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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914화 (914/925)

< 89. 공작님과 식사 시간 (22) >

폭주 마인이 여럿 등장했다면 그만큼 기사와 성기사도 우르르 몰려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다. 현실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폭주 마인의 수가 많다면 그만큼 피해자의 수 또한 곱절이 될 게 뻔하다.

기사와 성기사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겠지.

그것을 알기 때문일까?

"너희 먼저 출발해, 나는 폭주 마인들을 처리하고 쫓아갈게. 싸우다 보면 성기사를 비롯한 지원군도 올 테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휴마누스는 그리 말하며 세르펜스가 열어놓은 창문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황금빛의 신성력 날개가 크게 펄럭이자, 휴마누스의 모습이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딱 한 명, 창가에 서 있던 세르펜스라면 휴마누스를 붙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래도 괜찮은 거려나···?"

푸로르가 창문 너머의 하늘에 시선을 둔 채로 혀를 내두르며 혼잣말을 했다.

그 목소리에 걱정 어린 기색이 은근히 묻어났다.

내가 2회차에 있었던 일을 모두에게 설명하며, 사람들이 모든 일을 휴마누스에게 떠넘겨 대륙에 망조가 들었다고 얘기한 탓이리라.

이번에도 그때처럼 될까 봐 불안한 걸 테다.

"고작 1분 간격으로 같은 장소에서 폭주 마인이 잇따라 생겨났으니, 누군가 한 명은 나서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르펜스가 차분한 음성으로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말했다.

정작 휴마누스는 그런 목적으로 폭주 마인이 나타난 장소로 향한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문제없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떠오른다.

나는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질문했다.

"세르펜스는 안 가도 돼···? 적이 여럿이라면 세르펜스도 같이 가는 편이 사람들의 안전을 확보하기도 좋을 거 아냐. 만약 함정이라면 휴마누스가 위험해질 수도 있고···."

"···여론적인 측면에서 휴마누스 혼자 사람들을 구했다고 알려지는 편이 더 낫다."

"글쎄,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오히려 악화하지 않을까? 게다가 휴마누스는 그런 여론 따위 신경 안 쓴다고 했잖아."

"그래도···."

"나 때문에 따라가지 못하는 거라면 괜찮아."

"······."

세르펜스가 말없이 내 시선을 피했다.

여론이 어쩌고 하는 말은 역시 변명에 불과했나 보다.

하기야. 자신이 휴마누스와 함께 문제를 처리하는 게, 시간도 단축되고 안전하며 피해까지 줄일 수 있다는 걸 녀석이 왜 모를까.

나를 힐끔힐끔 곁눈질로 살피는 세르펜스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서렸다.

"다른 일행들도 함께 있는데 뭘 걱정하는 거야?"

"정말로···, 괜찮겠는가?"

"그렇다고 이미 얘기했잖아? 얼른 가서 도와줘."

"으음···, 알겠다. 그 대신 먼저 출발하지 말고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라."

휴마누스가 폭주 마인을 처리하러 가면서, 우리에게 먼저 길을 떠나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세르펜스의 무력을 믿기 때문이다.

세르펜스까지 휴마누스를 따라나선 이상 무조건 신전에서 기다리는 게 안전하다.

다른 일행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두 사람이 빠진다면 전력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이 빠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푸로르와 윈스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세르펜스 한 명만 못하고, 든든하게 버텨줄 전위가 없으면 마법사든 궁수든 전력을 낼 수 없으니까.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었어. 빨리 가."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

망설이긴 했지만, 내 계속된 채근에 세르펜스는 결국 은빛 날개를 펼치며 창 밖으로 날아갔다.

악마가 소환된 곳으로 향하는 여정이 잠시 지체되긴 했지만, 뭐.

폭주 마인이랑 싸우는 데 몇 날 며칠이 걸리지는 않을 테다.

오래 걸려 봤자 하루 이틀 잠을 조금 덜 자면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수준이리라.

