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공작님과 마인들 (7) >
달리는 기차에 매달린 사람을 못 본 척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황스러웠으나 일단은 안에 들이기로 했다.
창문을 열어주자 무임 승차 이단 심문관은 날랜 몸놀림으로 창틀을 넘었다.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댄. 흔히 히어로 랜딩이라 부르는 자세로 착지한 이단 심문관은 그 자세를 유지한 채, 다짜고짜 자기소개부터 했다.
"신 룩스메아 님의 신실한 종, '레베카 U. 플라겔룸'이 신의 사자와 성검의 주인. 그리고 그 일행분들을 뵙나이다."
"아, 네···. 반갑습니다. 그보다 바닥에서 그러고 있지 말고 일단 앉으세요."
"예에,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옵나이다."
테일러 못지 않게 특이한 말투를 구사하는 이단 심문관이다.
레베카는 내 말에 공손히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채찍을 둥글게 말아 정리하여 벨트에 걸었다.
달리는 기차에 어떻게 매달렸는지 궁금했었는데 의문이 풀렸다. 저 채찍으로 기차의 튀어나온 부분을 잡아챈 거겠지.
"그런데···, 간식을 드시고 계셨나이까?"
우리 쪽으로 다가온 레베카가 소파에 앉기 전, 테이블 위를 슥 훑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세르펜스의 간식을 챙기는 것에 진심이라는 걸 교단 소속 인물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한가로이 간식 시간을 즐기고 있었던 걸 못마땅해하는 건 아닐 테다.
아니나 다를까 레베카는 허리춤에 메고 있던 힙 색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여태껏 보아온 패턴대로라면 간식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제비꽃이 그려진 보라색 패키지만 보면 왠지 향수가 들어 있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상자를 받아들었고, 레베카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이거 간식···맞죠? 열어서 확인해도 됩니까?"
"네에, 신의 사자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옵소서."
선물을 가져온 사람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나는 바로 상자를 열었다.
하얀 가루 같은 게 묻어있는 보라색 덩어리들이 담긴 유리병이 세 개 들어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나도 처음 보는 간식이다. 그래도 힌트는 충분히 갖춰졌기에 이게 뭔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설탕에 절인 제비꽃···?"
"네에, 그렇사옵니다. 나중에라도 꼭 드셔 주시어요."
"굳이 나중으로 미룰 필요가 있습니까? 쿠키를 다 먹고 나서 입가심으로 먹죠, 뭐."
"그리해 주신다면야, 영광이옵나이다."
대체 뭐가 영광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냥 극존칭을 사용하며 미사여구를 마구 덧붙이는 게, 이 이단 심문관의 기본 말투라 생각하고 넘어가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제비꽃 설탕 절임을 테이블 한쪽 구석에 치워 둔 후.
아공간 주머니에서 아이싱을 올리지 않은 쿠키를 몇 개 꺼내어, 접시에 담아서 이 부담스러운 무임 승차자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분의 찻잔도 꺼내어 세계수 잎 차도 따라 주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죠?"
"아아, 시온 님의 자애로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대체 뭘까? 이 이단 심문관은.
빈말이겠거니 생각하며 무시하기에는 표정에 감격이 묻어났다.
만약 내가 즉석에서 쿠키를 꾸며서 줬으면, 성은이 망극하다며 바닥에 머리라도 찧을 기세다.
사용하는 무기만 보면 '오호호홋!' 하고 카랑카랑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발밑에 깔아뭉갤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과도하게 저자세로 나오니 굉장히 떨떠름한 기분이다.
교황은 왜 하필 이 사람을 내게 보낸 걸까?
'멀쩡한 이단 심문관들은 전부 바빠서 남는 인원이 없었나? 아니면 마침 이 근처에 있는 이단 심문관이 저 사람뿐이라서? 설마하니 악숭 살롱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한 건 아니겠지?'
