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간이 던전에 들어간다니···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이제 에니드를 찾아온 용건을 말할 때였다.
[부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번 싸움으로 내게 조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내 스킬과 능력을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말야. 당신네 여왕한테 몇 가지를 배우기는 했지만··· 여왕은 아마 내게 최소한의 정보만 말했을 거야. 그러니 당신이 나를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다른 때와 달리 길게 이야기를 하자 에니드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내 의도를 이해하자, 얼굴을 찌푸린 채 손으로 치마를 만지작거렸다.
[나도 그런 쪽을 조금은 알아요. 남편이 평생 던전을 탐험한 고레벨 전사였고, 내게 전투 스킬에 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들려주곤 했으니까요. 하지만 남편은 인간이고 검을 사용했어요. 그러니 남편이 사용했던 스킬들을 당신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에니드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아마 내키지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베인 사제가···]
에니드는 여전히 온 힘을 다해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로브 차림의 사제를 가리켰다.
[그런 질문을 한 대상으로는 가장 적합할 거예요. 길의 사제들은 시스템을 깊이 연구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직업과 관련된 스킬을 익히고 적절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조언하는 역할을 맡고 있거든요. 아마 나보다는 베인 사제가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거예요.]
···
이런.
나는 마지 못해 에니드의 제안에 동의했다.
[좋아, 알았어. 사제에게 내가 대화를 위해 정신적인 연결 고리를 만들 거라고 말해줘.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아, 그리고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다른 사람들도 있어요. 혹시 가능할까요?]
더 있다고?
[먼저 사제랑 이야기를 하고, 그 다음에 생각해 보지.]
에니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제를 향해 다가가서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잠시 후, 사제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
아, 벌써 머리가 아파 온다···
담판
사제는 기쁨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 하나밖에 없는 손을 내 쪽으로 들어올렸다.
어떻게 봐도 숭배의 몸짓이다.
게다가 근처에 있던 다른 피난민들도 눈물을 흘리며 사제의 행동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나를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자···
내 안의 흑염룡이 꿈틀대며 깨어나려 했다.
이대로 인간들 위에 군림하는 개미 신이 되어서···
아니, 닥쳐!
쓰잘데기 없는 생각은 그만!
나는 잠시 마음을 다스렸다.
이렇게 사람들의 숭배를 받으면 과대망상에 빠지기 딱 좋았다.
나 자신을 무슨 신적인 존재로 착각하면 끝이 좋을 리 없었다.
실상은 개미인데 말이지···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모두 속으로 했을 뿐, 겉으로는 더듬이를 몇 차례 움찔거렸을 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설사 내색을 해도 인간들이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정작 격렬한 반응은 다른 쪽에서 나왔다.
에니드를 따라온, 사나운 눈빛의 여자가 이끄는 다섯 명의 무장한 피난민들 말이다.
그 무리는 사람들이 몬스터를 향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자 상당히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
솔직히 저게 정상이지.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몬스터를 숭배할 리 없잖아?
심정적으로는 나도 저 다섯 명에게 동감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좀 이상해···
마을 사람들이 하는 짓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인간을 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이 마을에 멀쩡한 사람도 있긴 있구만.
리더인 젊은 여자가 성난 눈빛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오더니, 에니드의 어깨를 붙잡고 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여자가 에니드를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나빴다.
에니드는 언제나 나와 여기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저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다행히 에니드는 여자의 거친 태도에도 전혀 겁먹은 기색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우리의 연결 고리에 집중했다.
[여기 이 사람은 모렐리아라예요. 지난 몇 주 동안 동료들과 함께 이 주변의 지상 몬스터들과 싸웠다고 하네요. 그러다 최근에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알게 됐고··· 솔직히 말하면 당신을 아주 불신하고 있어요.
방금은 왜 마을 사람들이 당신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행동하냐고 물어봤어요. 그리고 당신이 사람들을 정신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어해요.]
···
내가 이 사람들을 정신 지배한다고?