'별일은 없겠지···?'

어제 하인델 주교가 말하길 폭주 마인은 일반 마인보다 능력치가 떨어진다고 했다.

그뿐이랴? 전투에 미숙한 데다가 이성까지 없다고 했다.

더군다나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가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머나먼 곳에서 악마가 막 소환된 참이다.

사막의 악숭 거점에서 소환된 상급 악마를 처치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그러니 싸우러 간 두 사람에게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의 악마가 바로 소환될 일은 없을 터.

'알고는 있는데···.'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모종의 사건이 생겨서 세르펜스가 또다시 성검을 잡게 되는 건 아닐까?

그래서 휴마누스 혼자 돌아오면 어쩌지? 아니면 또다시 타락펜스가 튀어나와서 나를 납치해 버리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세르펜스가 나간 지 몇 분이나 됐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녀석을 등 떠민 사람은 다름 아닌 나다.

그러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보내 놓고 이제 와서 후회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시온,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귓속을 파고드는 유지스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창문 너머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일행들을 쭉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걱정스럽다는 눈치다.

"당연히 괜찮고 말고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

너스레를 떨어봤으나 이미 늦었나 보다.

그렇구나 하며 대꾸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세르펜스에게 얘기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볼까, 순간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유지스가 은근슬쩍 세르펜스에게 얘기를 흘리겠지.

그렇다고 내 상태에 관해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하면, 윈스톤이 내 눈앞에서 대놓고 세르펜스에게 보고를 올릴 게 뻔하다.

어느 쪽이 더 문제냐 묻는다면 단연코 후자다.

세르펜스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안색이 나빠진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걸 녀석에게 숨기려는 시도까지 한 셈이니까.

"어···, 음···.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도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는데 제가 왜 이럴까요?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해진다던데, 그래서 자꾸 불길한 생각만 떠오르나 봅니다. 아하하···."

"그럼 체력 단련을 다시 시작하겠소?"

"일단은 에드나 씨가 만들어 준 수제 간식을 부지런히 먹어서, 건강부터 어느 정도 되찾고! 단련은 그다음으로 합시다!!"

"흐음···, 알겠소."

윈스톤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참 건강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 착잡함을 삼키며 에드나가 만든 특제 개사료···처럼 보이는 간식을 꺼냈다.

서너 알 집어서 입에 넣으니 오독오독 씹는 맛이 있다.

"근데요, 에드나. 이거 어떻게 만든 겁니까?"

"고기를 곱게 으깨서 짤주머니에 넣어, 콩알만 한 크기로 짠 것을 마법으로 동결건조한 뒤. 한 번 구워서 과자 같은 느낌을 내 봤어요."

에드나가 친절하게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도대체 이 개사료 같은 식감이 어떻게 탄생한 건지 먹으면서도 늘 궁금했었는데, 비로소 의문이 해소되었다.

과자 같은 느낌을 내 봤다는 말을 듣고 다시 먹어보니, 진짜로 고기 맛이 가미된 과자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냥 작게 잘라서 굽기만 했으면, 묵직한 포만감이 금방 차올라 많이 먹지도 못했으리라.

지금처럼 가볍게 손으로 집어 먹을 수도 없어서 불편했겠지.

반면에 지금은 씹는 맛도 좋고 식후에 꺼내 먹어도 속이 부담스럽지 않다.

오독오독오독, 고기 과자를 한 알씩 집어 먹으며 저작 운동에 집중하던 도중.

나는 뒤늦게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려있다는 것을 눈치챈 건 그다음이다.

"구경나셨습니까?"

"그런 건 아닌데···. 혹시 물리지는 않으세요? 제가 살짝 매콤한 치즈맛 시즈닝을 만들어 봤는데, 괜찮으시다면 조금 뿌려 드릴까요?"

에드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작은 조미료 통을 하나 꺼내며 말했다.

