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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900화 (900/925)

<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8) >

"난 그냥 네가 한 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뿐이야!"

휴마누스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왁왁 소리를 내질렀다.

그런다고 내가 믿어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휴마누스를 노려보았다.

세르펜스가 한숨을 포옥 내쉰 후 말을 꺼낸 건 그때였다.

"후우···. 그러게 말했잖습니까."

"어휴! 그러네, 진짜 말이 하나도 안 통해."

휴마누스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며 세르펜스의 말에 동조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휴마누스야 오해를 할 법도 하지만, 세르펜스는 당최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숨기고 덮어버려도 모자를 판에 문제를 더 키우고 있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답답하다는 표정이군."

"둘 다 내 말을 헛소리 취급하는데, 답답하지 그럼 안 답답하겠어?"

"짐작은 했지만, 역시 객관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나···."

내 대꾸를 들은 세르펜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참담함을 느끼는 표정이다.

나는 정말로 괜찮건만. 녀석이 자책하며 괴로워할 필요 따윈 없거늘.

왜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지 않는 걸까?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세르펜스, 너와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거였어. 그래서 불안했던 것 말고는···."

"만일 선우가 당한 것을 내가 똑같이 당한다 하여도, 별것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건···."

나는 지난 한 달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내 자리에 세르펜스를 대입하여 상상해 보았다.

누군가가 세르펜스에게 나를 돌려받고 싶다면 본인에게 애정을 줘야 한다고 협박하며, 밧줄로 묶고 목줄을 걸고.

교묘한 말솜씨로 정신에 틈을 만들어, 신성력을 이용해 감정을 멋대로 쥐락펴락하는 건···.

'나니까 버텼지, 세르펜스라면 어림도 없겠는데?'

내가 이런저런 상상을 하느라 대답이 늦어지자, 세르펜스가 '것 봐라.'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건 동등한 비교가 아니다.

나는 세르펜스와 다르게 묶이는 것에 트라우마가 없어 거부감이 덜하며, 정신적으로 더 어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그런 짓을 한 사람은 세르펜스의 또 다른 인격이다.

"만약 내게 또 다른 자아가 생겨나서 세르펜스에게 집착하면 오히려 좋아할 거면서,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내게 집착하며 구속하려 드는 선우라니, 그건···, 그런···, 으음···."

세르펜스가 바로 확답을 내놓지 못하고 번뇌에 사로잡혔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는 휴마누스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느끼며, 체감상 꽤 긴 시간이 지났을 때 세르펜스의 입이 다시 열렸다.

"솔···직히 혹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현재의 선우 그대로가 제일 좋다. 그러니 내가 아는 선우를 되찾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노력할 거다. 믿어다오."

"신뢰성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솔직히 말했으니까 일단 믿어줄게."

내가 신뢰성을 운운하는 순간 울상을 짓던 세르펜스가 이어진 말에 방긋 웃었다.

그 변화가 어처구니없어서 빤히 쳐다보자, 녀석도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흠흠 헛기침을 해댔다.

"아무튼, 선우는 집착 당하는 걸 싫어하는 편이잖은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다수는 싫어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더더욱 선우는 2회차의 내가 저지른 짓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지를 생각하여 배려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잖은가."

세르펜스가 내 대답을 못 들은 척하며 훈계를 늘어놓았다.

본인은 상대가 나라면 집착 당하는 것도 좋다는 반응을 보였던 주제에 참 양심도 없지.

그 와중에 결론은 옳은 말이라 반박하기도 뭐하다.

그래서 입술을 삐죽거리며 불만스러운 심정을 표정으로 드러냈으나, 내가 그러든가 말든가 녀석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을 지키겠다는 좋은 의도가 내게는 학대가 되었고, 선우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처럼···. 2회차의 내가 악의를 품고 선우에게 해코지한 것이 아니며, 그 행동의 밑바탕에 깔린 저의는 애정을 받아보고 싶다는 바람일 뿐이라 하여도. 나는 선우가 겪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거다. 선우가 내게 그리해 준 것처럼."

자신의 어린 시절 일을 끌고 오다니 이건 반칙이다.

이래서야 내가 괜찮다고 주장한들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다.

본인도 괜찮은 줄 알았다는 말로 되받아치며 내 상태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겠지.

녀석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다. 옳은 얘기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가슴 속에서 반발심이 솟구쳤다.

나를 어린 시절의 세르펜스로 빗대어 표현했다는 건, 타락펜스는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나는 그 녀석에 관해 나쁘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너를 포함하여 다른 일행들도 그랬으면 좋겠어."

"어째서지? 2회차의 내가 선우를 한껏 압박했다가, 서서히 풀어준 까닭에 고마움이라도 느끼게 된 건가?"

"그런 거 아니야."

"제대로 고민을 해 보고 대답해라."

"···싫어."

내 대답에 세르펜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휴마누스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번만큼은 내가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래도 싫은 걸 어쩌랴.

"선우···! 대체 왜 그러는 건가? 나의 다른 인격을 미워하면 내가 상처 받을까 봐 그러나? 그런 이유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녀석을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도 모를 때에도 나를 믿고 의지하며 매달려 온 아이다. 오직 애정을 받고 싶다는 이유로 말이다.

한데 내가 타락펜스에게 품게 된 좋은 감정이 진짜가 아니라, 생존 본능에 의한 합리화에 불과하다니.

