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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
지난 번에 바이오매스를 한 차례 잔뜩 소모한 뒤로, 다시 200개가 쌓였다.
엄청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양이었다.
이만한 양이라면 세 개의 신체부위를 +15까지 더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진화를 하기 전에 완성하고자 하는 변이 상태에 상당히 근접하는 셈이었다.
···지난 진화 때부터 인내심을 좀 가지고 바이오매스를 꾸준히 모았다면, 이번에 이렇게 고생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래도 이제는 교훈을 얻었으니까.
변이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진화를 하지 말아야지!
모렐리아가 바닥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는 동안, 나는 바이오매스를 소모할 준비를 했다.
크리니스는 벌써 모든 신체 부위가 +10에 가깝게 발달한 상태였다.
이 추세라면 곧 진화할 준비가 끝날 것 같았다.
아직 2단계 진화에 머물고 있는 크리니스는 앞으로 강해질 일만 남아 있었다.
한편 타이니는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신체가 완전히 업그레이드될 때까지 계속해서 바이오매스 포인트를 모으고 쓰는 데 집중해야 했다.
좋아, 그럼...
나는 아직 눈, 더듬이, 재생 분비선, 언어 분비선, 내부 갑각판의 업그레이드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지금까지 모은 바이오매스를 모두 쓰면, 이 중 두 가지만 제외하고 업그레이드를 마칠 수 있었다.
고지가 바로 눈 앞이었다!
자, 그럼 뭐부터 시작할까?
물론 눈이지.
지상에 올라와 보니, 내 시력이 아직도 멀리 있는 물체를 보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던전 안의 개활지는 아무리 넓어도 지상의 벌판 정도로 탁 트인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눈으로도 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상에 올라오니 내 시력이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전방향 초점 겹눈을 +10에서 +15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65 바이오매스가 소모됩니다.]
가자구!
[이 단계에서는 두 가지 변이를 결합하거나, 한 가지 변이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선택지를 고르겠습니까?]
어디 보자···
처음에 나는 전방을 보는 능력에 특화된 장거리 시야 업그레이드를 한 차례 했고, 그 다음으로는 다양한 방향에 초점을 더하는 업그레이드를 택했다.
그 결과 지금 나는 동서남북과 위쪽을 바라볼 때의 시력은 좋았지만, 그 사이사이의 각도를 보려고 하면 여전히 흐릿했다.
지난 두 번의 업그레이드가 모두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나는 변이를 결합하는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좋았어.
일단 눈은 그렇게 정하고, 다음 업그레이드로 넘어가자···
다음 순서는 갑각판 업그레이드가 적당할 것 같았다.
앞으로도 악어 지휘처럼 능력치가 나보다 훨씬 높은 몬스터와 전투를 할 거라면, 방어력을 최대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충격 분산 내부 갑각판을 +15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65 바이오매스가 소모됩니다.]
넵!
[이 단계에서는 두 가지 변이를 결합하거나, 한 가지 변이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선택지를 고르겠습니까?]
이번 선택지는 좀 흥미로웠다.
여태까지 나는 내부 갑각판의 두 가지 기능을 업그레이드했다.
하나는 충격을 분산하는 기능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생 기능이었다.
두 기능 모두 굉장히 유용했다.
충격 분산 기능은 무딘 공격에서 오는 피해를 내부 갑각판에 고루 분산시켜, 잘 부서지지 않게 만들었다.
한편 재생 기능은 갑각판 자체의 회복 속도를 매우 높였다.
이 두 가지 기능은 지금까지 내 생존에 크게 기여했다.
내 갑각은 뚫기도 어렵고, 피해를 입어도 금방 재생됐으니까.
둘 다 유용하니 결합하는 편이 좋겠군!
이제 하나 남았다.
마지막으로는 재생 분비선을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더 크고 위험한 몬스터들과 싸워야 한다면, 피해를 입었을 때 자가 치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아주 중요할 것이다.
특히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다리였다.
