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고요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 감지 더듬이와 360도를 볼 수 있는 시각, 청각, 후각이 수많은 정보를 전달하고 그 결과 갖가지 계획, 생각, 걱정과 잡념이 가득했는데···
이제는 조용할 뿐이었다.
사실 처음 구입할 때는, 이 스킬의 효과가 이 정도일 줄 몰랐다.
레벨 1 명상 스킬이 뭐 얼마나 대단할까 싶었다.
기껏해야 좀 더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정도를 기대했는데···
실제로는 마치 우주 공간에 홀로 떠 있는 수준이었다.
내 정신이 진공 상태로 봉인되어, 물리적인 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느낌이었다.
물리적인 세계의 온갖 자극들이 폭풍에 휩쓸린 먼지처럼 멀리 떠내려갔다.
명상 스킬의 효과는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문제였다.
한 번은 몬스터가 내 더듬이를 물어 뜯는데도 몰랐을 정도다.
바이브가 그 그림자 야수를 몸통 박치기로 밀어내지 않았다면, 아마 놈이 내 머리를 몸통에서 떼어놓을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른 채 주문을 만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스킬을 활성화하는 순간에도 몹시 불안했지만, 일단 명상 상태에 들어가자 그런 걱정까지 모두 사라졌다.
내 머리 속이 마치 고요한 호수처럼 변했다.
물론 안에서 거대 악어가 헤엄치지 않는 호수 말이다.
그 상태로 주문을 만드는 건 너무 쉬웠다.
평소보다 훨씬 더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나가 내 의지에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며 춤추듯 복잡한 패턴을 완성했다.
세 줄기의 중력 에너지가 내 보조 뇌들의 지시에 따라 소용돌이치며 둥근 형상으로 뭉쳤다.
나는 내 원래 두뇌의 여력까지 모두 쏟아 부었다.
엄청나게 강력한 에너지의 구체가 머리 속에 선명하게 떠올라서, 생각만으로 간단하게 압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구체가 뭔가 다른 느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바이브, 우리 새 친구에게 산성 용액을 몇 발 날려줘. 여유를 부리는 모양인데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어 주자고.”
“네!”
바이브가 꽁무니를 적에게 겨누더니 산성 용액을 발사했다.
악어는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면서, 때때로 물 속의 꼬리를 흔들어 육중한 몸에 추진력을 부여했다.
나는 놈의 새빨간 두 눈에 드러난 자신감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이브의 산성 용액이 명중하자, 악어가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길다란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하품인가?
악어가 늪에 반쯤 잠겨 있었기 때문에, 산성 용액이 상당 부분 물 속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분명 놈의 머리에도 적지 않은 양이 튀었다.
시간이 지나자 놈의 콧잔등에 지글거리는 거품이 생기고, 뜨거운 김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중력 마나 분비선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로 구체의 밀도를 더욱 높였다.
확실히 저 악어는 뭔가 다른데···
그 다른 점을 알아볼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만, 명상 스킬로 머리가 맑아진 덕분에 평소보다 날카로운 관찰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어나, 타이니. 싸울 시간이야.]
바로 조금 전까지 산성 용액이 악어의 얼굴을 녹이고 있었는데···
벌써 살이 빠른 속도로 아무는 중이었다.
아니 회복 능력 무엇?!
보이지 않는 위협
거대한 악어는 느긋하게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바이브가 향상된 산성 용액을 연거푸 쐈지만 상처도 남지 않을 걸 보면, 뭔가 굉장히 강력한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피부와 관련된 업그레이드인 걸까?
아무리 뇌가 콩알 만한 악어라도 저렇게 작은 상처로 재생 분비선을 낭비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악어가 여유를 부리는 사이···
내 가장 강력한 무기인 중력 폭탄을 만들기 시작했다.
중력 마나가 내 안에서 강하게 요동치며, 세 줄기로 나뉘어 곧 폭탄이 될 단단한 구체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진한 보라색이던 구체는 점점 검게 변했다.
색만 변하는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작게 압축되며 내부의 밀도를 높였다.
나는 계속 의지력을 발휘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구체 안에 쏟아 부었다.
이 멍청이가 감히 우리를 우습게 본다 이거지?
절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해 주마!
아··· 아니지 죽일 거니까 잊을 수 없다는 건 좀 말이 안 되는군.
