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17) >
"저는···, 그저 보고를 올렸을 뿐입니다."
윈스톤이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장비품이 망가졌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가, 차후 전투가 일어났을 때 봉변을 당할 수 있으니 보고가 필요한 건 맞긴 하다.
하지만 단순한 보고를 올리는 것치고 윈스톤의 태도는 지나치게 송구스러워 보였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바스툴 왕국의 뭐시기 백작 밑에 있을 때, 하사품···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고. 비품을 망가트렸다가 혼난 적이 있기라도 한 걸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나는 마음이 짠해져 윈스톤에게로 다가가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세르펜스도 슬금슬금 다가와서 나를 따라 했다.
윈스톤은 차마 주군인 세르펜스와 녀석이 따라 하는 대상인 나를 떼어놓지 못했다.
그저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길 바라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그런 그의 태도가 마치 벌이라도 감내하는 듯 보였다.
"윈스톤 경. 망가진 장비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르펜스가 토닥토닥 놀이를 마치고 손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그 얘기에 나는 다시 망가진 검과 갑옷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르펜스가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실은···. 완성된 윈스톤 경의 검을 보고, 그것을 제작한 드워프 장인에게 검을 한 자루 더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갑옷은 아예 의뢰를 넣을 때부터 두 개를 제작해 달라 했습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도 대체 언제 그런 의뢰를 넣은 거냐고 따져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체 남의 눈을 피해 무언가를 하는 데 도가 튼 녀석이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니까.
"혹시 언젠가 제가 장비를 망가트릴 것을 대비하여 예비용을 준비해 주신 겁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윈스톤 경은 검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인지라 이제껏 말하지 못하였지만, 사실 저는 경의 검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예? 어째서···입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세르펜스의 말에 윈스톤이 두 눈을 끔벅거렸다.
머릿속이 의문투성이인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세르펜스가 제 아공간 주머니에서 새 검과 갑옷을 꺼낸 순간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녀석이 어째서 크레아토가 만든 윈스톤의 검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검과 갑옷을 하나씩 더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는지.
"윈스톤 경도 아시겠지만···. 경께서는 이전의 두 회차에서 악숭 세력에 이용당하며, '흑기사'라는 이명으로 불리셨잖습니까. 그리고···, 투기장에서도 검은색과 관련된 이명이 붙었고···. 완성된 흑색의 검을 본 순간 그 사실이 떠올라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하다못해 갑옷만이라도 다른 색으로 준비해 드리고 싶었으나, 검과 갑옷의 색상이 다르면 짐짓 우스꽝스러워 보일까 걱정이 되어서···."
세르펜스가 은색으로 빛나는 검과 갑옷을 앞에 두고 그리 말했다.
망가진 장비와 디자인은 똑같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그냥 두고 봐도 이러하니 착용하면 훨씬 큰 차이를 보이리라.
그 누구도 윈스톤을 두고 '흑기사'니, '검은 투사'니 하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겠지.
이런 부분까지 세르펜스가 신경 써 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걸까?
윈스톤이 멍한 표정으로 은빛의 검과 갑옷에 시선을 고정하며 멀뚱멀뚱 서 있기만 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장난스레 말했다.
"이야~! 윈스톤, 주군 진짜 잘 만나셨네요! 기사가 패션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지 않도록, 깔 맞춤까지 고려해 주는 주군이라니!! 세상에 이런 주군은 세르펜스 말곤 또 없을 겁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세르펜스 님."
드디어 윈스톤이 정신을 차리고 세르펜스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보통 감격한 게 아닌가 보다.
하기야 제삼자인 나만 해도 살짝 감동적인데 윈스톤은 오죽할까?
더구나 은색은 세르펜스의 신성력과 똑같은 색이었다. 동시에 '프라시더스 가문'의 기사들이 착용하는 정규 장비의 색이기도 했다.
