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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904화 (904/925)

<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12) >

* * *

어젯밤 세르펜스는 내가 잠들 때까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도닥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장가를 대신하여 다정한 말들을 끊임없이 속닥거리기까지 했다.

어쩌면 녀석은 내가 잠든 이후로도 한참 동안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고 나서야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덕분일까?

나는 실로 오랜만에 평온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날이 밝고 스르륵 잠이 물러가기 시작했을 무렵. 불현듯 떠오른 어떠한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눈을 뜰 수는 없었다.

지난 한 달여간 늘 그래 왔듯이, 오늘도 타락펜스가 광기 어린 시선으로 나를 빤히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 불안했다.

타락펜스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휴마누스가 각성하고, 돌아온 세르펜스가 어른스러운 태도로 나를 위로해 준 일까지.

그 모든 것이 내 간절함에서 비롯된 꿈일까 봐 두려웠다.

그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잠들고만 싶다.

"선우, 괜찮으니 눈을 떠도 된다. 이제 그대의 곁에는 내가 있으니."

나긋나긋하고 보드라운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어깨를 도닥거리는 상냥한 손길도 느껴졌다.

자연스레 눈이 번쩍 뜨였고, 마주한 상냥한 눈빛에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꿈이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은 꿈이 아니라 바로 어제,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세르펜스···?"

"그래, 나다."

"···아도르."

"맞다, 당신의 유일한 아도르다."

"정말로?"

"아직 잠이 덜 깼나 보군.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일어나라."

옆에 나란히 누워있던 세르펜스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팔을 잡아당겨 나를 일으켜 앉혔다.

그러면서 녀석이 내보인 다정한 미소에 울컥 눈물이 샘솟았다.

정말로 긴 시간 나와 함께했던 그 세르펜스가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나서.

우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세르펜스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쳐 주며 물었다.

"바로 일행들을 보러 가겠는가? 아니면 진정된 후에?"

"조금만···, 기다려 줘."

나는 소매로 눈물을 쓱쓱 문질러 닦은 후 심호흡을 하여 울음을 진정시켰다.

눈가가 붉어졌을 게 뻔했으나 세르펜스에게 치료해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다.

어제저녁 세르펜스와 얘기를 나누며, 지금 내 상태를 받아들이고 일행들에게 숨기지 않기로 했으니까.

결심을 굳히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려 신발을 신자, 세르펜스가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나 녀석과 함께 천막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중천에 떠오른 해가 뜨거운 열기를 발산한 까닭에 눈이 부셨다.

나는 한 손을 이마에 갖다 대서 작은 그늘을 만들어 햇빛을 가리며 주변을 살펴 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선우가 깨기 전에 휴마누스가 와서, 옆 천막에서 식사 준비를 해 놓고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고 갔다."

"그럼 안대를 하고 가는 게 좋으려나?"

"휴마누스의 말에 의하면 에드나 씨가 고기를 잘 감춰 두었다고 한다. 그러니 선우가 가죽 안대를 쓰려고 하거든 말려 달라고 하더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에드나가 음식을 만들었나 보다.

에드나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요리를 자주 해 주었으니, 아이들이 싫어하는 당근이나 피망 등 특정 채소를 몰래 먹이는 데 능숙할 터.

같은 방법으로 고기도 얼마든지 숨길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굳이 답답한 안대를 쓸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안심하고 세르펜스와 함께 옆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 안에 들어서자 자극적인 바비큐 소스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키고 있으려니, 먼저 식탁에 둘러앉아 우리를 기다리던 일행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모두의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담겨 있었으나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드니까, 뭐라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게다가 시끄럽기까지 하다.

나는 진정하라는 손짓과 동시에 '자! 조용, 조용!' 하고 외쳐,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한 뒤 그들을 쭉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덩치도 덩치이거니와, 주군인 세르펜스를 맞이하느라 혼자 자리에서 일어난 윈스톤이었다.

윈스톤은 일행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놀고 있어도, 진짜 바위라도 된 것처럼 묵묵히 우리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랬던 그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말을 꺼내다니.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윈스톤에게 먼저 발언권을 준다 한들, 불만을 품을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윈스톤이 일어나 있으니까 먼저 말 해봐요. 방금 뭐라고 하셨는지."

"···세르펜스 님께 다시 돌아오시길 기다렸다고 말했소. 그리고 선배의 안색이 어제보다 나아 보여 다행이라는 말도 했소."

윈스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많고 많은 인원 중, 자신에게 먼저 발표를 시킨 게 불만인가 보다.

부럽다는 눈빛을 보내는 유지스를 보며 자랑스러워해도 좋으련만.

'그보다 어제보다 안색이 좋다고? 나 방금 울다 왔는데?'

잠시 그런 의아함이 떠올랐으나 금세 사라졌다.

어제는 눈물조차 닦지 않은 데다가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으니, 지금이 훨씬 나아 보이는 것도 당연하리라.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는 손가락으로 유지스를 가리켜 발언권을 넘겼다.

"세르펜스와 선우, 둘 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고 말했어요!"

유지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상큼하게 외쳤다.

타락펜스와 싸울 때 큰 부상을 당했는데도, 유지스의 밝은 표정에서는 세르펜스를 꺼리는 기색이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건강에도 문제가 없어 보이고.

참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음식을 만드느라 애써 준, 에드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전 어제 선우 씨랑 얘기를 나눈 터라 별말은 안 했어요. 그냥 와서 앉으라는 얘기밖에 안 했는데···."

에드나가 머쓱하게 웃으며 비어있는 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배려를 받아들일 겸. 얘기가 나온 김에 일단 앉고 나서 다른 일행들의 얘기를 마저 들어봐야겠다.