인간들이 여기 있는 건 내가 원한 일도 아닌데!
[방금 보니까 에니드한테 좀 함부로 대하는 것 같은데. 무슨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고?]
그러자 에니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냥 여기 사람들의 안전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 같아요.]
내가 신음 소리를 냈다.
[정말 이 사람들이 전부 정신 지배를 당하는 상태라고 생각해도 그 안전에 신경 쓸까? 나를 공격하는 대신 당신들을 모두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는 않을까?]
에니드는 그런 가능성을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듯 눈만 깜박거렸다.
[내가 대화를 해 보지. 하지만 또 당신한테 함부로 손을 대면 내가 그 손을 잘라버릴 거라고 전해.]
에니드는 재빨리 문제의 여자를 돌아보며 내 말을 전했다.
여자는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에니드로부터 떨어져서 나를 노려봤다.
손은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올린 채였다.
에효.
별 쓸모도 없는 인간들 때문에 골치 아픈 일만 자꾸 생기는군.
나는 에니드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충격과 실망에 휩싸인 사제를 애써 무시하며, 정신 마법으로 연결 고리를 만들어 불청객에게 연결했다.
[용건이 뭐지?]
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말을 걸자 모렐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내 생각을 들을 수 있나?]
[그래 들을 수 있다. 연결 고리가 생겼으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고생해서 이 마법을 배운 줄 아나?]
나도 모르게 공격적인 말투가 나왔다.
아무래도 좀 자제하는 편이 좋겠군.
개미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이런 문제가 없는데 말이지.
내 말을 듣자 모렐리아는 잔뜩 성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잘 들어, 괴물. 우리 가족은 대대로 몬스터를 사냥해 왔다. 제대로 된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네 머리도 우리 집 벽에 장식으로 걸리게 될 거다.]
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있는 아가씨로군.
[네 레벨이 어지간히 높지 않은 이상 내 머리를 잘라서 가져가는 건 무리일 텐데.]
모렐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군, 몬스터.]
이 여자는 대체 뭐가 불만이야?
내가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유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나는 그런 짜증을 느끼며 대꾸했다.
[넌 내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목숨을 구하고 보호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 한복판에 서서 나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 둘 중 예의를 갖추지 않는 쪽이 누구지?
방금 한 말을 들어보면 넌 몬스터를 죽이는 걸 즐기는 인간이고, 난 인간들을 구한 몬스터다. 그럼 너희 가족보다 내가 더 인간들을 위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말은 아까보다 여자를 훨씬 더 화나게 만든 것 같았다.
검을 뽑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인지 여자의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마 주위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나를 공격하는 일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분노를 주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내 오라비는 던전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고, 내 아버지는 수십 년 동안 심연의 군단에 복무한 영웅이다. 그 분들을 모욕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사실 가족을 건드리는 건 반칙이긴 하지.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사과하지.]
···
[왜?]
···
[사과한다니까?]
···
[···그래서, 아까도 물었지만 용건이 뭔데? 내가 이 사람들을 정신 지배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
[어, 그렇지?]
여자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대답했다.
[그래, 맞아.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의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건 믿을 수가 없어.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서 네가 정신 마법으로 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어.]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빠르게 더듬이를 청소하며 이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앞다리를 들어올려 무릎 뒤쪽의 청소용 털로 더듬이를 깨끗하게 손질하면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분도 아주 좋았다.
사실 인간일 때에는 이렇게 부지런히 씻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잘 들어, 모렐리아. 나도 이 사람들이 여기 있는 걸 원하지 않았어. 우리 둥지가 이쪽으로 이동했는데 인간들이 멋대로 따라온 거라고.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몇 인간의 거주지를 지나치면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거든. 그리고 여기 이 바보가···]
나는 더듬이로 옆에 서 있던 사제를 쿡 찔렀다.
[우리를 쫓아와서 둥지에 보호를 청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지.
