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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의 무기
함정 지역을 지나 두 번째 방벽을 오르기 시작한 몬스터들은, 피에 굶주린 개미들의 벽과 마주쳤다.
병정 개미들은 적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였다.
멀리서 보면 마치 방벽 자체의 높이가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개미들은 서로를 밟고 서서, 앞으로 달려들어 적군을 턱으로 붙잡아 뒤쪽에서 기다리는 동족에게 던져줬다.
여왕이 전선에 도착하자 병사들의 투지가 하늘을 찔렀다.
여왕은 자신의 아이들을 비집고 벽의 가장자리에 도착해, 둥지를 위협하는 몬스터 무리를 내려다봤다.
적진 어딘가 이 공격의 배후가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분노로 끓어올랐다.
놈들은 언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일까?
진짜 적이 나타날 때가지는, 이 졸개들로 자신의 굶주림을 달래야 했다.
여왕의 다리 끝에는 더 이상 일반적인 발톱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가시가 달려 있었다.
여왕은 앞다리를 방벽 너머로 뻗어서, 마치 작살로 사냥을 하듯 몬스터들을 낚아챘다.
푹!
푹!
진화 후에 구입 가능한 스킬들을 검토한 여왕은, 찌르기와 관련된 스킬이 잠금 해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스킬을 익히자 언제 그리고 어떻게 찔러야 가장 효과적으로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들이 저절로 머리 속에 흘러 들어왔다.
이제 여왕은 그 지식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중이었다.
한번 찌를 때 마다, 발 끝의 가시에 몬스터 하나가 정통으로 꿰였다.
그러면 여왕 개미는 뒷다리로 몸을 지탱한 채 앞다리를 들어서 소중한 바이오매스를 아이들에게 넘겨주고, 다시 몬스터 낚시에 나섰다.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몬스터들이 너무 많아서 빗나가는 게 오히려 어려울 정도였다.
여왕은 그저 행복했다.
그간에는 계속 둥지 안에서, 아이들이 자신이 도와줄 수 없는 전투에 출전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여왕은 직접 전장에 나서서 싸울 준비가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싸우며, 무거운 짐을 나눠질 수 있었다.
치열하고 힘든 전투였지만 그만큼 뿌듯했다.
여왕이 발산하는 페로몬에 담긴 만족과 기쁨이 공기 중에 퍼지며, 모든 개미들의 더듬이를 자극했다.
개미들은 여왕의 페로몬에 화답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이 개미들을 사로잡았다.
개미들은 원래부터 알과 애벌레, 그리고 여왕을 지켜야 할 때 가장 맹렬하게 싸웠다.
미래 세대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 강한 개미들은, 그러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래 세대인 알과 애벌레들이 둥지 안에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는 반면···
둥지가 거쳐온 수많은 세대의 현신이나 마찬가지인 여왕이 지금 엄청난 위험에 노출된 상태였다!
본능과 이성의 충돌에서 이성이 점점 패배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위험하다는 사실에, 개미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아낄 필요성을 서서히 잊어갔다.
대신 순수하고 맹목적인 투지가 그 빈 자리를 메웠다.
방벽을 따라 자리잡고 있는 둥지의 개미들은 적군을 물어 뜯기 위해 엄청난 위험을 감수했고, 여왕개미 주변에서는 그런 열정이 더욱더 극에 달했다.
심지어 비전투원 개미들까지 안전한 둥지에서 나와 여왕개미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둥지 꼭대기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빅토르의 가슴에 절망이 차올랐다.
개미들의 정신에 미치는 여왕의 영향이 너무나 컸다.
심지어 빅토르 자신조차 당장 전선으로 달려가 여왕과 적 사이에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의지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그런 충동에 저항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후방에서 둥지의 전략을 이끄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거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의 목소리는 달랐다.
본능은 빅토르에게 당장 달려나가 여왕을 보호하라고, 그러기 위해서 적들을 공격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빅토르는 이게 자신의 본능으로 인한 효과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여왕님이 진화를 통해 고른 선택지가 이런 충동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일정 범위 내에 있는 개미들의 열정을 더욱 불태우는 신체 기관이라거나···
만약 리로이가 아직 저 밖에 있다고 상상해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빅토르가 여왕을 통제할 수는 없었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여왕이 전투에 참여하는 이상 주위의 개미들은 계속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빅토르와 슬론은 여왕이 전투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고려해서 다양한 계획을 세워 놓았다.