그런 건 인정 못 한다.

비록 그 녀석 때문에 무던히도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원래 아이란 그러면서 자라는 법이다.

옛말에 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고.

그런데 나는 지난 한 달간 타락펜스에게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으니 어쩔 수 없다.

"나, 나는···."

내가 입을 꾹 닫고 노려보자, 세르펜스가 나 때문에 말이 끊겼던 부분을 반복하며 떠듬거렸다.

혼란스러운가 보다.

평소라면 진정될 때까지 손이라도 잡아줬을 텐데, 지금은 세르펜스가 반기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자, 잠깐만. 우리가 걱정할까 봐 괜찮은 척한 게 아니었어?"

"네, 척이 아니라 진짜로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겁니다."

"괜찮기는!? 더 심각한 거잖아!"

휴마누스가 아연실색하며 소리쳤다.

어쩐지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한다. 내가 타락펜스와 있었던 일을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겠다는데, 왜 이리들 난리인지 모르겠다.

트라우마로 남기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나?

'이게 모두에게도 좋은 건데···.'

막말로 타락펜스가 신성력으로 내 감정을 쥐락펴락하며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자신을 의지하게 하여 원하는 정보를 쏙쏙 빼갔다는 걸.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기억에 약간의 손실이 생겼다는 걸 사실대로 얘기한다 치자.

일행들은 세르펜스를 믿으니 녀석의 신성력을 대놓고 거부하지는 않겠지만, 리에나와 휴마누스라는 대체재가 있는 만큼 어지간하면 그쪽을 택하고자 할 테다.

이런 건 좋지 않다. 자칫 잘못하면 위급한 순간에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있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세르펜스대로 상처 입겠지.

다시 생각해 봐도 역시 말하지 않는 게 정답이다.

실수로 타락펜스에게 자주 묶였다는 얘기를 흘리긴 했지만, 묶는 것쯤이야 뭐.

나를 묶은 건 에드나도 마찬가지며, 나 또한 세르펜스를 묶은 전적이 있다. 그러니 문제 될 건 없으리라.

"선우,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가?"

"내게 미움받는 거?"

"물론 그것도 무척이나 무섭고 끔찍한 일이지만, 더 두려운 게 있다."

세르펜스가 울 것 같지만 울지 않는 얼굴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운을 뗐다.

그게 무엇이느냐고 물어보면 내게 불리한 말이 나올 테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표정이다.

나는 녀석과 시선을 맞추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여 어서 말해 보라는 뜻을 전했다.

"내게 있어 가장 두려운 건 선우가 나 때문에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여, 본인도 모르게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선우와 즐겁게 웃고 떠들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이 치밀곤 하여 겁이 난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

"나는 선우가 제대로 위로받길 바란다. 2회차의 내가 선우를 진심으로 아꼈다면, 나와 똑같이 생각할 거다. 그러니 더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지금 본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라.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세르펜스가 그런 걸 두려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내게 미움받는 것보다 그런 걸 훨씬 두려워하고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게다가 타락펜스도 마찬가지일 거라니, 믿을 수가 없다.

하지만 듣고 보니 짚이는 구석이 있긴 했다.

'설마 타락펜스가 일행들 앞에서 나를 향한 집착을 드러낸 게 그래서일까? 가족들에 관해 밝힌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내가 더 이상 혼자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렇다고 하면 의문이 풀렸다.

아무리 일행들을 단련하고 휴마누스를 각성시킬 목적이라 해도, 그 녀석의 도발은 지나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내 가족에 관한 얘기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내용이었고.

나는 타락펜스가 몸을 차지했을 때, 세르펜스가 무엇을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아는 바가 없다.

어쩌면 세르펜스가 타락펜스의 생각을 읽었을 수도 있다.

지금은 휴마누스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추측이 아닌 사실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줘. 아까 세르펜스가 본인 입으로 말했잖아. 내게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그러니까···."

"선우가 은근슬쩍 문제를 덮으려는 것만 아니라면 시간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

"···고마워."

그렇게 세르펜스에게 감사를 전한 후, 나는 고개를 돌려 세르펜스보다 더 집요하게 굴었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휴마누스는 갑자기 누그러진 내 태도에 다소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그러니까···, 객관성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알겠어."

"아깝다, 반만 맞으셨네요. 거기다 플러스알파로 나가달라는 말도 하려고 했습니다. 기왕이면 이것도 가지고."

"······."

세르펜스가 먹고 난 빈 그릇을 떠넘기며 나가라고 하자, 휴마누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래 봬도 일단은 황태자인데 취급이 너무했나?

뒤늦게 미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나는 다급히 구실을 덧붙였다.

"오랜만에 세르펜스랑 만나서 할 얘기가 많거든요."

"우리도 오랜만에 만난 거잖아. 그리고 다른 일행들이랑은 대화 안 해봐도 되겠어?"

"내일 할래요. 보나 마나 휴마누스처럼 이것저것 캐물어 올 게 뻔한데 지금은 좀···, 피곤해서."

"응, 그렇겠네. 미안, 내 배려가 부족했어."

"저야말로 죄송했습니다. 자꾸 답답하게 굴어서···."

"아냐, 혼란스러워서 그랬던 건데 뭘."

휴마누스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씩 웃어 보이고는 빈 그릇을 들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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