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공작님과 마인들 (4) >
만약 세르펜스가 악마의 계약을 끊을 수 있게 된다면, 우리가 아무리 그 사실을 숨기려 해도 필연적으로 알게 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악마와 악숭이들이다.
그들이 그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폭주 마인을 구제하지 않는 세르펜스를 비난하겠지···.'
녀석 혼자서는 전 대륙에서 발생하는 폭주 마인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당장 가까운 지인이 폭주 마인이 되어 처단당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책임을 지는 건 자신과 상관없는 남이니까, 현실성 없는 이상적 잣대를 쉽게 들이미는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세르펜스가 불합리하게 비난을 당하는 일만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절대 두고 볼 수 없다.
지금 대륙이 악숭 세력의 위협에 흔들릴지언정.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안정적으로 버티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세르펜스니까.
'재앙이 예고되고 성검이 내려와 주인을 선택하기까지 25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이 안심하고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세르펜스가 모든 책임을 짊어진 덕분이고···.'
불현듯 자기 자신을 갈아 넣어 이 대륙을 지키려 했던, 그러나 불합리한 비난에 시달리다 외로이 죽어갔던.
끝내 죽고 나서도 평온을 얻을 수 없었던 1회차의 성검펜스가 떠올랐다.
지금은 나와 다른 일행들이 함께하기에 그때처럼 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싫다. 녀석이 듣지 않아도 될 비난을 듣는 건.
"선우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세르펜스가 폭주 마인을 구제하지 않더라도, 악숭이 놈들은 가짜 증인을 만들어서 소문을 퍼트릴 텐데."
"그럼 오히려 잘 된 일 아닌가? 숨어있는 악숭이들을 손쉽게 색출해낼 수 있을 테니."
"농담하자는 거 아니야."
"나도 농담한 거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들, 시도는 해 봤으나 실패했다고 공표하면 그만이다.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할 수 없다는데, 제삼자가 뭐라고 말을 더 얹겠는가?"
세르펜스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내 손을 잡아주는데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술렁이던 마음이 차츰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위험 부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대체 왜 그런 걸 시도하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는 있지 않나? 만약 내가 계약을 끊는 방법을 알아내고, 주교급만 되어도 그것을 행할 수 있다면 실용성은 충분하다."
"툭 까놓고 말해서 네가 악마의 계약을 끊을 수 있을 가능성은 꽤 있다고 봐.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도 추기경이나 교황도 아니고 주교급? 말도 안 되지."
방법을 알아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방법이 있어도 못 하는 사람은 못 한다.
타락펜스와 달리 휴마누스가 신의 힘을 자유자재로 빌려 쓰지 못하는 것처럼.
내가 부정적인 말을 내뱉자 세르펜스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렇다고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지워버릴 수는 없잖은가."
정말 예상치도 못한 말을 들어버렸다.
휴마누스도 아니고 세르펜스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대륙을 구하고자 노력하는 것과 별개로 녀석은 타인의 목숨을 경시하는 면이 있으니까.
전부 빌어먹을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의 영향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레 바뀔 줄이야.
"놀랐나?"
"어, 그게···."
"대체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느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로군."
"······."
"지금 이 순간부터 신경 쓸 생각이다."
혹시 이것도 신이 되려는 준비의 일환인 건가?
자신의 세례명인 '아도르'에 걸맞은 존재가 되고자, 타인을 아끼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거려나?
예전이라면 우리 애가 달라졌다며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텐데.
위기에 빠진 대륙을 구원하고자, 마왕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책임감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다.
선택의 날 이전, 녀석이 성검의 주인이 되고자 노력했던 그 시절을 반복하는 거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닫고 있자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게다가 '대사제'란 자는 마왕과 계약을 했잖은가? 만약 그자를 통해 마계에 있는 마왕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마왕은 뭐 가만히 앉아서 당해준대? 그쪽에서도 수를 쓰겠지. 네가 역으로 당할 가능성이 더 커. 그리고 무엇보다 2회차에서 대사제는 성검 일행과 직접 마주친 적이 없잖아. 이번에도 몸을 사리고 지내다가 마왕 소환을 직접 주관할 걸?"
"선우가 이렇게까지 부정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세르펜스가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기특하다며 칭찬이라도 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러는 게 맞는 거겠지.
하지만 녀석이 위험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면 결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선우는 나를 너무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이 나를 과보호하는 건 생각도 안 하고, 세르펜스가 내로남불을 시전했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내 행동이 불만스럽다는 듯 세르펜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처구니가 없다. 누구는 불만이 없는 줄 아나?
"과보호 소리가 나온 김에 한마디 할게. 나한테 눈에 띄는 문제가 있으니까, 다들 나를 걱정하느라 너를 자세히 살피지 못해서 그렇지···."
나는 문장을 온전히 끝맺지 않고 잠시 말을 멈췄다.
창문 밖에서 열려오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쾅쾅거리는 굉음과 악숭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이 들려왔다.
아직 전투 중인 듯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세르펜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세르펜스, 너도 나 못지않게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잖아. 2회차의 네가 나에게 저질렀던 행동들 때문에."
"······."