하지만 그 영향이 이렇게 강력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칫하면 지금까지 이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쏟아 부은 노력과 전략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직 두 번째 방벽일 뿐인데!
둥지가 마지막 결전을 벌이기 전까지 준비해 놓은 함정과 책략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빅토르가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는 동안, 여왕은 반대로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는 중이었다.
여왕은 오직 아이들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코어에서 빠져나가는 에너지와 마나를 아끼기 위해, 여왕은 찌르기 이상의 공격을 하지 않았다.
물론 공격할 방법은 다양했지만 전투 초반부터 모두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밀려든 몬스터들이 방벽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놈들은 분노로 포효하며 발톱을 마구 휘둘렀지만, 여왕이 턱으로 그 앞을 가로막았다.
우직!
다른 개미들의 턱보다 훨씬 길고 날카로운 여왕의 턱은 한 번에 세 마리의 몬스터를 동강냈다.
여왕은 고개를 뒤로 젖혀 뒤에서 대기 중인 일개미들에게 바이오매스를 던진 뒤, 다시 찌르기 공격을 이어갔다.
방벽 아래의 몬스터들은 여왕 개미의 앞 다리를 물거나 할퀴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진화 후 훨씬 강화된 외골격은 놈들의 공격에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여왕의 발톱에 찍힌 몬스터 두 마리가 더 공중을 날아 방벽 뒤로 넘어갔다.
전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여왕은 자신의 머리 위에서 먹구름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형성되는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 후 하늘에 불빛이 번쩍이더니, 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벼락은 여왕에게 정통으로 명중했다.
여왕은 힘을 아끼면서 자신이 맡은 구역의 몬스터를 쓸어버리는 중이었다.
번개가 여왕의 등을 때리자, 외골격을 통해 침투한 전기가 몸 속에 흘렀다.
여왕의 거대한 몸에서 연기가 피어나며, 살점이 타는 냄새가 공기를 타고 퍼졌다.
어머니가 공격을 받자 개미들은 미친듯이 분노했지만 머리 위의 구름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정작 여왕은 침착했다.
재생 마나 분비선으로 몸 속의 부상을 치유하는 여왕의 더듬이가 은은하게 빛났다.
여왕은 벼락에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치명적인 부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진화로 인해 강화된 신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재생 마나가 몸 속을 흐르고 지나가며, 부상을 입은 근육과 장기들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하지만 벼락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꽈광!
꽈광!
꽈광!
하늘이 엄청난 양의 전기 에너지를 머금고 번쩍였고, 모든 벼락이 여왕의 커다란 몸에 명중했다.
위협을 인식한 카르모도가 마법으로 여왕을 죽이거나, 최소한 약화시키려고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왕은 견뎌냈다.
하늘에서 계속해서 떨어지는 벼락에 개미들은 점점 미쳐갔다.
어머니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여왕은 자가 치유에 집중하며 벼락의 피해를 받은 아이가 없는지 계속해서 확인했다.
벼락이 내리치는 동안에도, 여왕은 커다란 턱으로 자신이 맡은 구역의 방벽을 안전하게 지켜냈다.
“어머니!”
전선으로 달려온 빅토르가 하늘의 올려다보며 외쳤다.
“어머니! 물러나셔야 합니다!”
여왕 개미는 거절의 의미로 더듬이를 흔들었다.
“아직 싸울 수 있단다.”
여왕이 턱으로 몬스터들을 박살내며 대꾸했다.
“내 아이들이 싸우고 있으니, 나도 함께 싸우겠다!”
“몸에서 연기가 나고 계세요! 피해를 입고 계시잖아요!”
빅토르가 사방을 잔뜩 메운 페로몬 사이로 자신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감당할 수 있다. 아이들 보다는 내가 맞는 게 나아.”
여왕이 계속 고집을 부렸다.
빅토르는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싸우고자 하는 자신의 본능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여왕은 후퇴해야 했다.
지금 전투에 참여하기는 시기상조였다!
여기 대선배가 있었더라면!
어머니는 대선배의 말이라면 믿고 따랐다.
대체 진화가 끝날 때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둥지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만약 계속 이렇게 피해를 입으시면 개미들이 벽 너머로 뛰어내릴지도 몰라요! 잠깐이라도 후퇴하셔야 합니다!”
꽈광!
앞이 안보일 듯 환한 불빛과 함께, 하늘의 먹구름에서 엄청난 크기의 벼락이 여왕 개미를 향해 날아왔다.