부디 마지막 이유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간절히 빌면서 차 한 잔을 원샷했다. 그러고 나서 빈 잔을 내려놓으니 세르펜스가 곧바로 차를 다시 채워 주었다.
잘 했다는 뜻으로 녀석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나는 다시 레베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십니까?"
"기차가 한 번도 멈추지 않았으니, 소문을 듣지 못하셨을 것 같아서 보고드리러 왔나이다."
"어차피 며칠 뒤면 기차에서 내릴 텐데. 대체 얼마나 급히 전달해야 할 소문이길래, 달리는 기차에 매달리기까지 합니까?"
"일단 가장 급한 건, 세르펜스 님께서 마인이 악마와 맺은 계약을 해제하는 게 가능하다는 소문이옵나이다. 진위를 빨리 확인해야 저희도 대처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네···?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심정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내비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러할 게 우리는 기차에 탄 첫날. 세르펜스가 처음으로 계약 해제를 시도한 뒤로, 단 한 번도 마인을 마주치지 못했으니까.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다.
'세르펜스가 악마의 계약을 끊는 방법을 익히도록 놔둘 생각은 없지만, 그걸 이용해 먹고는 싶다는 거잖아?'
이런 상도덕도 없는 잡배들 같으니라고.
자세한 정황을 입 밖에 꺼내 놓을 수는 없었기에, 나는 속으로 열심히 악숭이들을 험담했다.
다른 일행들도 황당함을 감추지 않았고, 그런 우리를 본 레베카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나이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간악한 악숭이들이 뿌린 헛소문이었나 보군요."
"놈들이 늘 그렇죠, 뭐. 것보다 다른 소문은 또 뭐가 있습니까?"
"하나는 헛소문이고, 다른 하나는 프뤼네 왕국에 악마가 나타났다는 소문이옵나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악마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프뤼네 왕국으로 직행하는 중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하기야 어디서 악마가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기차를 타고 이동하더라도 정보를 수집하고자 중간중간 정차했을 테니까.
위치를 발각당한 김에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고 작정했나 보다.
정말 최악의 소식이 아닐 수가 없다.
"저희가 도착할 때까지 프뤼네 왕국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제가 직접 상황을 눈으로 본 건 아닌지라···. 확언을 드릴 수 없나이다."
"그래요···?"
"하지만 시온 님께서 악마가 소환된 장소를 알려주신 덕분에, 다수의 이단 심문관이 일찍이 프뤼네 왕국으로 향할 수 있었나이다. 또한 프뤼네 왕국에는 마탑이 있지 않사옵니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터이니 안심하옵소서."
레베카의 설명을 듣고 나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뒤, 미처 자세히 듣지 못하고 넘어갔던 '헛소문'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레베카의 표정이 곤혹으로 물들었다.
"아···, 그 소문은···."
"그 소문이 어쨌길래요?"
"···입에 올리는 것조차 불경한 일이오나, 정보 전달을 위해 감히 말씀드리겠나이다."
"어차피 얘기를 옮기는 것뿐이잖아요? 이해할 테니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뒤늦게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깨달은 신께서 결정을 번복하시어. 휴마누스 님은 성검의 주인 자격을 박탈당해 성검을 쓰지 못하게 되었고, 새로운 성검의 주인으로 세르펜스 님이 지목되었다는 소문이옵나이다."
레베카가 눈을 질끈 감고는 무슨 랩이라도 하듯 다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그래도 발음이 좋아서 알아듣는 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 내용에는 문제가 많았다.
"아오!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이 또 시작이네, 또!"
"시온 씨. 제게는 아이 앞에서 말조심하라고 하셔 놓고 그런 험한 말을 쓰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아니, 그치만! 악숭 놈들이 자꾸 우리 애를 걸고넘어지잖습니까?! 심지어 세 개의 소문 중 하나는 사실이고 나머지 두 개는 헛소문인데, 그 두 개가 전부 세르펜스에 관한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어떻게 안 빡쳐요?!"
