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실망시킬까 봐 그러는 게 아냐, 크리니스. 그냥 네가 괜찮은지 걱정되는 거지. 우리 모두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면 후퇴하는 편이 나을 거야.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줘야 돼.]
[그렇게 걱정해 주시다니 감동이에요, 주인님! 저는 괜찮을 거예요! 제가 방해가 될 것 같으면 꼭 말씀드릴게요.]
[그래, 착하다.]
나는 더듬이 하나를 뒤로 구부려서 내 등 위에 앉아있는 크리니스를 몇 차례 두드렸다.
그러자 크리니스의 몸이 납작하게 퍼졌다.
테니스 공 모양의 몬스터가 순식간에 원반으로 변했다.
흠···
[너는 어때 타이니? 괜찮아?]
내가 타이니에게 물었다.
[으음···]
타이니가 잠시 뜸을 들였다.
녀석의 얼굴을 보니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정신적 능력치가 낮아서 압박감의 영향도 가장 심하게 받는 듯했다.
[싸워야 돼.]
타이니가 마침내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공포와 복종을 요구하는 압박감이 계속 느껴지니, 전투의 열기와 아드레날린으로 그 감정을 이겨야 한다고 판단한 듯했다.
···아니면 그냥 기분이 나빠서 뭐라도 패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았다.
“너는 어때, 바이브? 괜찮아?”
더 이상 꼬마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커진 병정 개미는 평소보다 훨씬 차분한 상태였다.
놀랍게도 항상 넘쳐 흐르던 바이브의 활기와 열정도 이런 압박감 속에서는 힘을 잃어버렸다.
“괜찮아요.”
바이브가 힘없이 대답했다.
“괜찮을 거야, 바이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바이브에게 다가가서 더듬이로 녀석의 더듬이를 두드렸다.
개미 식의 하이파이브였다.
“이 괴물 악어를 찾아서 물리치면, 우리 둥지가 여기 있는 모든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될 거야. 더 이상 몬스터 웨이브를 걱정할 필요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우리가 놈을 잡아먹을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마!”
“맞아요!”
바이브가 조금 더 생기 넘치는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그 모습을 기꺼워하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이 정도의 압박감을 풍기는 몬스터라면 얼마나 강하겠어? 바이오매스가 얼마나 많을까? 아마 한 입 먹을 때마다 바이오매스가 1씩 생길 거라고. 게다가 크기도 엄청나게 클 거야. 그러니까 그 놈 한 마리가 우리에게 줄 바이오매스를 생각하면··· 지금 비 오는 건가?”
풍부한 바이오매스에 대한 상상과 바이브의 눈에 돌아오기 시작한 총기에 집중한 나머지, 타이니가 다가와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줄도 몰랐다.
녀석은 바이오매스 이야기를 듣자 입을 헤 벌리고 내 소중한 다이아몬드 갑각에 침을 한 바가지나 흘렸다!
[젠장, 타이니! 침 좀 그만 흘려! 이런···]
[더러워! 어서 주인님을 깨끗하게 해 드리고 무례한 행동을 사죄드려!]
크리니스가 역정을 내며 타이니를 나무랐다.
[아냐, 굳이 그럴 필요는...]
내가 재빨리 말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동료 펫의 질책을 받자 타이니가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재빨리 크리니스가 시킨 대로 했다.
커다란 두 손으로 나를 들어서 바로 옆에 있는 물 웅덩이에 던진 것이다.
크리니스가 안간힘을 다해 공중을 날아가는 내 등에 매달렸다.
결국 우리는 함께 물 속으로 들어갔다.
풍덩!
나는 축축하게 젖은 크리니스를 등에 업은 채로 짜증스럽게 물에서 걸어 나왔다.
매우 뿌듯한 표정으로 물가에 서 있는 타이니 옆에, 바이브가 누워서 공중에 다리를 휘두르며 웃고 있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
타이니도 보람 찬 미소를 지으며 깨끗해진 나를 쳐다봤다.