크리니스가 천천히 촉수를 뻗으며 내 등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악어 몬스터가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속도를 높일 걸 대비해서 미리 전투 태세를 취하려는 듯했다.
타이니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 앉은 채, 마치 생일 케이크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악어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만 녀석은 내가 아까 내린 명령을 거두지 않는 이상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명령을 거둘 생각이 전혀 없었고 말이다.
그러면 일어서자 마자 악어 몬스터를 향해 달려가서 주먹을 휘두를 게 뻔하니···
여느 때라면 타이니가 날뛰는 걸 굳이 막지 않겠지만, 저 악어는 우리가 처음 접하는 변종이라 좀 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미니 블랙홀로 악어를 증발시켜 버릴 계획이라···
혹시라도 타이니가 주문에 같이 끌려 들어가는 불상사를 막아야 했다.
“바이브, 내 측면을 엄호해 줘. 놈에게 잡히지 않게 조심하고. 만약 다른 몬스터가 방해하려 들면 공격해도 좋아.”
“정말요?! 예이!”
바이브의 목소리··· 아니 페로몬이 내 오른쪽에서 울렸다.
소리 없이 소통할 수 있다는 건 개미 종족의 커다란 장점이었다.
페로몬 언어는 정말 유용했다.
인간들도 언젠가 유전적인 조작이나 뭐 그런 방법으로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개미가 인간보다 우월하지 않은 면이 없잖아?
두뇌만 빼고··· 그런데 나는 인간의 두뇌를 가지고 있지!
두 종족의 장점만 모아 놓은 셈이다.
악어는 이제 꽤 가까이 다가왔다.
놈은 우리가 서 있는 육지로 다리를 뻗어, 물 속에서 기어 나왔다.
붉은 눈이 사악하게 빛났고, 거대한 턱은 마치 히죽 웃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스스···”
악어가 목 안쪽에서 내는 낮은 소리가 우리의 귀에 울렸다.
놈은 곱빼기 악어보다 훨씬 더 굵고 길어 보이는 앞다리로 바닥을 밀며 몸을 일으켰다.
위로··· 위로··· 계속 위로···
완전히 일어선 악어는 심지어 타이니보다 훨씬 키가 컸다!
그야말로 엄청난 덩치에, 전신이 육중한 근육질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니 오히려 안심이 되기도 했다.
놈이 거의 모든 진화 에너지를 힘 능력치에 쏟았을 뿐 아니라, 크기를 우선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저 악어에 비해서 타이니의 능력치는 좀 더 균형이 잡혀 있었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 근육의 밀도 또한 높았고, 그래서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이 악어도 나름 빠르겠지만···
우리처럼 매번 특별 진화를 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충분히 감당할 만한 능력치를 가졌을 터였다.
어쨌든 두 발로 일어선 악어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들쭉날쭉한 이가 빛을 받아 번쩍였다.
놈은 마치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라는 듯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악어계의 타이니라도 되는 건가?
악어들 중에서도 특히 멍청한 변종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보니, 타이니가 눈을 반짝이며 악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뭘 좋아하고 있는 거야?
잠깐, 저건 뭐지···
지금 포즈 취하는 건가?
그러네!
타이니는 앉은 상태로 두 팔과 어깨에 힘을 줘서, 털 아래의 근육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마 악어의 도전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근육이라면 질 수 없으니까 말이다!
···
바보들인가?
나는 주문을 마무리하며 눈 앞의 악어를 신중하게 살폈다.
처음 상대해 보는 변종이라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중력 폭탄에 담긴 엄청난 에너지를 지탱하느라 주 두뇌에 부담이 가기 시작했다.
주준이 계속 꿈틀거리며 내 통제를 벗어나려 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중력 폭탄이 나를 그대로 빨아들여 압축해 버릴지도 몰랐다.
[강력한 마나 스킬이 레벨 8이 되었습니다.]
오, 좀 낫군···
이 새로운 변종은 이전 진화 단계로 보이는 곱빼기 악어보다 훨씬 더 크고 튼튼해 보였다.
심지어 배 부위도 밝은 색 피부가 아니라 갑옷처럼 두꺼운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전체적으로 비늘의 색이 더 진했고, 더 빽빽했다.