내 몸을 덮고 있는 갑각은 진화와 변이를 거듭할 때마다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솔직히 아주 자랑스러웠다.
이렇게 빛나면서 튼튼하기까지 하니까!
하지만 그런 갑각도 내 나뭇가지 같은 다리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몬스터 개미였지만, 내 다리들은 빼빼 마른 데다 부러지기 쉬웠다.
사실 이렇게 얇은 다리로 어떻게 내 몸을 지탱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 마나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겠지···
어쨌든 다리는 내 가장 큰 약점이라, 혹시나 손상이 갈 경우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고 싶었다.
[고속 사지 재생 분비선을 +15로 업그레이드하겠습니까? 65 바이오매스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두 가지 변이를 결합하거나, 한 가지 변이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선택지를 고르겠습니까?]
다리나 더듬이 같은 말단 부위의 재생이 가능해지는 업그레이드와, 그 속도가 빨라지는 업그레이드···
둘 다 유용한 기능이니, 이번에도 강화보다는 조합이다!
좋아, 그럼!
이제 선택지는 다 정해졌으니, 업그레이드를 진행해볼까.
···잠깐!
끔찍한 간지러움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잊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 모렐리아를 쳐다봤다.
얼핏 보면 낮잠을 자는 것 같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이 작은 던전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들에 대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내가 모렐리아 앞에서 땅에 넘어져 이리저리 구르고 몸부림친다면, 개미의 지도자로서 갖고 있던 모든 위엄이 땅에 추락할 텐데!
내 위엄은 곧 둥지의 위엄이기도 한데!
뭐 그건 좀 오버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변이 전에 우선 모렐리아를 밖으로 내보낼 필요가 있었다.
[저기 모렐리아. 나가서 지상의 상황이 어떤지 잠깐 살펴봐 줄 수 있어? 뭔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려서. 우리 개미들은 흙을 통해서 전해지는 진동에 아주 민감하거든. 다 이 놀랍고 훌륭한 더듬이 덕분이지. 괜히 이렇게 긴 게 아니라고! 하하! 하! 하하하!]
좋아, 그럴싸했어.
모렐리아는 내 말을 듣고 한 쪽 눈썹을 치켜들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한번 보고 오지.]
그렇게 말한 뒤, 모렐리아는 몸을 돌려 빠르게 지상으로 올라갔다.
나는 그러자 마자 잽싸게 타이니 뒤로 숨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히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져서, 미친듯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내가 공중으로 흩뿌린 흙이 타이니에게 튀자 녀석이 짜증스럽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고맙게도 움직이지는 않았다.
좋아!
이제 땅에 조그마한 분지도 마련했고, 타이니가 날 가려주고 있기도 하고, 모렐리아도 방을 나갔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변이 확정!
윽!
이렇게 빨리?
이런 젠장!
으아가르가갸가갹!!!
나는 간지러운 감각이 나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동안,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다리를 공중에 마구 휘둘렀다.
이제는 어느새 익숙해진 자세였다.
그나마 모렐리아가 나를 관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되었다.
나의 승리다!
몇 분 뒤, 나와 타이니 그리고 크리니스는 지상으로 나와서 모렐리아와 재회했다.
나는 내가 발작··· 하는 동안 끊어졌던 연결 고리를 다시 만들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 같아?]
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물었다.
[이 근처에 내가 알고 있는 작은 마을이 몇 군데 있어. 그런 마을들에 먼저 들르면 좋을 것 같아. 혹시 생존자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다음에 수도로 가서 상황을 살펴보자.]
[괜찮을 것 같네.]
내가 동의했다.
[둥지를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럼 이제 가볼까?]
타이니, 크리니스, 내가 던전 안에서 코어를 충전하고 모렐리아는 여행용 식량으로 배를 채운 뒤,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좀 더 느리고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몬스터 무리를 뒤쫓는 상황도 아니었고, 괜히 부주의하게 움직이다가 어미 악어의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동 중에도 부지런히 보조 두뇌들로 외부 마나 조작을 연습했다.
