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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회개해주세요!-917화 (917/925)

< 90. 공작님과 마인들 (3) >

"그럼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다시 돌려주러 갔다 올게."

"아! 휴마누스, 잠깐만요."

나는 뒤칸으로 넘어가려는 휴마누스를 불러 세웠다.

현재 성검 일행의 아공간 주머니를 관리하는 건 리에나다.

얼마 전까지는 아니마가 아공간 주머니 제작을 연구한다며 가지고 다녔지만, 이제는 손에서 완전히 놓아버린 까닭이다.

한동안 에드나와 합동 마법을 개발 및 개선하느라, 아니마는 당장 필요하지 않은 아공간 주머니 제작을 후순위로 미뤄뒀다.

그런 와중에 이제는 마음가짐 자체를 달리 먹었다.

근본적인 마법 실력 자체를 끌어 올리며, 전투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마법 개발에 착수하겠노라 선언했다.

그리하여 아공간 주머니가 리에나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응? 왜?"

"다른 짐들이야 그렇다 쳐도, 용사의 무구는 급하게 꺼내어 착용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걸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건 역시 좀 그렇지 않아요?"

휴마누스는 성검 일행 중 유일한 남자인지라, 다른 일행들과 떨어져 있을 때가 종종 있다.

가끔 정찰과 같은 개인 임무를 맡기도 하고.

아공간 주머니가 아예 없어서 짐을 몽땅 들고 다녀야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짐이 남에게 있으면 불편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제라도 휴마누스에게 개인용 아공간 주머니를 챙겨줘야 할 성싶다.

"갑옷이랑 방패를 전부 짊어지고 다니는 건 너무 불편한데···."

휴마누스가 축 처진 표정을 지으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도로 용사의 무구들을 꺼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짐가방도 꺼내어 내용물을 하나둘 바닥에 펼쳐놓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가방을 비워서 그 안에 용사의 무구를 넣고 다닐 생각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내가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꺼냈는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대륙에 평화가 찾아올 때까지, 제 아공간 주머니를 빌려 드리겠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건데요?"

"어, 정말로?!"

"뭐···?"

내 말에 휴마누스는 놀라워하며 반가운 기색을 내보였고, 세르펜스는 어째서인가 충격에 휩싸여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세르펜스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으려던 그때.

녀석은 마치 열이라도 재는 듯 내 이마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양손으로 내 얼굴을 붙들고 물끄러미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 아이 컨택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이상하군. 아픈 것 같지도 않고, 제정신으로 보이는데···. 선우만 괜찮다면 신성력으로 정밀 검사를 해 봐도 되겠는가?"

"나 지금 완전 멀쩡하거든?"

나는 세르펜스의 손을 떼어내며 톡 쏘아붙였다.

큰맘 먹고 좋은 일 좀 하려는데 아파서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당할 줄이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내 심정도 모르고 세르펜스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아공간 주머니를 꼭 갖고 싶어 했고, 누구보다 잘 활용하고 있잖은가?"

"얘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난 이걸 쓰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며 나는 세르펜스의 품속에서 녀석의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어차피 나는 늘 세르펜스와 붙어 다니니, 아공간 주머니를 같이 써도 크게 불편한 점이 없다.

게다가 물건을 직접 꺼내기 귀찮을 땐 세르펜스가 대신 꺼내줄 테니까, 오히려 편한 점도 있다.

드디어 내 상태가 정상이라는 걸 받아들인 걸까?

세르펜스가 '아···.' 하고 탄성을 흘리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날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타락펜스가 다녀간 후로 더 심해진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럼 나도 이제 개인 아공간 주머니가 생기는 거야?"

"네, 네. 그러니까 본인 짐 다 빼놓고, 그 아공간 주머니는 리에나에게 돌려주고 오세요."

"알았어!"

휴마누스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아공간 주머니에서 침대와 침낭과 가방을 하나씩 꺼냈다.

그러고는 일지로 추정되는 공책 꾸러미를 꺼내 놓고 룰루랄라 뒤칸으로 향했다.