몸 속의 신체 기관이 타오르며 HP가 곤두박질치는 동안, 여왕 개미는 엄습하는 고통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대로 멈췄다.
“어머니!”
빅토르가 다시 외쳤다.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에, 여왕은 더 많은 치유 마나를 사용했다.
겨우 고통이 여왕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고통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위험이나 위협도 여왕 개미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다.
사실 여왕은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 떨어지는 벼락은, 적이 아이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마나와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는 의미였다.
여왕은 가족을 위한 방벽이 되어 아이들을 지키고자 했다.
여왕은 다시 턱으로 적들을 공격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모두 무시하고 전투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한 개미의 외침이 소음을 뚫고 들려왔다.
“등을 보세요!”
빅토르의 목소리였다.
지휘관 개미는 여왕의 시선을 끌기 위해 적을 등진 채, 방벽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었다.
여왕은 다리를 내밀어 자신보다 훨씬 작은 지휘관 개미를 벽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뒤쪽을 살폈다.
수많은 개미들이 여왕의 등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한 번 더 벼락이 떨어지면 자신들의 몸으로 여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만약 여왕이 욕설을 알았다면, 이 순간 입 밖에 냈을 터였다.
하지만 여왕은 대신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구름이 또다시 천둥 소리를 내며 벼락을 뿌릴 준비를 했다.
여왕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서둘러 둥지로 달려갔다.
여왕이 후퇴하자, 먹구름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카르모도는 여왕이 전선에 나서지 않는 이상 굳이 마나를 낭비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여왕이 전선에서 물러나자, 개미들의 광기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지휘관 개미들은 병사들을 계획에 따라 운용할 수 있었고, 정찰 대원들도 이성을 지배던 분노를 털어내고 다시 전령 역할로 돌아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개미들은 다시 원래 계획대로 싸움을 이어갔다.
침착하게 둥지로 후퇴하는 여왕의 속마음은 답답함으로 들끓고 있었다.
앞장서서 싸우며 가족을 보호하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 더 벼락이 떨어졌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등 위를 뒤덮은 개미들은 모두 죽었을 터였다.
감동으로 마음이 벅찼지만, 동시에 속이 상하기도 했다.
여왕은 아이들이 자신을 지키려다 죽는 걸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왕 자신이 아이들을 위해 싸우다 죽기를 원했다!
여왕과 함께 둥지를 나섰던 비전투원 개미들도 함께 후퇴해서, 어머니의 안전을 위해 사방을 에워쌌다.
둥지의 꼭대기에 도착한 여왕 개미는 수백 미터 떨어져 있는 두 번째 방벽을 돌아봤다.
바로 저기서 자신의 아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중이었다.
잠시지만 여왕도 아이들과 함께 했다.
이 전투가 끝나기 전, 다시 한 번 가족들과 함께 적과 맞서겠다고 여왕은 다짐했다.
여왕은 한숨을 쉬며 어두운 둥지 안으로 들어섰다.
둥지 안에서 코어를 충전하고 부상을 치료한 뒤, 다시 전투에 나설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자신의 역할도 이제 시작이었다.
한편 빅토르는 이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여왕이 계속 둥지 안에 머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전투를 다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여왕과 대선배는 말하자면 비장의 무기였다.
초반에 함부로 보일 수 있는 패가 아니었다.
만약 여왕이 계속해서 전선에 머물다가 결에 가라로쉬를 불러냈다면···
그래서 대선배가 진화를 마치기도 전에 그 괴물이 나섰다면···
재앙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빅토르 자신도 여기 방벽에 있어서는 안됐다.
개미들과 몬스터 무리가 다시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빅토르는 전선에서 물러나 둥지로 돌아왔다.
둥지 안에서 슬론이 빅토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다시 통제를 되찾았네.”
슬론이 말했다.
“잘했어.”
빅토르가 부정의 의미로 더듬이를 저었다.
“여왕님께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시는 건 시간 문제야. 다음 번에 등장하시면, 절대 후퇴하지 않으려 하실 테고.”
“하지만 이제는 여왕님이 등장하면 어떻게 되는지 미리 알고 있잖아.”
슬론이 말했다.
“다음에 여왕님이 출전하시면, 우리가 모든 패를 다 꺼내야 한다는 의미지.”
그 순간을 상상하자, 빅토르의 몸이 전율했다.
“그러다 여왕님께서 목숨을 잃으실 수도 있어, 슬론.”
슬론이 가까이 다가와서 더듬이 하나로 빅토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린 그런 일은 일어나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빅토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