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한다! 귀관들은 고통을 이겨내고 여기 도달했다. 이제 정식 군단병이 되기 위한 마지막 과정을 거칠 때가 됐다.”
티투스가 몸을 돌려 벽에 늘어선 갑옷들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갑옷들은 수천 년 전 대격변 당시에 레기온의 기술자들이 개발한 물건이다. 그때는 마법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였다. 레기온의 창시자들은 몬스터들을 물리치고 문명을 보호할 방법을 찾기 위해 자신들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실험했지. 귀관들이 받았던 세례 또한 그런 방법들 중 하나였고, 이 갑옷들도 마찬가지다.”
티투스가 가장 가까이 있는 갑옷으로 다가가서 돌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표면을 두드렸다.
그러자 단단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갑옷들은 마치 거인처럼 크고 육중해 보였다.
심지어 기골이 장대한 티투스조차 그렇게 무거운 갑옷을 입고 움직이기는 무리일 것 같았다.
도넬란은 특히 더 당황하고 있었다.
마법사인 도넬란은 언제나 가벼운 가죽 갑옷만 걸치는 일에 익숙했다.
그보다 무거운 갑옷은 이동 속도를 느리게 만들어서, 전투시 도넬란이 필요한 때와 장소에 있기 어렵게 만들었다.
물론 레기온은 천으로 된 로브를 걸치고 전투 훈련은 거의 받은 적이 없는 ‘나약한’ 마법사들을 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어떤 조직에서는 마법사들이 거의 모든 시간을 연구에 소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기온의 접근법은 달랐다.
도넬란도 철저한 육체 단련은 물론 가죽 갑옷을 비롯한 장비를 관리하는 방법부터 지팡이로, 심지어 맨손으로도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설마하니 자신이 저런 갑옷을 입고 싸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것들은 심연의 갑옷이라고 불리운다.”
티투스가 거의 갑옷을 숭배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대격변 당시의 놀라운 기술 수준을 재현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바로 여기 라일레에서, 이 갑옷들을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일에 성공했지.”
사령관의 말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드러났다.
이 심연의 갑옷이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걸까?
신병들은 거대한 갑옷을 열심히 쳐다보며 그 가치를 가늠해 보려고 애썼다.
그 모습을 보며 티투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실제로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심연의 갑옷이 어떤 물건인지 깨닫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신병들이 충분히 감탄하지 않는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갑옷을 시험해 보기 전에 귀관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클래스 변경이지.”
그 말을 듣고 미린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클래스 변경이라고?
지금?
“의아하겠지만 귀관들 모두 클래스 변경의 조건을 충족했다. 우리도 바보는 아니니까.”
티투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한 번에 한 명씩 앞으로 나서면 내가 직접 클래스를 변경해 주겠다.”
티투스가 첫 번째 신병에게 앞으로 나서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병사의 전신이 클래스 변경을 의미하는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티투스는 클래스 변경을 마친 병사에게 갑옷들 중 하나 앞에 서게 시킨 다음, 또다른 병사를 불렀다.
그리고 곧 도넬란의 차례가 되었다.
도넬란은 불안한 표정으로 티투스를 향해 다가갔다.
“걱정하지 말게, 괜찮을 테니까.”
티투스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도넬란은 가만히 사령관을 응시했다.
이 반백의 노병이 이렇게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는 아주 드물었다.
“저는 아직 현재 클래스를 완벽하게 마스터하지 못했습니다, 사령관님.”
도넬란이 몇 걸음을 남겨두고 용기를 내서 말했다.
“지금 제가 클래스 변경을 하는 게 정말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티투스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이해하게 될 걸세. 앞으로 나서게.”
도넬란이 마지막 몇 걸음을 마저 다가갔다.
티투스가 도넬란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머리 속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심연의 군단병으로 클래스를 변경하겠습니까?]
뭐라고?!
도넬란은 잠시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
심연의 군단이 실제로 시스템이 지원하는 클래스였다는 말인가?
도넬란으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시스템이 어떤 조직을 인지하는 경우 자체가 너무 드물어서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변경!
도넬란이 망설임 없이 생각했다.
이렇게 유니크하고 레어한 클래스 변경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잠시 후 익숙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며, 시스템이 새로운 클래스에 대한 지식과 스킬을 도넬란의 머리 속에 주입했다.
티투스는 도넬란에게 앞선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심연의 갑옷들 중 하나 앞에 가서 서라고 손짓했다.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도넬란은 자신에게 할당된 갑옷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자 자신에게 주어진 갑옷이 좌우의 다른 갑옷들보다 더 가볍고 날씬한 형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동성과 조작성을 좀 더 중시한 형태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도넬란이 입고 움직이기에는 지나치게 육중한 갑옷이었다.