먼저 꺼내 놓은 가방 하나를 포함해도 짐이 참 조촐하기 그지없다.

'아공간 주머니의 관리를 다른 사람이 해서, 꺼내기 귀찮으니까 짐을 늘리지 않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원래 짐을 적게 가지고 다니는 성격이라면 매우 억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휴마누스의 짐에서 눈길을 떼고, 내 물건들을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로 옮기기 시작했다.

'세르펜스의 물건들을 옮기는 게 더 빠르겠지만···.'

녀석의 아공간 주머니 안에는 타락펜스가 넣어둔 악숭 살롱 물품이 들어있다.

그걸 꺼냈을 때 휴마누스가 목격하면 오해가 생길 테다. 그렇다고 꺼내지 않은 채로 휴마누스에게 넘겨주는 것도 괜히 찜찜하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 세르펜스는 마차도 한 대 가지고 다녔다.

기차 특실이 아무리 크고 넓어도 여기서는 절대 못 꺼낸다.

그리고 겸사겸사 세르펜스에게 내 물건들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도 컸다.

어떻게 생긴지 알아야 내가 필요한 것을 꺼내달라고 했을 때, 녀석이 척척 내놓을 수 있을 테니까.

추가로 세르펜스가 내 물건들을 전부 파악해 두면, 앞으로는 뭘 챙겼는지 일일이 메모해두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도 있다.

그렇게 이삿짐 정리하는 기분으로 아공간 주머니 속 물건들을 옮기길 몇 시간.

지루하고 지치는 반복 노동에 슬슬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냥 세르펜스의 것을 내 아공간 주머니 안에 옮겨 넣을걸···."

"이쯤 되니 궁금해져서 묻는 건데, 너 대체 안 가지고 다니는 게 뭐야?"

"핸드폰, TV, 컴퓨터···?"

"그게 뭔데?"

"있어요, 그런 게. 이 세상엔 없지만."

나는 휴마누스에게 없는 거 빼고 다 있다는 답변을 내놓고 반복 노동을 계속했다.

아공간 주머니는 다 좋은데, 한데 묶어놓은 게 아니라면 한 번에 한 물건만 꺼낼 수 있다는 게 크나큰 흠이다.

이제 그만 옮기고 나머지는 그냥 휴마누스에게 맡겨 놓을까 고민하던 그때.

"선우, 괜찮은가?"

"안 괜찮아, 귀찮아 죽겠어."

"그런 게 아니라···."

세르펜스가 방금 막 아공간 주머니 속에서 꺼내어, 내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톡톡 건드리며 말끝을 흐렸다.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녀석의 행동이 의아할 따름이다.

이 따끈따끈한 도시락통에 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고···.

"어···?"

순간 떠오른 어떠한 생각에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치즈 소스가 듬뿍 뿌려진 베이컨과 감자튀김이 눈에 들어왔다.

세르펜스가 무엇을 염려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그리고 더는 치즈 냄새가 역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이컨도 그냥 맛있어 보일 뿐이었다.

별생각 없이 맞닥뜨린 덕분이려나?

아니면 그동안 내가 먹는 음식에, 고기와 치즈를 슬쩍슬쩍 넣어 준 에드나의 노고 덕분일까?

내가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눈을 멀뚱거리고 있자, 세르펜스가 포크를 꺼내어 치즈 소스가 묻은 베이컨을 콕 찍어서 내 입에 넣었다.

"괜찮은가?"

"맛은 있는데 좀 느끼해. 치즈 소스에 다진 할라피뇨를 섞어 놓았으면 훨씬 맛있을 것 같아."

"다행이군."

내 반찬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르펜스는 활짝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옆에서 휴마누스도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잘 됐다며 축하해 주었다.

고작 음식 하나 먹은 거로 축하를 받으니 기분이 참 묘하다.

"곧 저녁 시간이니 어서 다른 일행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고, 다 함께 맛있는 것을 먹자···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잠시 미뤄야 할 것 같네."

