일까?

아까 배부를 때까지 먹었지만, 또 먹어도 여전히 맛있다.

입안을 가득 채운 미트볼의 맛을 즐기고 있는데 안대가 스르륵 풀렸다.

눈을 뜨자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세르펜스가 안대를 손에 든 채, 의자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저 녀석이 안대를 풀었나 보다.

"정말 잘 먹는 것 같아서 다행이로군."

테스트 결과에 만족했는지 세르펜스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얼굴 가득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게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좀처럼 믿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만큼 타락펜스의 의식 너머에서 계속 내 상태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세르펜스가 보기에도 내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

말을 내뱉은 내가 생각해도 참 맥락 없는 소리다.

하지만 녀석이 날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지금, 묻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옆에서 휴마누스가 기가 막힌다는 목소리로 정말 몰랐느냐고 물어왔고, 세르펜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지금 내가 보기에 선우는 폭력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까닭에, 그에 길들여진 것처럼 보인다."

"난 2회차의 네게 맞은 적 따윈 없어."

"선우는, 정말···!"

세르펜스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휴마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으므로, 무섭다기보다는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내게 정신적인 폭력도 폭력이란 것을 알려준 사람이 바로 그대다."

녀석이 다시 입을 열어 얘기했다.

체념이 묻어나는 그 표정으로 보아, 녀석이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은 따로 있지 않았을까 싶다.

불현듯 발목이 시큰거렸다.

타락펜스에게 세게 잡힌 적 있는 부위다.

'혹시 세르펜스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려나?'

나라고 타락펜스가 내게 폭력적으로 굴었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리 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녀석이 살아온 환경과 그로 인해 비틀어진 성격을 생각하면, 나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온건한 편이었다.

'정신적인 폭력에 관해서는 감싸줄 수 없지만, 적어도 신체적 폭력은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성검의 주인] 속 타락펜스는 정말 밥 먹듯이 쉽게 누군가를 고문했다.

그런데 내게는 그러지 않았다. 타락펜스는 내게 주먹 한 번 휘두른 적 없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몰라서 서툴렀을 뿐, 나를 함부로 대할 생각은 없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선우가 간과한 듯하여 덧붙이자면, 구속 또한 물리적 폭력의 일종이다. 강하게 묶으면 아프고 멍도 들잖는가? 더구나 신체적 자유를 침해한다는 면에서, 단순 폭행보다 더 심각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걔가 날 그렇게 세게 묶은 건 뭣 모르던 초반뿐이야. 중간부터는 반성하고 안 아프게 살살 묶다가 아예 가죽 스트랩으로 갈아탔는데, 그것 가지고 뭐라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좀 그런 건 선우의 그 발언이다."

세르펜스가 내 말꼬리를 살짝 변형시켜 말하며 어딘가를 눈짓했다.

그 시선을 좇아 도착한 지점에 보이는 건 경악한 휴마누스의 표정이다.

아차 싶었으나 이미 내뱉어버린 말은 주워담는 게 불가했다. 하물며 남의 귓속을 파고들어 머릿속에 새겨진 것을 무슨 수로 빼내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세르펜스가 자신의 2회차 인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싫어서, 반박한다는 게 그만 실수해 버렸다.

조금 전, 녀석이 내게 시간을 더 줘야 한다고 주장한 까닭에 긴장이 느슨해지기도 했고.

"선우, 너···! 대체 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야?! 하루 이틀 묶였던 게 아니잖아!"

"그냥 묶이기만 했을 뿐, 그 상태로 딱히 뭔가를 당하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묶은 것도 그냥 제가 도망갈까 봐 불안해서 그랬던 거고. 신뢰가 쌓인 후에는 가죽 스트랩을 이용했는데, 제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풀 수 있었습니다. 착용한 상태로 방 안을 돌아다니는 것도 가능했고요!"

"스스로 구속을 풀 수 있는데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길들여졌다고?!"

"아니, 그걸 왜 그딴 식으로 해석합니까?!"

대체 휴마누스의 머릿속엔 뭐가 든 건지 모르겠다.

세르펜스에게 휴마누스와 거리를 두라고 말해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우리 애가 안 좋은 영향을 받을까 봐 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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