아니면···
가능할까?
도넬란은 머리 속으로 재빨리 상태창을 열어서, 클래스 변경과 함께 새로 생긴 스킬들을 확인했다.
예상했던 대로 심연의 갑옷 운용이라는 1레벨 스킬이 존재했다.
나머지 신병들이 클래스 변경을 거치는 동안, 도넬란은 머리 속에 쏟아져 들어온 지식을 조금 더 소화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자신의 앞에 있는 갑옷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정보만 가지고도, 도넬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갑옷이 아니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술품이었다!
갑옷에 새겨진 마법진, 가느다란 크리스탈 전선들, 장갑의 재료인 합금까지···
하나하나가 말도 안 되는 물건들이었다.
모든 훈련병이 클래스 변경을 마치고 갑옷 앞에 서자, 사령관이 갑옷 입는 법을 설명했다.
신병들은 모두 갑옷에 대한 지식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넬란은 한 번 해보기로 결심하고 갑옷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한 손을 흉갑 부위에 올렸다.
···
이런 느낌인가?
새로 얻은 지식에 따르면, 도넬란에게 주어진 갑옷은 착용자의 근력이 아니라 마나에 의해 움직였다.
원래 이렇게 육중한 물건을 움직이라면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몬스터 코어를 써야 했지만, 놀랍게도 이 갑옷에는 코어가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갑옷을 입고 있는 군단병의 몸으로부터 마나를 끌어냈다.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단병들의 몸 속에는 마나가 주입되어 있었고, 던전의 공기 중에서 빠른 속도로 마나를 흡수할 수도 있었다.
갑옷에 들어가 있는 놀라운 마법 공학이 그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도넬란은 자신의 몸에서 갑옷으로, 마나가 서서히 흘러 들어가는 걸 느꼈다.
시간이 지나자 갑옷의 표면에 새겨진 수천 개의 작은 룬 문자들이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도넬란이 손을 대고 있는 흉갑 부위에서 시작해 갑옷의 전신으로 퍼졌다.
그리고 마침내 갑옷이 움직였다.
스스로 분해된 갑옷이 한 조각씩 공중을 날아서 도넬란의 몸을 향했다.
수많은 작은 금속판들이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도넬란의 팔과 다리, 몸통을 감쌌다.
발목 주위에서 완성된 거대한 금속 부츠가 도넬란의 몸을 위로 들어올렸다.
마지막으로 도넬란의 머리에 씌워진 투구가 어깨 부분과 결합했다.
심연의 갑옷을 착용한 느낌은 기이했다.
마치 무덤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드는 동시에, 갑옷이 육체는 물론 정신에 연결된 두 번째 피부 같기도 했다.
갑옷은 놀랍도록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입었다는 실감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귀관들은 이제 그 느낌에 익숙해져야 한다.”
티투스가 갑옷을 착용한 신병들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귀관들은 그 갑옷을 입은 채로 훈련을 받으며 스킬을 세 번째 단계까지 업그레이드할 것이다. 이게 우리가 이 아래에서 싸우는 방식이다. 지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새로운 여명
어쩜 예쁘기도 하지···
저 티 없이 맑고 하얀 모습이라니!
평화롭게 잠든 채 깨어나서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을 때를 기다리고 있구나.
잘 자렴, 아가들아.
너희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 세계는 너희 것이란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너희는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누비며, 우리 가족에게 번영을 가져올 테니까.
우리의 적들은 위풍당당한 너희 모습을 보자 마자 도망칠 테고···
결국에는 너희들의 강력한 턱 아래 우리 가족의 식량이 될 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거란다, 사랑스러운 아가들아!
[주인님.]
뭐? 왜!
[크리니스, 왜 내가 알과 함께 하는 시간을 방해하는 거야?]
[죄송해요, 주인님. 하지만 아래쪽 통로에서 또다시 웨이브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아요.]
하아아.
어리석은 몬스터 놈들은 도무지 포기를 모르는군!
아무래도 알들이 깨어나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지난 한 주 동안 계속된 웨이브는 내게 끝없는 두통을, 그리고 둥지에 상당한 손실을 초래했다.
조만간 저 아래의 악어 놈들을 손봐 줄 필요가 있었다.
[곧 갈게, 크리니스. 일어나, 타이니! 싸움이야!]
[응? 오오오! 싸움!]
···
나는 마지 못해 산란실을 차지하고 있는 스무 개의 작고 하얀 구체들을 떠났다.
