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공작님과 마인들 (9) >
* * *
도시에 다다르자 레베카는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 뒤, 기차를 멈춰 세울 새도 없이 창문을 통해 뛰어내렸다.
나는 깜짝 놀라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뒤쪽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미 레베카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진 후였다. 등장부터 퇴장까지 임팩트가 강렬한 사람이었다.
"와···. 세르펜스가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나도 할 수 있다."
"왜 경쟁하려는 거야?"
혹여 세르펜스가 창문 너머로 몸을 던질까, 나는 서둘러 창문을 닫고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무임 승차자가 무단 하차한 이후로도 기차는 몇 날 며칠을 쉼 없이 나아갔다.
그렇게 영원히 달릴 것만 같던 기차는 국경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야 마침내 멈춰 섰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성문으로 향하여, 교단이 미리 대기시켜 둔 말에 올라탔다.
나는 언제나 그러하듯 세르펜스의 앞에 앉았고 에드나는 유지스에게 신세를 졌다.
그리고 아니마는 질투로 범벅된 눈을 질끈 감으며 푸로르가 탄 말에 함께 올랐다.
"에드나 씨. 예전에는 빠르게 이동해야 할 때, 마법으로 몸을 띄워서 풍선처럼 둥둥 매달려 가지 않았어요?"
"단기간이라면 모를까, 앞으로 보름 내내 그러고 다닐 자신은 없어서요. 마력 소모는 거의 없어서 마법을 유지하는 건 문제 없지만, 미묘하게 계속 신경이 쓰이거든요. 숨 쉬고 눈을 깜박이는 것을 의식하며 수동으로 행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거에 신경 쓰느니, 차라리 마법 연구 중 막힌 부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에요."
의식적으로 호흡하며 눈을 깜박이는 느낌이라니, 보름 내내 자는 시간만 빼고 그러고 있으면 멀쩡했던 사람도 신경 쇠약이 생길 테다.
듣자마자 바로 이해가 되는 훌륭한 예시가 아닐 수 없다.
그건 그렇고 큰일 났다.
에드나의 얘기를 듣고 났더니, 갑자기 숨 쉬는 것과 눈을 깜박이는 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빨리 의식을 돌릴 만한 게 필요하다.
그때 마침 휴마누스가 입을 열었다.
"리에나, 정말 혼자 타도 괜찮겠어?"
그리 말하며 휴마누스는 홀로 말에 오른 리에나를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여태껏 리에나가 혼자서 말에 탄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도 휴마누스가 새삼스레 리에나를 걱정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동 속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말에 온갖 버프를 때려 박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신성력으로 저 자신의 신체 능력도 끌어올릴 예정이니까요. 몸을 쓰는 데에도 꽤 익숙해졌고요."
리에나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신성력을 발휘했고, 백색의 빛이 말들에게 스며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고삐를 쥔 인원이 말을 출발시켰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휙휙 변하는 와중에도, 함께 말을 몰아 달리는 일행들의 모습은 마치 멈춰 선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누구 하나 뒤처지지 않도록 리에나가 말들에게 건 버프를 조절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게 세심한 신성력 운용을 선보이면서도 리에나는 용케 말을 몰았다.
몸이 잔뜩 굳어 긴장한 게 훤히 보였지만, 이렇게 며칠 달리다 보면 익숙해지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전방에 수상한 무리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말을 타고 달린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세르펜스가 그렇게 말하며 고삐를 살살 잡아당기며 서서히 말의 속도를 늦췄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에, 말은 한참을 더 가고 나서야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그만큼 천천히 속도를 늦췄기에 덜컥 몸이 앞으로 쏠리는 일조차 없었다.
반면에 다른 일행들이 탄 말은 갑작스러운 정지에, 앞다리를 들어 올리며 히이잉 하고 거친 울음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던 걸까?
리에나가 창백해진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장 걱정되었던 일행의 안전도 확인했겠다, 이제는 우리의 앞길을 막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차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쳐다보았다.
세르펜스가 경고를 했을 때만 해도,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았던 십여 명의 사람 무리가 이제는 고작 몇 미터 앞에 있었다.
