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은신을 유지한 채,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지난 번에 싸움을 관전할 때보다는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위치였다.
산성 용액 발사 스킬도 업그레이드한 만큼, 최대한 안전을 확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꽁무니를 신중하게 조준한 뒤 적당한 순간을 기다렸다.
치열하게 싸우던 몬스터들이 잠시 떨어져서 서로를 위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푸슝!
내 꽁무니에서 쏜살같이 날아간 산성 용액이, 발톱으로 적을 위협하던 지네에게 명중했다.
지네는 즉시 뒤로 물러나서 수많은 다리가 달린 몸을 흔들며 끔찍하게 따가운 용액을 떨쳐내려고 했다.
그러자 늑대들이 적의 진형이 무너진 틈을 놓치지 않고 공세를 취했다.
두 마리가 아직 멀쩡한 지네들을 견제하는 사이, 한 마리가 내 산성 용액에 부상을 당한 지네의 왼쪽으로 돌진했다.
늑대는 문제의 지네를 무리로부터 떨어뜨려 1대1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흥미진진한 전개였다.
나는 늑대가 이긴다는 쪽에 걸었다.
지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독침이 달린 꼬리를 들어올려 적을 위협하면서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늑대는 전혀 겁먹지 않고 몸을 날렸다.
휙!
지네가 번개 같은 속도로 꼬리를 내밀어, 마치 전갈 같은 자세로 독침을 찔렀다.
하지만 늑대는 놀라운 민첩성을 발휘해서 몸을 비틀어 그 공격을 피했다.
목표를 놓친 지네의 독침이 바위에 부딪혔다.
늑대는 지네가 꼬리를 거둘 여유를 주지 않고 상대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놈은 날카로운 발톱에 찔릴 위험을 감수하고 주둥이로 지네를 무는 대신, 두꺼운 꼬리를 엄청난 기세로 휘둘렀다.
퍽!
늑대의 꼬리에 강타당한 지네가 동굴의 돌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지네의 두꺼운 외골격이 부서지며 쩍 하고 갈라졌다.
난 깜짝 놀랐다.
엄청난 공격이잖아!
만약 내가 저 꼬리에 맞는다면 그대로 납작한 팬케이크가 되어버릴 터였다.
무서워라!
지네는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늑대가 눈에서 살기를 번뜩이며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마치 ‘어때, 이제 네 주제를 알겠냐 벌레 새끼야’ 라고 말하듯 여유로운 태도였다.
하지만 놈이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산성 용액이 늑대의 옆구리를 강타해, 즉시 그 살을 녹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고, 이런.
흐흐흐흐흐.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해서 미안하다, 늑대야.
하지만 난 아직 싸움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거든.
물론 산성 용액 한 발로 늑대를 죽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지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내 산성 용액에 맞았던 지네가 이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지, 다시 싸움판에 가세했다.
놈은 멀쩡한 동족 세 마리가 역시 상처 없는 늑대 두 마리와 대치하고 있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지금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지네들 중 한 마리가 아직 살아 있기는 하지만 거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고, 늑대들 중 한 마리도 내 산성 용액에 부상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싸움이 다시 팽팽해진 셈이다.
이제 지네들은 싸움이 그리 내키지 않는 듯했다.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면서도 자기들보다 덩치가 큰 적수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덤비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내 산성 용액에 맞은 늑대는 부상을 입었지만 싸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놈은 산성 용액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아내려 하지 않고, 벌레 무리와 싸우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 돌아섰다.
그 순간···
푸슉!
또 한 번 산성 용액이 늑대를 맞췄다.
늑대는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와 함께 바위 위를 마구 구르며 산성 용액을 닦아내려 했다.
기회다!
라고 생각한 세 마리의 지네들이 일제히 돌진했다.
수백 개의 작은 다리들이 빠르게 움직이자, 지네들은 거의 땅 위를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팔렸던 늑대들은 반응이 너무 늦었고, 결국 한 마리가 지네의 발톱에 붙잡히고 말았다.