"내가 괜찮아지면 너도 자연스레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해서, 애써 모르는 척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이젠 안 될 것 같아. 나는 트라우마를 하나 이겨내고 원래의 식생활을 되찾았는데도 넌 여전하잖아.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더 심해진 것 같기도 해."
차라리 나를 두고 신의 선물이니 뭐니 칭송하며 숭배하듯 굴었던 때가 낫다.
그건 조금 유별나긴 해도, 어린아이가 제 보호자를 대단한 존재라 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하지만 지금의 녀석은 어떠한가?
마치 대외펜스 연기라도 하듯 자애롭게 굴며 성인군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있지, 세르펜스. 나는 네가 이럴수록 오히려 더 불안해. 위로를 받는 그 순간은 안정을 느끼지만, 그건 아주 잠깐일 뿐이야."
"선우는 내가 어른이 되길 바라지 않았나?"
"바랐지.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야. 나는 세르펜스 네가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어."
자기 자신을 책망하며 초조함에 시달려, 쫓기듯 어른이 되는 것은 건강한 성장이라 할 수 없다.
마음껏 어리광부리며 애정을 누리고.
자신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한편 다른 사람도 관찰하고.
두루두루 관계를 쌓아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었으면 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지."
"네가 틀린 건 아니야. 다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아이가 좋은 것만 보고 들으며 행복하게 자랐으면 하는 부모의 욕심? 그냥 그런 거야."
"······."
"악마의 계약을 끊는 건 시도해 봐. 세르펜스, 네 말대로 어쩌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계약이 끊어지면 정보 발설에 제약도 사라질 테니, 성공만 한다면 어떻게든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계약으로 이어진 연결선을 거슬러 올라가, 마왕이나 악마에게 타격을 주겠다는 계획은 그만뒀으면 해. 그러다 네가 다칠까 봐 겁나니까."
"알겠다. 선우, 그대의 말대로 하지."
세르펜스가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연약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손이 녀석의 머리 위로 향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내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희미했던 녀석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가라앉았던 내 기분도 덩달아 회복됐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옆으로 잠시 치워뒀다.
그러고 나서 세르펜스의 머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양손으로 마구 쓰다듬으며 본격적인 힐링 타임을 즐기려던 그때.
"세르펜스! 일단 시키는 대로 마인을 잡아오긴 했···는데, 지금 뭐 하고···. 어···, 아니다. 잡아오긴 했는데, 왜 잡아 오라고 했던 거야?"
휴마누스가 마인을 한 손에 든 채 창문으로 들어왔다.
잠시 혼란이 어리는가 싶었던 그의 표정이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반면에 그에게 들려있는 마인의 표정은 경악이란 단어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했다.
흔들리는 동공을 제외하면 한치의 움직임도 없이 완벽하게 굳어버려서, 더더욱 그림 같았다.
"자세한 설명은 일행들이 모이고 나면 하겠습니다."
"응, 알았어. 그런데 계속 그렇게 누워있을 생각이야?"
"이제 막 시작되려던 참인데···."
"뭐가···, 아니. 됐다. 난 신경 끌래."
세르펜스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툴툴거리며 일어나 앉았고, 휴마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건성으로 마인을 내려놓았다.
쿵, 머리를 바닥에 찧었는데도 놈의 경악한 표정은 여전했다.
아프지도 않은가 보다.
마인의 목에는 마력 구속구가, 손발에는 수갑과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자결 방지용인지 입에 천을 물려 놓았는데, 놈의 옷을 대충 찢어서 입에 쑤셔 넣은 듯 보였다.
세르펜스의 아공간 주머니에 재갈이 있긴 하지만, 그걸 꺼내어 놈에게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물고 있었던 걸 남에게 물려주는 건 아무래도 좀···.'
어쨌거나 천조각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듯하니 신경 끄자.
마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보였다. 그래도 심각한 부상이라 할만한 건 없었다.
왜 잡아오라고 한 건지 듣지 못했으니 최대한 조심해서 잡아온 모양이다.
"그보다 이제 저녁 식사 시간인데 마인을 저대로 둬도 괜찮겠는가?"
"하려던 그거, 오래 걸려?"
"으음···. 오늘 처음 시도해 보는 거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실수하면 빨리 끝낼 수 있다."
세르펜스의 저 말은 하려던 일을 빨리 끝낸다는 게 아니라, 마인의 목숨을 빨리 끝낸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마인의 목숨이 끝나버리면 할 일도 덩달아 끝나 버리긴 할 테니.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별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먼저 시도해 보겠다."
"시도라니, 대체 뭘? 나 궁금한데 대략적으로라도 설명해주면 안 돼?"
"자세한 얘기는 시온에게 들으십시오."
휴마누스가 투정을 부리자, 세르펜스는 내게 바통을 넘기며 마인에게로 다가갔다.
설명을 하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늦어질까 봐 염려한 까닭이리라.
그리고 녀석이 이렇게까지 살뜰하게 식사 시간을 챙기는 건, 내가 드디어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테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기꺼이 녀석을 대신하여 휴마누스의 호기심을 풀어주었다.
"악마의 계약을 끊을 수 있는지 실험해 보겠대요."
"그런 게 가능하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는데?"
"그러니까 실험이죠."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다는 말을 미리 해 둔 덕분일까?
휴마누스는 나처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쌈박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