이제 프라시더스 가문의 기사들 사이에서 윈스톤이 돋보일 수는 있어도, 눈에 거슬릴 정도로 따로 놀지는 않으리라.
"이만 일어나십시오, 윈스톤 경."
세르펜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윈스톤이 빠릿빠릿하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군이 저를 챙겨준 것이 기꺼운지 윈스톤의 표정이 더없이 기뻐 보였다.
"그건 그렇고 망가진 저것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녹여서 고철로 판매한다면 돈이 꽤 될 터인데···."
"그냥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망가진 검과 갑옷을 가리키며 세르펜스가 내다 팔겠다고 말하자, 윈스톤이 재빨리 답하며 그것들을 챙겼다.
더 이상 제 기능은 못 할 터이나 형태는 망가지지 않았으니.
나중에 방에다 장식해 둘 생각인가 보다.
"어째 나만 자리를 비우면 재밌는 일이 일어나는 것 같단 말이야?"
잠시 후 씻고 나온 휴마누스가 은색의 검과 갑옷을 힐끔 쳐다보며 농담조로 말했다.
장난기와 아쉬움이 반반 섞인 목소리다.
윈스톤을 놀릴 목적으로 말을 꺼내긴 했지만, 재밌는 광경을 놓친 게 내심 아쉬운가 보다.
* * *
다시 날이 밝아왔다.
나는 어제처럼 세르펜스의 목소리를 기상 알림 삼아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 그 순수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안도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침대에서 기어 나와 씻고 막 옷을 갈아입었을 무렵.
다른 집에서 묵었던 여성 일행들이 도시락을 들고 찾아왔다. 그들의 말을 듣자하니 오늘도 에드나가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다는 모양이다.
하다못해 내가 육류를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도시락을 까먹거나, 그냥 다 같이 돌아가면서 식사 당번을 맡았을 텐데.
괜히 에드나에게 부담을 준 것 같아서 고맙고도 미안했다.
"식사 준비를 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유지스에게 부탁해서 바람의 정령으로 우리를 불러 달라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만일 다른 음식을 준비했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오늘은 간단히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는 걸 만들었거든요. 그냥 포장한 김에 들고 온 거니까, 딱히 손이 더 가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에드나가 부담 갖지 말라는 투로 말하며 식탁 위에 도시락통을 펼쳐 놓았다.
뚜껑이 열리자 보인 것은 종이로 곱게 말린 원통형 무언가였다.
포장이라길래 뭔 소린가 했더니 이런 얘기였나 보다.
"그런데 여기에도 고기가 들어간 거죠? 먹다 보면 단면이 보일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요? 눈을 감거나 허공을 보면서 먹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안 그래도 그 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닭가슴살은 괜찮지 않을까요? 익혀 놓으면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얀 게, 딱히 징그러워 보이지는 않잖아요."
듣고 보니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내가 혹한다는 표정을 짓자, 에드나가 작은 통을 하나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통 안에는 작게 찢어 놓은 닭가슴살이 들어있었다.
그 내용물을 내가 인식하기 무섭게 에드나는 뚜껑을 잽싸게 닫아버리며 물어왔다.
"어때요? 혹시 속이 매스껍거나 하진 않아요?"
"음···, 괜찮네요···?"
"정말요? 다행이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선우 씨가 진작에 시도해 봤다가 실패한 방법이었을까 봐 내심 걱정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에드나가 다시 통의 뚜껑을 열었다.
어서 닭가슴살을 집어가서 먹어 보라는 듯한 행동이다.
과연 먹어 보니 닭가슴살답게 퍽퍽하다. 그래도 간은 잘 배어 있어서 먹을 만했다.
'닭고기를 먹어 볼 생각을 내가 왜 못했지?'
고기 종류면 무조건 못 먹을 거라고 생각해버렸다.
타락펜스와 함께하는 동안 내가 정말 정신이 없긴 없었나 보다. 생각이라는 걸 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어쩐지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나는 에드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케밥을 하나 집어 들고 종이 포장지 한 쪽 끝을 뜯었다.
