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를 버리라고!
내가 턱에 힘을 줄 때마다 인간들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공포가 떠올랐다.
내게 잡혀 있는 여왕이 어떻게 되기라도 할까 봐서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고 있는 듯했다.
인간들 사이에 몇 마디가 오가더니, 타이니와 싸우던 전사가 나머지에게 뭐라고 소리친 뒤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다른 인간들도 주저하며 따라서 엎드렸다.
···
뭐 좋아.
그것도 괜찮지.
[타이니, 놈들의 무기와 방패를 수거해.]
이제 놈들이 엎드려 있으니, 안전하게 무장을 해제해서 위협을 줄이고 상황을 좀 더 통제 하에 놓을 수 있을 터였다.
완벽해.
나 자신의 판단에 감탄하고 있는데, 타이니가 내 명령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타이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게 뭔데?]
타이니가 물었다.
···
정신 공격
맙소사.
···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한가.
[저놈이 너를 찌르는 데에 사용했던 뾰족한 물건이랑, 네 주먹을 막는 데에 썼던 커다랗고 넓적한 물건을 모두 가지고 와.]
나는 짜증을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차분히 설명했다.
타이니는 엄청 집중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명령이 녀석의 머리에 제대로 입력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아, 좀!
마침내 타이니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몸을 돌려, 자신과 싸웠던 전사에게 다가갔다.
아마 전사들의 대장 정도 되는 사람 같았다.
타이니는 천천히 몸을 굽혀 초조하게 엎드려 있는 전사의 검을 두꺼운 손가락으로 집어 들더니, 자기가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어린아이처럼 내 쪽을 쳐다봤다.
[그래, 그게 무기라는 거야! 잘했어, 타이니!]
내가 칭찬했다.
타이니가 활짝 웃으며 검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뼈다귀를 물어온 강아지처럼 내 발치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내가 다시 한 번 칭찬하자,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게 된 타이니가 전사들의 장비를 한 번에 하나씩 내 앞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무기와 방패를 모두 회수하는 데에만 거의 10분이 걸렸다.
[잘했어, 타이니!]
내가 다소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타이니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 영리함 수치가 몇이나 될까···?
인간들의 무장을 모두 해제하고 나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저 칼날 아래 얼마나 많은 개미들이 죽었는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인간 여왕을 둥지로 데려갔다.
내 보폭에 맞춰서 여왕이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느리게 움직였다.
인간들은 여왕이 자신들로부터 멀어지자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전사 하나가 고개를 들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보려고 하길래, 나는 더듬이를 사납게 흔들어서 놈을 가리켰다.
그러자 놈이 다시 얼굴을 바닥으로 향했다.
둥지에 가까워지자 이 전투가 둥지에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거의 백 마리에 가까운 개미들이 죽었다.
하나같이 인간 전사들이 검에서 쏘아낸 빛의 칼날에 몸이 두 동강난 상태였다.
아직 개미들은 이렇게 레벨이 높은 적과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약했다.
전술을 사용할 정도로 영리하지도 않았고, 힘으로 밀어붙일 만큼 강하지도 못했다.
수가 더 많았다면, 그러니까 개미가 천 마리 정도 있었다면···
방어막을 뚫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마법사들이 충분히 오래 버티는 사이 이 전사들이 천 마리를 모두 학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겠어!
이번 전투는 레벨이 높은 적을 상대하면, 설사 승리한다 해도 수많은 아군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물론 일반적인 몬스터 개미 둥지라면 일개미들을 희생시켜 승리를 쟁취하는 방식이 전략의 일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둥지의 개미들을 내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이상 그렇게 허무하게 죽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했다.
[타이니, 너와 싸우던 자를 둥지 안으로 데려와.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서 나머지를··· 다 죽여.]
내가 말하자 타이니가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제야 나는 내가 전투에 뛰어들기 전 떨어뜨렸던 꼬마 친구들이 떠올랐다.
가엾은 크리니스!
앞도 못 보는 녀석인데!
[크리니스! 크리니스! 어디 있니?!]
내가 펫 커뮤니케이션 스킬로 미친듯이 외쳤다.
그렇게 인간 여왕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보니, 수풀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잽싸게 달려가자 풀 위로 삐죽이 나와 있는 촉수가 눈에 띄었다.
여기 있었구나!
나는 크리니스가 잡고 올라올 수 있도록 한쪽 다리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나야! 타고 올라와!]
크리니스는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등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근처의 나무 뒤에서 나타난 바이브도 잽싸게 머리 위로 올라왔다.
꼬마들을 챙긴 나는 인간 여왕을 내리고 다시 대학살의 현장으로 이동했다.
자기 아이들의 시체에 둘러싸여 있는 여왕 개미는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일개미들이 그 주위로 서둘러 모여들었다.
어쩔 줄 모르며 앞뒤로 움직이는 개미들의 모습에서 걱정과 불안감이 느껴졌다.
인간 여왕은 여왕 개미처럼 거대한 몬스터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띄게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를 일으킨 건 바로 이 여자의 부하들이니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만약 이 여자가 ‘진짜’ 여왕을 해치려 들기라도 하면, 곧바로 후회하게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내가 외쳤다.
사실 나는 여왕 개미가 이렇게 심하게 다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무적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칠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토록 단단하던 여왕의 갑각 여기저기 인간들의 칼날에 맞아서 생긴 자국이 보였다.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그 중 몇 군데는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나는··· 괜찮을 거란다.”