나는 세르펜스와 함께 모래로 이루어진 의자에 앉았다. 에드나 혹은 아니마가 마법으로 만든 걸 테다.

우리가 의자에 앉자 그제야 윈스톤도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에드나의 옆에 앉은 사람에게 눈길을 던졌다.

"나도 언니가 '아~!' 하고 먹여 줬으니까 우쭐대지 마! 괜한 오해도 하지 말고!"

질투에 눈이 먼 아니마가 헛소리를 해댔다.

대관절 내가 언제 우쭐댔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오해는 또 뭐람?

그냥 무시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얘기를 마저 듣는 게 좋겠다.

"선우의 상태는 좀 어떠냐고 세르펜스를 향해 물어봤어."

"다시 두 분을 뵙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어요."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듣고 싶지만, 시간도 많으니 일단 배부터 채우고 얘기를 나누자!"

휴마누스, 리에나, 푸로르가 순서대로 아까 했던 말을 다시 입에 담았다.

모두의 목소리를 한 번씩 듣고 나니 괜히 목이 메었다.

타락펜스와 함께하던 지난 한 달여간, 세르펜스를 걱정하느라 이들 생각은 거의 못 했었는데.

참 그립고도 반가웠다.

정말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일행들을 눈앞에 두고 나서야 그리움이 밀려든다는 게.

나는 물을 들이켜 목을 축인 뒤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시 이렇게 모여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니 진짜 너무 좋네요!"

"···다시는 우리 언니 걱정시키지 마."

헛소리를 했던 아니마가 뒤늦게 사람 말 같은 소리를 입에 담았다.

에드나를 걱정시키지 말라는 얘기였지만, 나와 세르펜스를 바라보는 아니마의 눈빛에 희미한 걱정과 반가움이 어렸다.

솔직하지 못한 성격 탓에 내색하지 않았을 뿐. 아니마도 우리를 걱정했나 보다.

"그럼 선우 씨와 세르펜스 님도 오셨으니 식은 음식을 다시 데울게요!"

에드나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아니마를 바라보며 마법진을 그렸다.

완성된 마법진이 발하는 푸른 빛이 스며들자, 음식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며 맛있는 냄새를 더욱 진하게 풍겼다.

"그냥 먼저 드시지···."

"저희가 오랜만에 다 같이 식사하고 싶어서 기다린 거니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맞아, 맞아! 사실 만들면서 몇 개 집어 먹기도 했거든! 하하하!"

미안해하는 내게 에드나는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지 말라 했고, 뒤이어 푸로르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부담감을 덜어줄 말을 덧붙였다.

오늘 식사는 에드나 혼자 만든 게 아니라 그녀의 지휘하에 여럿이 함께 만들었나 보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접시에 담긴 음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바비큐 소스 위에 양배추 말이가 열 개가량 올려져 있었다. 무슨 고기를 양배추 안에 꼭꼭 숨겨 놓았는지는 먹어 봐야 알 것 같다.

양배추 말이에 바비큐 소스를 잘 묻혀서 한입에 넣고 씹어 보았다.

고기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채소들도 함께 다져서 넣은 것 같다.

그래도 고소한 기름기가 입안에 퍼져서, 돼지고기가 들어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어제는 소고기를 먹였으니 오늘은 돼지고기를 먹이겠다는 건가?

에드나의 놀라운 계획성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돼지고기 양배추 말이를 세 개 정도 먹고 나자 어느 정도 허기가 가셨다.

이제 슬슬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얘기로 스타트를 끊어야 할지 모르겠다.

물을 마시며 고민하다가 그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주제 삼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상으로도 이게 가장 빠른 사건이기도 하고.

"아 참! 에드나 씨, 어제 제가 고기를 못 먹게 된 이유에 관해 얘기했잖아요. 기억해요?"

"네. 2회차의 세르펜스 님께서 선우 씨의 비위가 약하다는 것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여, 잔인한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시게 되었다고 했었죠?"

"사실 그거 거짓말입니다. 제가 비위 약한 거 알고 그 녀석이 일부러 그런 거예요. 겁먹은 저를 달래며 자신에게 의지하게끔 유도하려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엑?!'이라든가 '네엣?!', '어···?', '뭐?!', '예?' 등등. 다양한 간투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성격에 따라 그 소리는 다양했지만, 일행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들 너무 크게 놀라서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부러 그랬다는 것까지만 얘기해 놓고, 일행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줄 걸 그랬다.

그럼 이런저런 이유를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완벽한 정답을 맞히는 사람도 몇 명 나왔을 것 같기도 하고.

"그, 그런 무거운 얘기를···. 무슨 돼지고기 양배추 말이를 먹다 말고 해···?"

"그냥 고기를 먹다 보니까 생각나서?"

"······."

"어제 휴마누스가 괜찮은 척하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하래서 그렇게 했을 뿐인데. 그런 반응을 보이면 저 서운합니다?"

"미, 미안···."

내가 토라진 척 볼멘소리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장난스레 내뱉자, 휴마누스가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진심으로 사과해왔다.

눈치 없는 휴마눈새답게 장난이라는 걸 눈치 못 챈 모양이다.

사과를 건네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하여 장난이라고 말도 못 하겠다.

"알면 됐어요. 그건 그렇고 휴마누스. 제가 2회차의 세르펜스와 지내면서 매일 묶였다는 거 일행들에게 얘기 했···. 아, 아니다. 대답 안 해도 됩니다. 일행들 반응 보니 알겠네요."

당연히 얘기했을 줄 알고 확인차 물어본 거였는데.

휴마누스와 세르펜스를 제외한 모두의 낯빛이 아연하게 질린 것으로 보아, 말 안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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