혹여 내가 닭고기에 거부 반응을 일으킬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는지, 또띠아가 꼼꼼하게 잘 말려 있어서 내용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크게 한 입 베어 물자 여러 재료가 한꺼번에 씹혔다.
살짝 질깃하면서도 담백한 또띠아와 살짝 씁쓸한 듯 싱그러운 루꼴라, 짭짤하게 간이 배어든 닭가슴살.
그리고 닭가슴살 특유의 퍽퍽함을 잡아주는 수분 가득한 토마토까지.
꼭꼭 씹어먹다 보니 살짝 매콤한 맛도 나는 게, 살사 소스도 잊지 않고 또띠아에 발라 놓았나 보다.
"세르펜스는 괜찮아?"
"음?"
불현듯 매운 것을 못 먹는 세르펜스의 아기 입맛이 떠올라 괜찮으냐고 물으니, 녀석이 말긋말긋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이 드디어 매운 걸 먹을 수 있게 된 건가 기대가 고개를 들던 그때.
"아! 세르펜스 님의 케밥에는 토마토소스를 넣었어요."
에드나가 지나가는 투로 감사한 얘기를 꺼냈다.
내 단백질 섭취에 이어 우리 애 입맛까지 신경 써 주다니 솔직히 말해서 엄청나게 감동했다.
이런 게 바로 육아 선배의 짬밥이겠지.
윈스톤이 나를 선배라 부르는 것처럼 나도 에드나를 선배님이라 부를까 하다가, 그럼 윈스톤과 에드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싶어서 그만두었다.
'그보다 아니마의 얼굴에 고민이 가득해 보이는데 저대로 둬도 되는 거려나?'
참견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에드나의 시선이 힐끗힐끗 아니마에게로 향하는 걸 보고 그만뒀다.
애가 고민하는 걸 알면서도 놔둔다는 건 다 이유가 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관심을 끄고 내 손에 들린 케밥을 해치우는 것에 집중했다.
"에드나 씨 덕분에 오늘도 맛있고 배부르게 잘 먹었어요."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참! 선우 씨를 위해 준비한 게 한 가지 더 있는데···."
내가 빈 포장지를 구기며 감사 인사를 전하자 에드나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내게 등을 보이며 꼼지락거렸다.
곧이어 에드나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손바닥을 쫙 펼쳐 보였다.
"이거, 어때요?"
에드나의 말에 나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콩알만 한 무언가를 자세히 살폈다.
갈색에 동글 납작하게 생겼고 조금 딱딱해 보이는 게, 어떻고 자시고 그냥 개가 먹다 흘린 사료 한 알 같다.
"···이게 뭔데요?"
"휴─! 안색이 멀쩡한 걸 보니 이것도 괜찮은가 보네요. 제가 고기로 만들어 본 간식인데, 보기엔 이래도 꽤 먹을 만해요. 한번 드셔 보세요."
개 사료 같은 비주얼 때문에 망설여지긴 했지만, 나를 위해 직접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에드나의 성의를 받아들여 개 사료처럼 생긴 간식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내가 비록 개 사료는 먹어본 적 없지만, 개가 먹을 음식에 간을 강하게 하면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맛이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짭짤하니 꽤 괜찮다.
"틈틈이 입이 심심할 때마다 드세요."
에드나가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개사료스러운 간식이 잔뜩 들어있는 통을 떠넘겼다.
낱개로 보아도 무척이나 개사료 같았건만.
이렇게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걸 보니 개사료 그 자체다.
"어, 그게 그러니까···, 잘 먹겠습니다···? 그치만 지금은 너무 배가 불러서 이따가 배가 꺼지면 그때 먹을게요."
"꼭 드셔야 해요. 알았죠? 다 드시면 또 만들어 드릴 테니 말씀하세요."
내가 먹지 않을까 봐 걱정됐는지, 에드나가 몇 번이고 강조하며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