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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902화 (902/925)

<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10) >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선우의 의문에 답을 하자면, 내 추론이 아니라 사실이다."

세르펜스가 서운함을 거두고,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타락펜스에 관한 얘기를 입에 담았다.

타락펜스보다 자신이 우선이라는 확답도 듣고, 예쁘다고 칭찬도 받았으며, 장난 같은 대화를 나누어 기분이 완전히 풀린 모양이다.

"혹시 일행들에게 내 가족들에 관해 언급하거나, 내가 심한 짓을 당했다고 착각하게 할 법한···."

"착각이 아니잖은가. 나는 전부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얘기해도 된다."

내가 말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세르펜스가 말을 끊고 더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내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데 그 손길이 한없이 자상했다.

세르펜스를 달래기 위해 손을 잡게 된 거였는데, 어째서인가 녀석이 나를 달래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선뜻 인정할 수가 없어 머뭇거리자, 세르펜스가 폭탄 발언을 던졌다.

"인정할 수 없다면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일행들 앞에서 얘기해 봐라."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해?!"

"얘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미 답은 나온 것 아닌가?"

"2회차의 네가 신성력으로 내게···, 그랬던 것만 빼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육류와 치즈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건 숨길 수가 없어서 미리 밝혔고, 매일 묶였던 건 말실수 때문에 들켰으니까?"

내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자, 세르펜스가 담담하게 정곡을 찔렀다.

정말이지 이 녀석은 나에 관해 잘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이미 변명거리를 잃어버려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게 세르펜스는 또 한 번 일침을 가했다.

"하지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이 더 있었을 텐데? 잘 생각해보고 다시 얘기해라. 정말 그 모든 일을 일행들 앞에서 말할 수 있는지."

녀석의 말에 여러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타락펜스가 내 발목을 거세게 쥐고 잡아당긴 일이라든가, 양 어깨를 내리누르며 강하게 움켜잡은 거라든가.

공중에서 나를 떨어트리려 했던 것, 법숭이 연구실에서 일부러 공포감을 조성했던 것.

그리고 사람을 죽여 보라고 강요했던 일까지.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떠오른 기억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굵직굵직한 사건만 늘어놔도 이 정도다.

일상 속 자잘한 일을 더하면 끝도 없다.

가볍게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도 타락펜스는 내 의지를 꺾고, 나를 지배하려 들었으니까.

그리하여 오직 자신만을 위한 존재로 나를 탈바꿈시키려 했다.

"인정하기 싫은 건 이해한다. 하지만 사실은 선우도 알고 있잖은가?"

조곤조곤 다정한 음색이 혼란한 뇌리에 파고들었다. 머리가 조금 맑아진 기분이다.

세르펜스가 손을 고쳐 잡은 까닭에 테이블에 닿았던 손등이 위로 가도록 손이 뒤집혔다.

닿는 것 없이 휑해진 손등 위로 세르펜스의 또 다른 손이 포개어졌다.

녀석이 신성력을 사용한 것도 아닐진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가슴까지 와 닿았다.

서늘했던 마음에 약간의 온기가 돌았다.

"2회차의 내가 성검을 반납하고 사라질 마음을 먹은 이유도, 일행들 앞에서 악역을 자처하며 이루지 못한 자신의 욕망을 내보인 것도···. 전부 자신 때문에 선우가 망가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망가지다니···."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과격한 표현이다.

하지만 되짚어 보니 타락펜스도 같은 표현을 입에 담았다.

곧 사라질 자신의 기분을 위해서 나를 더 망가트리고 싶지 않다고.

당시에는 그저 타락펜스가 나를 배려해 줬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뻐서, 나를 '더' 망가트린다는 표현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타락펜스가 마음만 먹으면, 나 같은 일반인을 망가트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그러지 않았고 나는 그럭저럭 잘 버텨냈다.

그래서 자존감 낮은 녀석이 으레 입에 담는 자책 어린 표현인 줄로만 알았다.