휴마누스가 웃는 낯으로 말을 하다 말고,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 손잡이를 매만지며 창문을 여는 거로 보아 악숭이들이 가까이 있나 보다.

정말 마음 편히 쉴 틈을 안 주는구나 싶다.

"휴마누스, 적들 중 마인이 하나 있을 겁니다. 생포해 주십시오."

"응? 너는 안 싸우려고?"

"혹시 모르니 저는 이곳에서 선우를 지키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어차피 그리 강한 적도 아닌 것 같으니까."

휴마누스는 세르펜스를 향해 그리 답하며 황금빛 날개를 펼쳤다.

그러고는 얼른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곧이어 열린 창문을 통해 '쾅!' 하는 폭발음이 선명하게 들려오더니, 기차가 천천히 멈추어 섰다.

기차가 직접 공격받은 건 아닌 듯하고 철로를 망가트린 걸 테다.

"어휴, 저 철로 파괴범들! 또 저러네, 또!"

"걱정하지 마라. 모든 철로가 망가진 것도 아니고 중간에 살짝 끊어진 정도라면 해결 방법이 있으니."

세르펜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기야 우리에게는 마법사가 둘이나 있고 그중 한 명은 희대의 천재다.

마법으로 철로를 고치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지.

"그건 그렇고 마인은 왜 잡아오라고 한 거야? 정보를 캐물으려면 법숭이를 생포하는 게 낫지 않아? 마인은 계약에 묶여 있어서 말할 수 있는 정보에도 한계가 있고, 애초에 아는 것도 별로 없을 텐데."

"정보를 구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면?"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실험?"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세르펜스가 말한 단어를 그대로 따라 하며 의문을 제기했다.

악마와 계약하기는 했으나 사람을 잡아와 실험을 하겠다니.

자연스레 인체 실험이란 단어가 떠올라 인상이 찌푸려진 건 덤이다.

"마인은 계약을 통해 악마와 연결되어 있잖은가? 그 점을 이용하여 마계에 있는 악마에게 타격을 주거나, 아예 계약을 끊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게 가능해···?"

"나도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성검을 통해 신의 힘도 빌려 올 수 있는 마당에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확실히 그도 그렇다.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 같다.

악마에게 타격을 주는 거야 되든 안 되든 아무래도 좋다지만, 계약을 끊는 건 얘기가 다르다.

만일 가능하다면 엉겁결에 악마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가, 폭주 마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었을 무렵.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라. 계약을 끊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한정적이라면, 폭주 마인을 구제할 생각은 없으니."

"뭐? 어째서?"

"그자들을 죽일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이게 대체 무슨 무시무시한 소리인가 싶었지만, 나는 곧 세르펜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엉겁결에 악마와 계약하게 된 자들이 무고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가만히 놔두면 날뛰는 마기에 본인들도 괴롭고, 사람들이 죽어나가거나 또 다른 폭주 마인이 생겨날 테니까.

그런 명분을 들어 애도를 표하며 그들의 목숨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악마와의 계약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일단은 폭주 마인들을 생포하려 할 텐데 그러자니 더 많은 무력이 동원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다치거나 죽는 이가 생길 수도 있다.

게다가 계약을 받아들여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다들 폭주 마인이 되는 데 거리낌이 없어질 테다.

그럼 폭주 마인의 수는 엄청나게 불어나겠지.

그 많은 폭주 마인을 전부 생포하는 데 성공한다고 치자.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만약 계약을 끊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세르펜스 뿐이라면?

녀석의 몸은 하나뿐이니 생포한 폭주 마인들을 모아 놓아야 하는데, 대체 어디다가 그들을 모아 놓는단 말인가? 관리는 또 누가 하고?

심지어 세르펜스가 폭주 마인을 구제하러 다니면 전력에 엄청난 손실이 생긴다.

"···아예 시도조차 안 하는 게 낫지 않아?"

여러모로 생각해 본 결과,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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