산란실에 알이 스무 개밖에 없다 보니 수많은 일개미들이 부지런히 돌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직접 와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알들이 둥지에 가져올 미래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 알들을 만들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좀 보면서 행복해하겠다는데 그걸 방해하다니, 빌어먹을 몬스터 놈들!
사흘 전, 드디어 충분한 바이오매스를 축적한 여왕이 이 스무 개의 알들을 낳았다.
이제 며칠 후면 알들이 부화할 테고, 다시 2주가 지나면 유충들이 번데기가 되었다가···
마침내 작은 개미로 탈바꿈해 내 지도를 받게 될 것이다.
으으 너무 길다!
일개미들의 능력치를 높이기 위해 발달 기간을 늘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지만···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마치 트리 아래 놓인 선물 상자를 쳐다보고 있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기다림이 정말이지 고문이나 다름없군!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둥지의 수직 통로를 내려갔다.
여왕의 방을 지나자 평소에 나와 펫들이 머무는 구역이 나왔다.
최근에 방을 좀 넓혔는데, 주로 타이니가 운신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그리고 지난 주 내내 일정한 간격으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과 좀 더 편하게 싸우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펫들과 나는 스킬 훈련을 하면서, 지름길을 통해 던전 깊이 내려가 우리와 여왕을 위한 바이오매스를 수확하곤 했다.
다들 스킬 레벨이 상당히 올라서 전투 효율이 꽤 높아졌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결국 내 펫들이 알아서 스킬 포인트를 쓰고 바이오매스로 변이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어쨌든 그러던 중에 두 차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타이니와 내가 던전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둥지를 지키라고 남겨뒀던 크리니스가 한 차례의 웨이브를 홀로 상대해야 했다.
다행히 위쪽 방에 있던 개미들이 이변을 알아차리고 달려와 크리니스를 도왔다.
그래서 타이니와 내가 돌아왔을 때에는 웨이브가 이미 정리된 뒤였고, 죽거나 다친 개미들도 많지 않았다.
그 뒤로 우리는 좀 더 조심하면서, 우리를 지나쳐 올라가는 몬스터들이 없는지 계속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사고가 터졌다.
한 무리의 모험가들이 어떻게 샛길을 찾아서, 둥지를 거치지 않고 지상으로 올라온 것이다.
나는 몬스터 무리와 마주친 지상의 개미들이 증원을 요청할 때까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여왕의 방에서 어머니를 호위하던 개미들이 요청을 받고 달려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부랴부랴 지상으로 올라갔다.
결국 몬스터들을 찾아내서 처리하기는 했지만, 그 사이 상당한 숫자의 개미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하마터면 인간 피난민들도 말려들 뻔했다.
싸움이 정착지 바로 근처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둥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 뒤로 인간들은 개미 몬스터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개미들이 점점 더 커지는 정착지 주위를 지나가기라도 하면, 인간들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거나 환호를 보냈다.
···뭔가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 뒤로 우리는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가능하면 당장 던전 속의 늪지대로 달려가서 멍청한 악어들의 면상을 턱으로 으깨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둥지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 먼저였다.
어쨌든 그게 며칠 전까지 벌어진 사건들이었다.
우리는 꾸준히 힘을 기르면서 늪지대로 쳐들어가 개활지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우리 가족을 건드리고 무사할 수는 없지!
방으로 들어가자 크리니스와 타이니가 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크리니스는 촉수를 한계까지 늘려서 통로 아래쪽으로 뻗어 놓고 있었다.
통로의 진동을 감지해서 몬스터들의 출현을 미리 알아차리기 위해서였다.
[촉수 거두고 전투 준비해, 크리니스.]
[네, 주인님.]
공포의 테니스 공이 최대한 멀리 닿기 위해 얇은 실처럼 늘렸던 촉수를 다시 거둬들였다.
그리고 전투에 적합한 크기로 몸집을 불린 뒤, 적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타이니는 이미 전투 태세였다.
마치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계속해서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팔 부위의 은빛 털에는 이미 전류가 번쩍이며 흐르고 있었다.
스킬들을 올리고 나자 타이니는 전보다 더 전투에 집착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일이 가능할 줄도 몰랐지만···
아마 스킬들 덕분에 싸움이 더 즐거워진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 자식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타이니가 흥분해서 아래쪽으로 이어진 통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원숭이 자식··· 가자, 크리니스!]
나와 크리니스는 서둘러 타이니의 뒤를 쫓았다.
앞쪽에서는 타이니가 마치 은빛 털의 가젤처럼 우아하게 팔다리를 놀리며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