얼굴도 곱빼기 악어보다 더 크고 넓적했다.
그 중 일부는 변이의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원래 이런 형태의 변종 같았다.
이 짐승은 처음부터 난폭한 파괴 전차로 설계된 것이다.
공격을 몸으로 버티고 설사 피해를 입어도 빠르게 회복하면서, 적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존재 말이다.
그때 갑자기 악어가 주둥이를 열었다.
놈의 목구멍 안쪽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이런!
중력 폭탄!
슈우우우우웅.
악어가 불꽃을 토하려는 걸 보고, 나는 당황해서 곧바로 중력 폭탄을 날렸다.
어두운 색의 구체가 허공을 가르며 악어를 향해 날아갔다.
채 2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던 악어가 그대로 입을 벌리고, 구체를 향해 불꽃을 토해냈다.
아마 나처럼 작은 개미가 날린 주문 정도는 그게 뭐든 어렵지 않게 태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큰 실수였다.
휘웅!
구체는 불꽃을 그대로 삼켜버린 뒤, 점점 커지며 주위의 모든 걸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걸 삼키려는 블랙홀처럼···
···
좀 너무···
가까운가?
[타이니, 일어나서 달려!]
도망치자!
고급 질주!
주문이 우리마저 빨아들이려 하는 걸 느낀 나는 가느다란 다리들을 미친듯이 놀렸다.
빨리 빨리 빨리 빨리!
공기, 잎사귀, 나뭇가지 그리고 물까지.
그야말로 온갖 것들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 뒤쪽의 구체로 빨려 들어갔다.
멍청이 같으니···!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가까이서 저 주문을 쓴 거지?
미친듯이 도망가던 와중에, 커다란 악어의 운명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벨 17 이모탈리스 가라로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이름에 이모탈이 들어가는 것 치고는 시시한 최후로군···
마침내 주문의 지속시간이 끝난 뒤, 우리는 악어가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땅이 패여 생긴 분화구 한복판에 작고 단단해 보이는 구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주문의 유일한 단점은, 적을 해치우고 나서도 바이오매스를 즐길 수 없다는 거였다.
젠장···
물론 이 구체를 먹으려고 해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안에 악어가 들어 있기는 할 테니까.
문제는 그 밖에도 진흙, 흙탕물, 잎사귀, 나뭇가지 그리고 내가 모르는 온갖 재료들 역시 들어가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타이니조차 회의적인 눈빛으로 구체를 쳐다봤다.
[“어··· 누구 이거 먹어볼래?”]
“아뇨!”
[나빠.]
[죄송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할게요, 주인님.]
역시 그렇겠지···
+
예상치 못하게 이모탈리스 가라로쉬(그러니까··· 죽지 않는 가라로쉬? 정보 잠금 해제 없이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와 마주치는 바람에, 탐험 진도가 느려졌다.
개활지의 몬스터 밀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악어들 뿐 아니라, 원래 이곳에 살고 있었던 것 같은 몬스터들도 여러 종류가 눈에 띄었다.
한 번은 하마 거북 한 마리가 몰래 접근해서 타이니의 팔을 물려고 했다.
하지만 타이니가 늦지 않게 그 공격을 피하는 사이, 내가 중력 화살로 놈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 함께 달려들어 죽였다.
육중한 몸집은 놈의 강점이지만, 중력에 짓눌리는 상태에서는 오히려 약점으로 변했다.
헤헤.
단지 몬스터만 늘어난 게 아니라, 개활지에 드리운 압박감도 점점 강해졌다.
이제는 마치 안개처럼 자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의지력이 상당히 높은 나조차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이 정도 깊이 들어오자, 압박감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공포 그리고 복종의 요구였다.
이런 오러는 어떤 분비선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엄청나게 강력한 코어의 부산물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개활지에 드리워진 이 압박감이 갓 태어난 몬스터들의 의지를 조종하며 본능을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어떤 몬스터가 이런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그 질문의 답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중이라고 생각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괜찮아? 압박감 때문에 불편할 텐데.”]
[저는··· 괜찮아요, 주인님. 절대로 주인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나는 크리니스가 보여주는 충성심이 만족스러우면서도, 녀석의 자기 보호 본능이 부족한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크리니스는 타이니와 달리 나를 향해 거의 광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둘의 차이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