덕분에 공기 중에 존재하는 마나로 손실되는 양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 코어에서 빠져나간 마나가 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파악하려고도 해봤다.
만약 공중으로 빠져나가는 거라면 곧바로 손실된 마나를 다시 흡수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마나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중으로 증발하는 건지, 내 몸이 아예 흡수를 해버리는 건지, 아니면 무슨 외부 차원으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하는 건지···
언젠가는 둥지 차원에서 연구해볼 만한 주제 같았다.
모렐리아는 주변 지리를 잘 아는 듯 능숙하게 우리를 인도했다.
모렐리아를 따라 논밭과 흙길로 이동하자, 어람 지나지 않아 외딴 곳에 옹기종기 지어진 집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창고, 헛간, 다락 등을 뒤졌다.
놀랍게도, 마을마다 꽤 높은 비율로 몬스터를 피해 숨어 있던 생존자들이 나왔다.
타이니가 맨 손으로 연 창고 문 뒤에 숨어 있던 한 무리의 지저분한 생존자들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몬스터들이 이 많은 사람들을 그냥 지나쳤지?
아무래도 몬스터들이 사냥감을 찾아서 마을을 구석구석 뒤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 악어 군주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몬스터들이 지상으로 올라오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막상 인간들의 거주지를 파괴하는 자체는 설렁설렁 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마을들은 몬스터의 공격을 좀 더 제대로 받았다.
건물이 불에 타서 무너지고,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 먹히거나 산산이 조각났다.
하지만 좀 더 작은 촌락들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다.
몬스터들이 생존자를 마지막 하나까지 죽이려고 들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건물을 부수고 대충 배를 채운 뒤 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발견된 생존자들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장시간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가, 혹시라도 몬스터가 남아 있을까 봐 문 밖으로 고개도 내밀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다 보니 대부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와 타이니, 크리니스를 보자 마자 공격을 하거나 반대로 숨으려고 들었다.
워낙 겁을 먹은 상태라 이 사람들을 어떻게 남쪽으로 이동하게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모렐리아가 굶주리고 절망에 빠진 생존자들을 차분한 말투로 설득해서 피난을 떠나게 만들었다.
모렐리아가 인간들이 짐을 챙기는 걸 돕는 동안, 우리 몬스터들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만 했다.
물건을 들고 옮기는 것 정도는 도와주려고 했지만, 모렐리아가 그냥 사람들이 알아서 하도록 두라고 만류했다.
그래야 생존자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을 거라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다만 이들이 찾아갈 ‘안전한’ 마을 바로 옆에 몬스터 개미들의 둥지가 있다는 사실을 모렐리아가 충분히 설명했는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자칫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상황이 순식간에 엉망이 될 테니까.
우리는 불과 며칠 만에 리리아 남부를 거의 모두 둘러봤다.
그러다가 진화 단계가 높은 악어 괴물이 끼어 있지 않은 소규모 몬스터 무리도 두세 번 마주쳤다.
놈들을 해치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전투 중에도 스킬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부 마나 조작 스킬의 레벨이 5가 되었다.
나는 스킬을 ‘확장 외부 마나 조작’으로 업그레이드했다.
그러자 신체 외부의 마나를 조작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들이 머리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덕분에 마나를 조작할 수 있는 양이 조금 늘어나기는 했지만,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의지력을 발휘하면, 이전의 두 배···
약 5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마나까지 조작이 가능한 정도였다.
물론 멀리 있는 마나일수록 내 뜻대로 조작하기는 더 어려웠고, 정신력 소모도 그만큼 컸다.
가까이 있는 마나는 보조 두뇌로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지만, 멀리 있는 마나를 다루려고 하다 보면 조금만 지나도 두뇌가 타버릴 듯 과열되곤 했다.
나는 마나 조작 스킬의 레벨를 올리고 기술을 익히면서, 거리는 천천히 늘리기로 했다.
교외 지역을 모두 살펴본 우리는, 다시 한 번 던전으로 물러나서 코어를 충전했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
리리아의 수도라···
오랜만에 가 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