여왕이 애써 평소처럼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스로 치유가 가능하세요? 마법으로요!”
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여왕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커다란 몸을 들썩이며 숨을 쉬었다.
“힘이··· 없구나.”
여왕이 대답했다.
힘이 없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주문을 쓸 정도의 정신력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마나가 부족한 건가?
정말 심각한 상황이잖아!
걱정스러운 마음이 점점 커졌다.
나는 더듬이로 여왕의 몸에 난 상처들을 살폈다.
개미의 본능이 이성을 앞서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상처들 중 하나가 너무 깊었다.
목 부분의 갑각을 뚫고 들어간 커다란 상처였다.
상처의 틈 사이로 뭔가 빛나는 게 보였다.
설마···
코어인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조금만 옆을 맞았다면··· 코어를 다쳤을 터였다.
코어를 다치는 건 치명적이었다.
몇 센티미터 차이로 여왕 개미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나는 충격에 휩싸인 채, 마나 감지를 활성화해서 여왕의 코어를 살폈다.
눈부시게 빛나야 할 코어가 침침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왜 여왕의 코어가 이렇게 약한 거지?
마나와 에너지로 가득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지금 이렇게 힘이 없으신 건가?
코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나는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고 내 코어에서 마나를 끌어내 여왕의 코어로 보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지 확신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는 마나를 모두 여왕의 코어에 보낸 뒤, 나는 다시 한 번 마나 감지를 활성화해 달라진 점이 있는지 살폈다.
···조금 나아졌나?
확실히 아까보다는 생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정도 마나로는 여왕의 커다란 코어를 채우기 역부족인 듯했다.
“여왕님을 농장으로 모시고 가!”
나는 근처에 있는 개미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쳤다.
“먼저 가서 몬스터를 전부 처리한 다음, 어머니를 안으로 모시고 가서 보호해!”
마나가 더 필요한 거라면 마나 줄기가 있는 농장으로 모시고 가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충분히 많은 일개미들이 호위하면 스폰되는 몬스터들이 여왕을 해치는 일도 없을 터였다.
“최대한 빨리 스스로를 치유하셔야 해요! 지금 부상이 아주 심각해요!”
나는 여왕이 자기 자신보다 다친 아이들을 먼저 치료하려 할까봐 걱정이 돼서 그렇게 말했다.
언제나 가족이 우선인 분이었으니까 말이다.
여왕은 느린 속도로 힘겹게 농장을 향해 움직였다.
둥지의 거의 절반이 여왕을 따라갔다.
일부 개미들은 여왕의 아래에서 등으로 몸을 받치며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나도 따라가고 싶지만, 다른 할 일이 있었다.
부디 형제 자매들이 어머니를 잘 보살피기를 바랄 수밖에···
타이니는 나머지 인간들을 전부 죽이라는 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전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자기와 싸웠던 전사는 이미 개미 언덕 위에 옮겨 놓은 뒤였다.
몇 마리의 일개미들이 둘러싸고 더듬이로 여기저기 두드리거나 턱으로 건드려도 전사는 움직이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못 움직이게 잘 감시해.”
나는 인간 여왕을 개미 언덕 꼭대기의 입구로 데려가면서 일개미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이제 인간 여왕을 어떻게 둥지 안으로 데려갈지가 문제인데···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여왕이 까치발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여왕은 두 손으로 내 턱을 잡았다.
이렇게 하면 목 대신 팔로 자기 몸무게를 지탱하게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상태로 천천히 수직 통로를 내려갔다.
다행히 내 방은 입구 근처라 오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턱을 벌려서 방 안에 인간 여왕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머리 속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마치 거대 악어가 내 뇌를 직접 후려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턱을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방금 그건 뭐였지?
꽝!
또다시 뭔가가 내 머리 속을 강타했다.
마치 실제로 얻어맞은 것처럼 내 몸이 흔들렸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뭔가가 내 정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 머리 속에 드리웠지만, 나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 정도로는 날 쓰러뜨릴 수 없어!
누구의 짓인지는 뻔했다.
인간 여왕이 바닥에 주저 앉은 채,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나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난 굴복하지 않는다!
어머니 여왕이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로 기어가던 모습을 봤을 때 느꼈던 분노가 내 가슴 속에서 폭발하며 어지러움을 태워버렸다.
빌어먹을 인간들은 오늘 수많은 형제 자매들을 죽였다.
그리고 이제 나까지 죽이겠다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며 턱을 크게 벌리고 인간 여왕을 위협했다.
하지만 턱을 다물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힘이 머리 속을 다시 한 번 공격했다.
이번에는 망치가 아니라 드릴이었다!
날카롭고 지속적인 통증이 계속되며, 내 방어를 무너뜨리고 의식을 침범하려 드는 게 느껴졌다.
이게 어떤 종류의 공격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불쾌했다.
제기랄 여왕 개미에게 마나를 보내느라 코어가 완전히 비어 있는 상태만 아니라도, 마나를 이용해서 어떻게 막아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분노를 연료 삼아 고통을 견디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공격이 계속될수록 고통이 점점 심해졌고, 내 의식이 멀어져 갔다.
이제 눈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너무 고통스럽다 보니 시야가 온통 하얗게 변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마나 감지를 활성화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인간 여왕과 나 사이에 빛나는 마나의 끈이 이어져 있었다.
내 쪽을 향하는 마나의 끝은 바늘처럼 뾰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