함께 길을 막고 서 있으니 아는 사이인가 했건만.
거리를 벌린 채 서로를 경계하는 모양새가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였다.
그런데도 저들에겐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나 후드로 눈가를 가리고, 옷을 꽁꽁 싸매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목 주변을 꼼꼼히 가렸다.
제법 쌀쌀해지긴 했으나 지금은 아직 가을이다.
여기가 프뤼네 왕국이라면 모를까, 목도리를 꼼꼼하게 두르고 다니기에는 너무 이르다.
설마 하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한 줄기 바람이 그들 사이로 쏘아졌다. 쐐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작스레 불어닥친 거센 바람은 사람들의 후드를 젖히고 모자를 날려버렸다.
그렇게 드러난 사람들의 눈은 역안을 띠고 있었다.
목을 가린 건 마기를 억누르는 마력 구속구를 착용한 까닭이겠지.
"역시나, 여러분은 마인이로군요."
유지스가 날선 목소리로 말을 꺼내며 화살 통에 꽂힌 화살에 손을 갖다 댔다.
다른 한 손은 이미 활을 들고 사람들을 향해 겨눈 상태였다.
그 모습에서 나는 방금 그 돌풍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건 유지스가 쏜 화살과 그로 인해 생겨난 여파가 분명했다.
열이 넘는 마인들이 길을 막아섰으니 당연히 전투가 벌어질 줄 알았다.
하나 내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놈들이 대뜸 바닥에 엎드리더니 빌기 시작한 것이다.
"사, 살려주세요!!"
"저는 그저 악마 숭배자들에게 속았을 뿐입니다!"
"마인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믿어주세요!"
"그게 악마의 목소리인 줄 몰랐습니다, 진짜로요!"
살고 싶었으면 우리 눈에 띄지 않도록 몰래 숨어 지낼 것이지.
굳이 튀어나와 모습을 드러내 놓고 목숨을 구걸하는 건 대관절 무슨 경우인가 싶다.
다른 일행들도 이들의 행동에 의문을 느낀 걸까?
곧장 무기를 뽑아들고 전투에 돌입하는 대신 마인들을 노려보며 경계만 했다.
"저기요, 우리 지금 엄청 바쁘거든요? 그러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해주세요."
"프라시더스 공작께서 악마의 계약을 끊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평범한 사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인 하나가 잽싸게 대답했다.
비로소 악마와 계약한 이들이 어째서 우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이유라면 느닷없이 나타나 자신들의 무고함을 주장하던 것도 이해가 간다.
"세르펜스,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고 말 것도 없다. 애초에 악마의 계약을 끊을 수 없는데, 무슨 선택을 하겠는가?"
세르펜스의 말에 마인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는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양,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거,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마인을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대륙에 없습니다!"
"어째서 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
놈들의 말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자들은 폭주 마인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본인의 결정으로 악마와 계약하길 선택했다는 뜻이다.
악마와 계약을 맺었을 당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어 충동적으로 선택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해 주어야 할 의무는 물론이거니와 그럴 이유 또한 없다.
'악마와 계약해서 원하는 걸 얻어놓고는. 영혼을 저당 잡힌 것도 불안하고 악숭 세력의 말을 따르는 것도 싫으니까, 세르펜스에게 해결해 달라는 거잖아?'
악마를 상대로 계약 사기를 치고 싶어서 제삼자를 끌어들이려 하다니.
그 비겁함과 치졸함에 나는 그만 어처구니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들이 인간이길 포기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무슨 권리로 도와달라는 소리를 지껄이며, 눈을 부라리는 거야? 눈 안 깔아?!"
이놈들은 도대체 뭐가 그리 당당하고 억울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할 수만 있다면 세르펜스를 노려보는 저 눈들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러주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바짝 엎드려 있을지 몰라도 저들은 마인이다.
고작 눈 콕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갈 생각은 없다.
"혹시 당신이 신의 사자입니까? 부디 저희의 사정을 살펴 주시어, 프라시더스 공작을 설득시켜 주십시오!"