늑대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자신을 공격하는 지네를 떨쳐냈다.
그리고 육중한 꼬리를 휘둘러 그 지네를 멀리 쳐냈다.
하지만 그 사이 다른 지네 한 마리가 꼬리의 독침을 찔렀다.
그 사이 나는 지붕에서 벽을 타고 내려와,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 근처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독침에 당한 늑대는 분노로 울부짖으며 자신을 찌른 지네에게 몸을 날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이와 발톱으로 지네를 공격했다.
그 옆쪽으로 접근하던 또다른 지네는 늑대가 휘두르는 꼬리에 맞고 날아갔다.
한 마리는 독침에 찔렸고 또 한 마리는 내 산성 용액에 부상을 입었다 보니, 이제 늑대들 쪽이 한참 불리했다.
하지만 지네들은 네 마리 중 한 마리가 죽기 직전이고 나머지 셋도 모두 어느 정도 다친 상태였다.
독침에 찔린 늑대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는지, 더 이상 몸을 사리지 않고 날뛰었다.
죽기 전에 한 마리라도 더 데리고 갈 작정으로 보였다.
그 모습에 고무된 다른 두 마리의 늑대들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레벨 3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그 사이 나는 전장의 외곽에서 거의 죽어가고 있는 지네 한 마리를 턱으로 몇 차례 빠르게 물어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조용히 놈의 시체를 끌어서 가까운 바위 뒤로 옮겼다.
저쪽에서는 싸움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남아 있는 세 마리의 지네들은 살아남기 위해 독침이 달린 꼬리를 계속 앞으로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늑대들을 물러나게 만들려고 했다.
독침에 찔린 늑대는 여전히 사납게 으르렁거렸지만, 온몸에 독이 퍼졌는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발톱에 긁히고 물린 자국이 난 마지막 늑대는 결정적인 순간에 비틀거리다가 어깨에 독침을 맞았다.
치명타였다.
성난 늑대는 사방에서 날아드는 발톱과 이빨에 아랑곳 않고 지네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꼬리를 휘둘러, 두 마리의 지네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날아간 지네들은 동굴 벽에 요란하게 부딪혔다.
늑대의 도마뱀 꼬리가 발휘하는 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벽에 부딪힌 지네들은 다리가 부러지고 갑각이 갈라진 채,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제 남아 있는 건 상처 입은 지네 한 마리와 산성 용액에 다친 늑대 뿐이었다.
둘 다 심하게 상처를 입어서 제대로 싸울 상태가 아니었다.
두 놈은 천천히 서로의 주위를 맴돌며 빈틈을 노렸다.
이 시점에 문제의 늑대는 앞다리를 심하게 물려서 절뚝거리고 있었다.
지네 역시 다리 몇 개가 부러진 탓에 움직임이 느렸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 신호라도 보낸 것처럼, 두 마리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괴물은 서로의 몸뚱이를 발톱으로 움켜쥐고 물어뜯었다.
지네는 늑대의 목을 물었고, 늑대는 지네의 머리 바로 뒤쪽을 물었다!
누가 버틸 것인가?
둘 다 아니었다.
모든 힘을 소진한 두 마리의 괴물은 천천히 그리고 동시에 무너졌다.
나는 그림자 뒤에 숨어서 이 처절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 마리의 늑대들은 모두 탈진해서 쓰러진 채,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그 적수인 지네들도 비슷하게 무력화된 상태였다.
···
흠···
후후···
으하하하하하하!
멍청한 놈들!
너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지만, 정작 나로서도 어쩌면 이렇게 잘 풀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모든 괴물들이 죽지는 않은 채 숨만 겨우 붙어 있었다.
아마 HP가 1 정도 남았겠지.