"확실히 화날 만도 하네요. 만약 아니마에 관해 말도 안 되는 나쁜 소문을 퍼트리는 새끼가 있다면, 저였어도 그 주둥아리를 확 그냥···!"
마탑에서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던 걸까?
에드나가 내게 고운 말을 쓰라고 지적한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본인이 험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래도 아이들 앞이라 자제를 한 건지 말끝을 흐리긴 했다.
"나는 괜찮으니 진정해라."
세르펜스가 내 등을 토닥거리며 입에 쿠키를 하나 물려 주었다.
정말이지, 세상에 이토록 갸륵한 아이가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왈칵 치밀어오르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녀석을 꽉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본 아니마가 에드나의 입에 쿠키를 넣어주는 모습을 언뜻 본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우리 애를 둥개둥개 우쭈쭈해 줘야 해서 바쁘니까.
"아이고! 역시 우리 공작님이 최고네, 최고!"
"그대도 늘 나의 최고다."
우리 애가 너무 기특해서 큰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이 녀석을 홀라당 데리고 내가 살던 세계로 튀고 싶다.
하지만 내겐 그런 능력도 없거니와, 세르펜스가 사라지면 마왕과의 싸움은 필패로 끝나 일행들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터.
행여 데려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주민등록증 발급이 안 되어, 불법 체류자 신세가 될 테니 이 또한 문제다.
'개떡 같은 세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 사람들도 하나둘 정신을 차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세르펜스를 놓아주었다.
내 속도 모르고 녀석은 우쭈쭈 받는 게 마냥 좋았던 건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낯선 무임 승차자가 보고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나 보다.
"신의 사자께서 세르펜스 님을 아끼신다는 얘기는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쁜 애가 예쁜 짓을 하잖아요."
"아···, 이해했나이다."
레베카가 세르펜스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녀석의 뛰어난 미모를 인정한 것이리라.
"아무튼 휴마누스가 성검의 주인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건 사실무근의 헛소리입니다. 그쵸, 휴마누스?"
"응, 그렇지."
"대답을 하라는 게 아니라 성검을 뽑아서 보여주라는 뜻이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한동안 성검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냥 검을 쓰며 실력을 키우겠다면서요? 괜한 오해 사지 않으려면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습니다."
"어차피 레베카 님은 그 소문 안 믿으시는 것 같던데···."
휴마누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툴툴대면서도, 내가 시키는 대로 성검을 뽑아들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나도 이단 심문관씩이나 되는 양반이 그런 헛소문을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성검 외에 다른 검을 하나 더 지니고 다니며, 그 검만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설마 하는 생각을 한 번쯤은 떠올리게 될 테다.
또한 악숭 세력이 그딴 소문을 낸 건, 마인의 눈을 통해 휴마누스가 성검이 아닌 다른 검을 쓰는 걸 봤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세르펜스···. 정확히는 타락펜스였지만, 아무튼 녀석이 최근에 성검을 사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헛소문이긴 했으나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란 소리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으리라.
"와, 근데 소문 한번 진짜 악의적이네요! 세르펜스가 성검을 쓸 수 없다는 걸 증명하려면, 성검을 잡아 봐야 하는데···. 그럼 우리 공작님의 곱고 예쁜 손에 흉터가 남잖습니까?! 그런 건 제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소서, 신의 사자시여. 그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증명해야 하는 일이 없도록, 본 교단은 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옵니다."
"당연히 그리해야죠!"
나는 일부러 화났다는 티를 팍팍 내며 거칠게 쿠키를 베어 물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누군가가 세르펜스에게 정말로 성검을 못 쓰는 게 맞느냐고 의심하며, 성검을 잡아보라고 도발하면 이런 식으로 호들갑스럽게 화를 내야겠다고.
또한 내 말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평소에도 세르펜스의 외모 찬양을 열심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