[“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녀석들이 웃는 걸 보자 기분이 좋았다.
나는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내 몸은 갑각이라 물이 묻어도 별 탈이 없지만···
무게가 늘어난 걸 보니 크리니스의 피부는 방수가 아닌 모양이었다.
물이 너무 깊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면 크리니스의 무게 때문에 익사했을지도 몰랐다.
뒤쪽 시야를 통해, 크리니스가 촉수 몇 개로 자신의 몸을 감싼 뒤 힘을 줘서 마치 스펀지처럼 물기를 짜내는 모습이 보였다.
크리니스의 몸에서 나온 물이 내 발치에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다시는 날 물 속에 던지지 마, 타이니.]
내가 말했다.
타이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냐···
그래도 다들 긴장이 좀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아아 하하하하 하하하!”
“그만해, 바이브! 별로 웃기지도 않구만!”
“으르르르르··· 스스스스스”
갑자기 낮고 깊은 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다.
주위 나무의 잎사귀가 흔들리고, 뼛속까지 소름이 돋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잠시 잊고 있었던 압박감이 전력으로 내 정신을 짓눌렀다.
놈이 가까이 있다!
나는 두뇌를 풀가동하며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여기서 당할 수는 없지.
어디 한 번 덤벼 봐라, 이 악어 놈아!
야수의 눈 (1)
갑각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던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갑자기 강해진 걸 느꼈다.
그리고 이 기분 나쁜 오러의 근원을 찾기 위해 미친듯이 주위를 살폈다.
놈은 분명히 가까이에 있었다!
어쩌면 우리를 향해 곧장 다가오고 있을 지도 몰랐다.
[“다들 눈 크게 떠! 뭔가 엄청난 놈이 오고 있어!”]
나는 겹눈으로 모든 방향을 철저히 살폈고, 더듬이로는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동시에 가까운 미래를 예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서 내 가장 강력한 공격 수단인 중력 폭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중력 폭탄은 그렇게 거대한 이모탈 악어도 한 방에 죽였다.
아마 이번에 어떤 놈이 나타나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보조 두뇌를 동원해서 중력 에너지를 끌어냈다.
그리고는 내 두뇌로 그 에너지를 강하게 압축했다.
마나가 더 들어갈수록, 구체가 점점 커지면서 어두운 색으로 변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내 원래 두뇌를 사용해서 마나를 압축하는 일은 꽤 위험한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집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놈과 마주치자 마자 날려버릴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일 테니까.
개활지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조금 전까지 주위에 가득하던 다양한 소음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멀리서 뭔가 늪지대의 축축한 땅을 천천히 밟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느리지만 규칙적인 소리였다.
놈의 발소리다!
으으으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재빨리 명상 스킬을 활성화했다.
그러자 긴장감이 가라앉고 머리가 맑아졌다.
모든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진 덕분에, 나는 빠른 속도로 주문 제작에 몰입할 수 있었다.
지금 내게 딱 필요한 스킬이었다.
다른 일행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점점 더 강해지는 압박감을 이겨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타이니의 몸에는 벌써 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녀석의 전신에 넘실대는 전류가 마치 송곳니를 드러내고 위협하는 뱀처럼 보였다.
[크리니스, 내 등에서 내려가. 그리고 옆으로 비켜 있어. 이번에는 네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크리니스에게 말했다.
처음으로, 크리니스는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내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아마 녀석도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크리니스는 즉시 촉수를 뻗어서 몇 걸음 이동한 뒤, 몸을 낮추고 물가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크리니스도 전투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되도록 스스로는 부상을 입지 않으면서 적에게 피해를 입혔으면 하는 바람에 취한 조치였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고 나면 크리니스가 몸을 빼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느린 발소리와 함께 또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뭔가가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을 밀치며 다가오는 소리였다.