전례 없이 풍족한 경험치와 바이오매스의 잔치였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참 놀라운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정상적인 사회 속에 살았고, 누군가를 해치는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어릴 때에도 누구와 심하게 싸워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벌써 이런 싸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고 싸운 다음 적을 먹이로 삼는 경험은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내 태도를 빠르게 바꿔 놓았다···
어쩌면 저들이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 자신은?
나도 몬스터가 아닌가?
뭐, 감상은 나중으로!
지금은 우선 저기 쓰러져 있는 몬스터들을 마무리할 때였다.
특히 늑대들이 독 때문에 죽어버리기 전에 말이다!
나는 늑대들 사이를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턱으로 놈들의 숨통을 끊었다.
[레벨 4 루푸스 드라코 커브를 처치했습니다.]
[레벨 3 루푸스 드라코 커브를 처치했습니다.]
[레벨 4 루푸스 드라코 커브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네들도 마무리했다.
아쉽게도 놈들 중 하나는 이미 죽은 뒤였지만, 나머지 놈들은 늦지 않게 처치할 수 있었다.
[레벨 2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레벨 3 발톱 지네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 5가 되었습니다. 1 스킬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레벨 상한에 도달했습니다. 진화 메뉴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
무무뭐뭐뭬에라?
정말로?
내가 진화할 수 있다고?!
아니, 일단 진정하자.
진화라는 단어가 얼마나 매력적이든, 우선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눈 앞에 쌓여 있는 바이오매스부터 획득해야 했다.
시체들이 저렇게 널려 있으면, 언제 다른 괴물들이 침을 흘리며 몰려들지도 모르니까!
그때 내 더듬이가 공기를 뒤흔드는 진동을 감지했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왔다!
놈들이다!
희미한 발소리가 천둥처럼 동굴 안을 울렸다.
아마 첫 번째 공동과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먼 쪽으로부터 들리는 소리였다.
잠깐만.
이건 아니지.
안돼, 지금은 아니라고.
이럴 순 없어!
새로운 세계
나는 최대한 빨리 시체들을 파먹기 시작했다.
바이오매스를 하나라도 더 건지기 위해서였다.
[바이오매스의 새로운 원천을 섭취했습니다: 루퍼스 드라코 커브,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루퍼스 드라코 커브의 기초 정보가 잠금 해제됩니다.]
[루퍼스 드라코 커브: 늑대 드래곤 유체. 무시무시한 늑대 드래곤의 유생체로. 불꽃에 강한 저항력을 가집니다.]
맙소사, 이 놈들이 새끼였다고?
미쳤군.
어쨌든 계속 먹자!
소리는 점점 더 커졌지만, 아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정확히 뭐가 다가오고 있는지 알았다.
그래서 기분이 끔찍했다.
한 시간, 아니 십 분만 더 있으면 되는데!
아니, 생각하지 말고 빨리 먹기나 하자!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빨리.
계속.
먹자.
[1 바이오매스를 얻었습니다.]
젠장, 벌써 배가 부르다.
이제 늑대 드래곤 한 마리를 먹었을 뿐인데 배가 터질 것 같잖아!
잠깐!
뭔가 역겨운 생각이 떠오르는데···
내가 집에서 개미들을 길렀을 때 알게 된 사실 말이야.
개미들은 위가 두 개지···
그리고 정찰병과 일꾼들은 언제나 먹이를 둥지로 가져와.
때때로 이런 개미들은 ‘사교용 위’에 먹이를 담았다가, 둥지로 돌아온 뒤 게워내서 다른 개미들이 먹게 하기도···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꿀단지 개미들은 이런 특징이 극대화된 사례였다.
몇몇 일개미들은 스스로를 살아 있는 식량 창고로 바꿔서, 기이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 배를 한 채 둥지 안에 머물며 동료들에게 먹이를 공급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내 개인 위가 꽉 찼다면···
사교용 위를 채울 때다!
더 먹자!
나는 지네 한 마리의 시체로 다가가서 최대한 빨리 살점을 집어삼켰다.
점점 커지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내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 나를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