"얘가 그런 거 못 한다잖아. 이해가 안 돼? 내가 설득한다고 해서 못 하는 게 가능해지지 않는다고."
"어째서 그런 거짓말을 하시는 겁니까?!"
"혹시 신성력 소모가 극심해서 그러는 거라면 저라도···!"
"저, 저를 도와주세요! 전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제가 일부러 계약을 맺으려던 건 아닌데, 악마 숭배자들이···."
나는 분명 그런 건 불가능하노라 못 박아 얘기했건만.
마인들은 '딱 한 명만 계약을 해제할 수 있게 도와줄 테니, 억울한 사정을 얘기해 봐.'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굴었다.
마인들이 떠드는 걸 가만 듣고 있자니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닌지, 아니마가 스태프를 꺼내 들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냥 죽여버려도 돼?"
"오! 나도 꼬맹이 의견에 찬성!"
푸로르가 자신의 앞에 앉은 아니마의 정수리를 툭툭 두드리며 동조했다.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마인들의 말을 들어주기 힘들다고 생각한 건 다들 마찬가지였나 보다.
심지어는 온화한 유지스조차 인상을 찌푸리며 가늘게 뜬 눈으로 놈들을 노려보았다.
"저는 저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때맞춰 나타난 것부터가 의심스러워요."
"기차를 타고 제국을 가로질러 오신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지나실 거라고 생각하여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말을 악수···웅···이 아니라, 악마 숭배자들이 일부러 흘렸을 가능성은 생각도 안 하신 모양이로군요."
"어째서 그자들이 그런 말을 우리에게 흘린단 말입니까?"
"지금처럼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도록 유도하기 위해서겠죠."
나도 이자들이 괜히 이곳에 나타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 악숭이들의 의도가 깔렸겠지.
그런 게 아니라면 한두 명도 아니고 열이 넘는 인원이 한곳에 모여 있을 리가 없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정말로 간절합니다!"
"저도요!"
"저야말로!!"
마인들이 또다시 존재하지도 않는 기회를 노리고 경쟁적으로 떠들어댔다.
서로를 노려보며 견제하랴, 세르펜스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랴. 아니마가 마법진을 그려 자신들을 몰살시키려 하지 않는지 눈치를 보랴.
아주 바쁘다, 바빠.
"하아···."
뒤에 앉은 세르펜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세르펜스 전문가인 나는 알 수 있었다.
방금 그 한숨은 마인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라, 연기로 꾸며낸 것이라는 사실을.
"정히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해 달라 간절히 바라시니, 한 번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갈 길이 바쁘긴 하나 실험체가 대거 굴러들어온 흔치 않은 기회이니, 계약을 끊는 연습을 해 보겠다는 소리였다.
세르펜스가 말에서 내려 고삐를 윈스톤에게 맡겼다.
말에 타고 있는 나를 놔두고 굳이 윈스톤에게 고삐를 넘긴 이유야 뻔했다.
내가 낙마하지 않도록 잘 지키라는 뜻이겠지.
"에드나, 잠시···."
유지스가 에드나에게 귓속말로 무어라 말했다.
아니마의 표정이 시기와 부러움으로 물들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에드나는 유지스의 귓속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유지스가 말을 마치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태프를 꺼내어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푸른 마력의 밧줄이 마인들의 몸을 묶었다.
놈들이 마력 구속구를 풀어 반항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붙들어 놓은 거다.
세르펜스가 유지스와 에드나에게 눈인사를 건네어 감사를 표한 뒤, 가장 시끄러웠던 마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다음은 기차에서 보았던 광경과 똑같았다.
마인은 고통에 몸부림쳤고, 그러다가 결국 죽었다.
"무, 무슨···?!"
"그러게 제가 못 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말이 사실이었다고···?"
"하지만 여러분의 간절함을 외면할 수는 없으니, 온 정성을 쏟아 끝까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는 방금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마인에게로 다가갔다.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나 세르펜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 살려주세요!"
"제가 마인을 살려 둘 리가 없잖습니까."
뭔가 비슷한 대화를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세르펜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전혀 딴판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