"세르펜스. 내가 정말···, 망가진 것처럼 보여···?"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그러니 홀로 고통을 감내하려 하지 말고, 모두에게 의지해라."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아니길 비는 건지, 세르펜스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담겼다.

그런 녀석의 말에 위로를 받으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고자 깊게 심호흡했다.

이 감정은 그간 겪은 일에 대한 설움일까, 이제는 괜찮다는 안도감일까.

제법 능숙하게 나를 달래는 세르펜스의 성장에 차오른 감동일까, 그런 녀석을 향한 고마움일까.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있자니,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방금 '모두'라고 했어?"

"그래, 그렇게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소리에 내 귀를 의심하며 묻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여 확고히 긍정했다.

이 또한 세르펜스가 성장했다는 증거일까?

녀석이 의식을 차린 이후로 줄곧 보여온 의젓한 모습을 보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왜?"

"왜라니?"

"뭔가 좀 이상해서···? 세르펜스라면 '나에게 의지해라.'라고 말할 줄 알았거든. 아니면 하다못해 '나에게만이라도 의지해다오.'라고 말하거나."

"······."

막힘없이 말을 늘어놓으며 나를 위로하던 세르펜스가 입을 앙다물었다. 그런 녀석의 표정에서 망설임이 보였다,

어쩐지 이상하게도 마음에 걸리더라니.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게 틀림없다.

"얘기하기 싫어?"

"···그래도 말하겠다. 선우에게는 솔직히 인정하라고 얘기해 놓고, 정작 내가 숨기고 부정하면 안 되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눈을 지그시 감고 호흡을 고르는 세르펜스의 모습이 짐짓 경건해 보였다.

잠시 후 눈꺼풀을 들어 올린 녀석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사실 이전부터 선우에게는 나 말고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은' 했다. 하지만 내 욕심은 선우가 오직 나만을 의지하길, 선우가 내 앞에서만 울어주길, 선우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길 바랐다. 그래서 선우가 일행들에게 숨기려 하는 슬픔과 그리움마저 독점하고 싶어, 그런 선우를 도왔다."

타락펜스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자존감도 낮은 주제에 이런 소리를 참 잘도 한다.

본인도 꺼리는 내면의 소리를 솔직히 전하더라도.

내가 자신을 혐오하게 될 일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를 믿으니까 그런 거겠지.

"그런데도 생각이 바뀐 건 2회차의 네가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한 이유와 마찬가지로, 내가 망···, 망가져 가는 것처럼 보여서야?"

"으음···, 비슷하다."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어?"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어딘지 모르게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탓에 하마터면 억지로 얘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뻔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삼키는 사이, 세르펜스는 잠시 한 손을 떼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내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부드럽게 내 손을 어루만지는 대신, 매달리기라도 하듯 단단하게 붙들었다.

"지금 선우는 나와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건 둘째 치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어찌 되었건 2회차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인이며, 같은 모습을 하고 있잖은가. 선우는 내가 두렵지도 않나?"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냥 헛소리였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다.

"그딴 소리 할 시간에 고양이답게 야옹거리며 애교라도 부려보지그래? 그러는 게 내 정신 회복에 훨씬 이로울 것 같은데."

"다른 때였으면 그리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정말 심각한 일이니 선우도 진지하게 들어라."

"나도 진짜 심각하거든? 어쩐지 갑자기 쑥쑥 자랐다 싶더라니, 성장한 게 아니라 그냥 자괴감 때문이었어? 그래서 내게 기대면 안 될 것 같아서 의젓하게 군 거야?!"

"그런 거 아니다. 진정하고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다오."

세르펜스를 향한 것인지, 녀석에게 의지하며 위로받은 나를 향한 것인지 모를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일단은 녀석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화를 내는 건 그 이후로도 늦지 않으니까.

"얘기해 봐."