지금까지 나는 둥지의 개미들이 여기 이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다른 몬스터들로부터도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정착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어. 그게 다야. 만약 네가 이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대신하고 싶다면 기꺼이 양보하지.]
모렐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두 네가 꾸며낸 말일 수도 있지. 설사 마을 사람들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네가 정신 지배로 기억을 조작했을 수도 있고.]
나는 더듬이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리가 왜 이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는 걸 믿지 못할 거라면, 애초에 왜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한 거야?]
만약 이 여자가 나 대신 마을을 보호하겠다며 나를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건 내게 축복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전에 사제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만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다시는 여기 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걸 이해할 수 없는 거야, 몬스터.]
모렐리아가 정신적으로 소리쳤다.
[왜 넌 이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거지?]
···
[아니··· 이 사람들이 좀 귀찮기는 하지. 나도 그건 동의하지만, 그게 죽일 만큼 큰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어떤 몬스터라도 이 사람들을 보는 즉시 모두 죽였을 거야. 경험치와 식량을 원할 테니까! 이 사람들을 잡아먹으면 너희 둥지가 더 커질 수 있잖아? 그러지 않고 이 사람들을 돕는 이유가 대체 뭔데?]
아하···
이제야 알겠군.
이 여자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을 죽이고 잡아먹는 증오스러운 존재였다.
지금 악어 괴물들이 리리아 전역에서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갑자기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몬스터를 보니 당연히 이상한 생각이 들겠지.
만약 내가 전생에 인간이었고, 그래서 과거의 동족을 죽이거나 잡아먹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 말을 믿을까?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
그럼 뭐라고 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말은, [난 인간이 그리 싫지 않은데. 알고 보면 너희도 꽤 괜찮은 종족이더라고.] 뿐이었다.
흠.
···
모렐리아가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거 참 고집 센 아가씨네.
[우리는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네가 믿지 않을 거라는 점을 확인하지 않았나?]
모렐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럼 내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다들 인내심을 가지고 이 대화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주위에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저 한 여자와 몬스터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장면일 뿐일 텐데 말이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들릴 리가 없는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나와 모렐리아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투명 테니스 경기에서 보이지 않는 공을 눈으로 좇는 것처럼 말이다···
[대답이야 해줄 수 있지만, 되도록 빨리 끝내. 난 할 일이 아주 많거든.]
모렐리아가 인상을 약간 찌푸렸지만,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이 대화는 전적으로 모렐리아가 원해서 하고 있을 뿐···
나로서는 아무런 얻을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외교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얼마 전 엉덩이 절반을 물어뜯긴 경험 때문이었다.
그렇게 큰 부상을 입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천장에 붙어 숨어 다녔던 옛날 생각이 났다.
어느새 적을 만나면 무작정 덤비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거대한 몬스터와 다짜고짜 싸울 생각부터 하다니···
나를 지금까지 살아있게 해 준 초심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갓 부화한 개미였을 때 세운 원칙을 다시 되새겼다.
섣불리 싸움을 벌이지 말자!
언제나 정보 수집이 먼저다!
내가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진 건 모두 내면의 흑염룡 탓이었다.
내 눈 앞에서 사라져라, 오만한 짐승아!
언제나 겸손하자!
언제나 조심하자!
엉덩이를 물리지 말자!
어쨌든 그런 다짐을 가지고, 나는 모렐리아의 질문을 기다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적을 만드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이 여자나 동료들이 얼마나 강할지 모르니...
가능하면 대화로 해결하는 편이 낫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나?]
[그래.]
젠장.
내 대답에 모렐리아의 눈빛이 위험하게 변했다.
나는 서둘러 부연 설명을 했다.
[정당 방위로! 인간들이 둥지를 공격해서 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야. 그걸로 날 비난할 순 없지.
그리고 리리아에 반역이 일어났을 때 너희 여왕이 왕좌를 되찾도록 도우면서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그건 너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러자 모렐리아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니드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란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어. 하지만 너희 둥지가 공격을 받았다는 건 처음 듣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