다른 일행들은 그냥 내가 걱정이 돼서 쳐다보고 있던 것 같은데, 에드나는 거기에 더해 언제 시즈닝 얘기를 꺼내야 하나 눈치를 보고 있었나 보다.

투명한 통 안에는 주황색이 도는 가루가 담겨 있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과자가 든 통을 에드나를 향해 내밀었다.

톡 톡, 에드나는 시즈닝 가루를 딱 두 번만 뿌린 후 그것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기 과자를 한 알 집어서 먹어 보았다.

눈 앞에서 가루를 뿌리는 걸 봐서 그런가, 치즈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매콤한 맛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시즈닝을 더 많이 뿌려야 치즈 냄새든 매운맛이든 뭐든 날 것 같다.

내일은 세 번 뿌리고 모레는 네 번 뿌리는 식으로 조금씩 양을 늘려나가야겠다.

아침 식사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생각보다 금방 배가 찼다. 과식도 몸에 안 좋으니 이제 슬슬 그만 먹어야 겠다고 생각하며 간식 통을 덮을 즈음.

- 탁.

창가 쪽에서 작고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

급하게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은빛의 신성력 날개를 회수하는 세르펜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맑은 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한 순간 반가운 마음이 훅 밀려들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세르펜스!!'하고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세르펜스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세르펜스가 별 탈 없이 돌아온 게 기뻐서···. 아하하···."

뒤늦게 머쓱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세르펜스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안색을 살피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이다.

나는 말을 돌리고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다른 화젯거리를 찾다가, 마침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아 참! 놈들 수는 몇이나 됐어? 갑자기 폭주 마인들이 잇따라 생겨난 이유는 또 뭐고?"

"마인의 수는 여섯이었고 이유는 휴마누스가 알아올 거다."

그러고 보니 휴마누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세르펜스는 내가 걱정되어서 정황을 알아보는 건 휴마누스에게 맡기고, 폭주 마인만 처치한 뒤 먼저 돌아왔나 보다.

눈치 없는 휴마누스보다 세르펜스가 조사를 훨씬 더 잘할 게 뻔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만약 휴마누스가 혼자서 먼저 돌아왔다면, 지레 놀라서 심장이 덜컥했을 게 뻔하니까.'

어차피 현장에 출동한 성기사들도 어찌 된 일인지 조사에 착수할 테니까.

휴마누스는 그 얘기를 듣고 오기만 해도 정보를 건질 수 있으리라.

"그럼 우리는 천천히 이동하고 있을까요?"

나는 일어선 김에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직까지 앉아있던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고 우리가 곧장 그 길로 신전을 나선 건 아니었다. 갈 길이 바쁘다고 해서 말도 없이 떠나는 건 예의에 어긋나니까.

'겸사겸사 악마가 소환된 장소에 관해서도 얘기해야 하고.'

간식을 한 알씩 집어 먹으며 멍 때릴 게 아니라 주교를 만나서 대화를 나눌 걸 그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지스는 이 생각을 떠올렸을 것 같은데, 어째서 의견을 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려 애쓰며 일행들과 함께 하인델 주교를 만나러 갔다.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도 아니고, 세르펜스가 악마 소환 장소를 감지했다는 얘기를 사실대로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세르펜스가 알려준 것을 룩스메아의 계시라고 둘러대야만 했다.

다행히도 하인델 주교는 내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북동쪽에서 악마가 소환되었다는 계시가 내려왔다고요? 과연 시온 님! 아, 하지만 이곳에서 북동쪽이면···."

"네. 범위가 엄청 넓죠. 저희는 악숭 세력이 일부러 이곳에서 가장 먼 곳. 프뤼네 왕국에서 악마를 소환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끄응, 프뤼네 왕국이라니···. 가시는 길에 신 룩스메아 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주교님의 앞날에도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길 바라요."

우리는 그렇게 하인델 주교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신전을 벗어나 길을 떠났다.

도시를 벗어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휴마누스가 우리와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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