멀리서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적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붉은색이 뒤섞인 밝은 초록색 비늘에, 톱니 같은 이빨이 박힌 길고 커다란 주둥이.
그리고 거대한 덩치···
놈은 정말 거대했다.
높이는 물론이고 좌우로 벌어진 크기도 엄청났다.
이건···
초거대 악어로군.
악어 괴물은 두꺼운 발톱으로 주위의 나무들을 밀치며 느긋하게 걸어왔다.
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동안, 나는 마나 감지 스킬을 활성화했다.
마나 감지로 본 악어는 강력한 코어가 발산하는 에너지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놈의 코어는 심지어 여왕보다 더 강력해 보였다.
내가 여태까지 본 코어들 중, 포르모가 타고 있던 지렁이 다음으로 커다란 코어였다.
역시 저 놈이 이 개활지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장본인이 분명했다.
지상에 몬스터 웨이브를 보내서 우리 둥지를 위험하게 만드는 주범이었다.
악어가 나무들 사이로 나오자, 마침내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만약 이 녀석이 개활지에 드리운 압박감의 원인이 아니라면···
진짜 원인이 뭐든 간에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어마어마한 놈이었다.
이 악어의 꼬리는 무려 세 개였다.
초록색 비늘에 붉은색 줄무늬가 들어갔고, 어깨에는 완전히 발달한 팔이 달려 있었다.
특히 끔찍한 부분은 얼굴이었다.
무려 아가리가 위아래로 두 개였다.
도저히 저 따위로 생겨 먹은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지금은 두 개 중 아래쪽 턱이 활짝 열려서, 징그러운 혓바닥이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어이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
내 옆에서 타이니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체중을 한쪽 다리에서 다른 쪽 다리로 이동했다.
녀석의 몸을 타고 흐르는 전류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명상 스킬로 차분해진 나는 타이니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곧 저 악어에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구나···
그리고 차분하게 생각했다.
저 자식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단지 악어가 타이니보다 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문제기는 했다.
키가 타이니의 거의 1.5배는 되어 보였으니까.
타이니도 상당한 덩치지만, 눈 앞의 악어는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정면에서 본 몸의 좌우가 키의 절반에 달했다!
나는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중력 폭탄을 준비하면서, 머리 속으로 악어 괴물의 무게를 추산했다.
대략 6~7톤 정도?
즉, 다 자란 코끼리보다 더 커다란 놈이었다.
맙소사···
이렇게 된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중력 폭탄!
명상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악어의 엄청난 크기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감정을 완벽하게 다스리려면 스킬 레벨을 더 올려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그래서 악어 괴물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마자, 나는 입을 벌리고 미니 블랙홀을 놈에게 날렸다.
후우우우웅.
순수한 중력 에너지를 압축해서 만든 밀도 높은 구체가 총알처럼 회전하며 거대한 악어를 향해 날아갔다.
구체가 공중을 가르며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느라, 귀를 찢을 듯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울렸다.
순간 악어 괴물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놈이 아래쪽 아가리로 토해낸 불꽃이 내 주문을 에워쌌다.
너무 빠르잖아!
적의 엄청난 반응 속도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중력 폭탄에 불꽃을 쏘면 어떻게 되게?
압축되지, 이 바보야!
중력 폭탄은 불꽃에 휩싸인 채로 악어를 향해 계속 날아갔다.
그런데 명상 스킬을 사용한 덕분인지, 평소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불꽃이 내 주문을 갉아먹고 있었다.
마법 포식 불꽃이었다!
이건 좋지 않다!
나는 곧장 보조 두뇌들이 각각 중력 화살을 만들도록 했다.
중력 폭탄이 폭발하기는 하겠지만···
더 이상 그걸로 저 놈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좀 더 장기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타이니! 멀리서 번개를 날려! 턱 두개를 모두 맞추면 좋겠어. 다만 불꽃을 통과해서 쏘지는 말고!]
타이니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지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명령을 이해한 이상 녀석은 무조건 그 말에 따라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