"선우는 2회차의 나에게 무서움을 느낀 적이 있는가? 참고로 나를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상실에서 온 두려움이 아니라, 그냥 순수한 공포심을 말하는 거다."

"전혀 그런 적 없어, 2회차의 너도 너니까. 예전에 암흑가에서도 말했잖아? 내가 너를 무서워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다시는 세르펜스가 허튼 생각하지 못하게끔, 나는 녀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선언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녀석은 회한이 서린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선우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무섭지 않다고 말해주는 건 고맙고 기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이 선우를 한계로 몰아간 거라고 생각한다. 무서워해야 마땅한 존재를 무서워할 수 없으니, 상대를 애착 관계에 놓아 친근하게 느끼며 아끼게 된 것 아닌가?"

"설마 내가 너를 소중하게 여기는 게 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내가 처음에는 너를 조금 무서워하긴 했어. 그런데 그건 너에 대해 자세히 알기 전이야."

"확대 해석하지 마라. 그저 2회차의 나를 대하는 선우의 태도에 관해 말했을 뿐이다."

세르펜스의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껏 녀석에게 심어준 자신감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줄 알고 완전 식겁했다.

그런 게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자신을 무서워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듯한 녀석의 말은 여전히 못마땅했다.

"그렇게 눈썹을 찡그리며 기분 나빠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라. 그 시기의 나는 부단히도 선우를 괴롭혔잖은가? 심지어 이성이 날아가 기억에 공백이 생길 정도로, 선우의 감정을 멋대로 휘두르기까지 했다. 선우는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나?"

그랬다. 그래서 보좌관 모임에서 나도 모르게 마약을 복용할 뻔했다는 얘기를 뒤늦게 듣고, 덜컥 겁먹은 적도 있었다.

신성력으로 정신을 안정시키는 것도 비슷한 이유로 꺼렸고.

'그런데 이성을 잃다 못해 기억의 공백까지 생기는 건···.'

당시에는 기억을 제대로 못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아찔했다.

술을 자주 마셔 필름이 끊기는 경험이 자주 있었다면 괜찮았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진짜 몸은 알쓰라서 술을 조금만 마셔도 그대로 곯아떨어졌고, 시온의 몸은 주정을 부릴지언정 필름은 안 끊겼다.

그래서 그런가 조금. 아주 조금 그 기억의 공백이 무서워졌다.

기껏 해봐야 타락펜스가 질문을 던지면 나는 대답을 하는 것의 반복이었을 텐데도.

"더구나 사람을 죽이도록 강요당하기도 했지."

"······."

"그런 짓을 당하면 조금이라도 두려움을 느끼는 게 당연하건만, 선우는···. 그런 존재에게 애정을 베풀며 웃어주었다. 이게 과연 정상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것 봐라. 대답하지 못하잖은가?"

나와의 언쟁에서 승기를 거머쥐었음에도 세르펜스는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 내 표정 또한 크게 다를 바 없으리라.

그런 나를 바라보며 세르펜스가 쓴웃음을 머금고 손을 슬그머니 거두려 했다. 절대 그렇게 둘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내게 너를 무서워하라고는 말하지 마. 다른 사람을 의지하더라도, 나의 가장 큰 버팀목은 너니까···. 내게서 너를 빼앗아 가려 하지 마···. 나조차도 깨닫지 못했을 정도로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공포심을 끄집어내 놓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나는 떨어지려 하는 세르펜스의 손을 덥석 잡아채며 소리쳤다.

너무 무서웠다. 타락펜스가 내게 했던 짓들이, 내 곁에 세르펜스가 없었던 그 시간이.

그 둘 중에 무엇이 가장 무섭느냐 묻는다면 단연코 후자다.

당연하다. 세르펜스가 있었다면 나를 지켜줬을 테니까.

이 녀석만 곁에 있으면 나는 두려울 게 없다.

일행들에게 의지하는 건 의지하는 거고, 그러는 동안에도 세르펜스는 내 곁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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