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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리로이
“빨리 움직여, 슬론!”
빅토르가 느리게 뒤따라오는 동료에게 외쳤다.
“가고 있어!”
슬론이 투덜거렸다.
두 지휘관 개미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전선에 나가 싸운 건 아니지만, 둥지의 작전실에서 전략을 토론하고 계획하고 관리하느라 조금의 휴식도 없이 꼬박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제야 재미 좀 보게 됐는데, 벌써 지친 거야?”
빅토르가 놀렸다.
“자꾸 그러면 가라로쉬의 입 속으로 네 녀석을 밀어 넣어 주겠어.”
슬론이 말했다.
“상관없지. 리로이가 먼저 그 안에 들어가 있다가 나를 밀어낼 테니까.”
다른 동기들보다 조금 더··· 열정적인 리로이의 이름이 나오자, 슬론이 심기가 불편한 듯 더듬이를 튕겼다.
지금은 둥지가 전력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즉 여태껏 둥지에 강제로 묶여 있던 리로이도 다시 방벽으로 나가야 했다.
두 지휘관 개미는 어두운 둥지에서 나와 지상의 밝은 햇빛을 온 몸으로 받았다.
빅토르는 더듬이로 햇빛을 가리려고 애쓰며, 방벽 너머에서 펼쳐지는 학살의 현장을 주의 깊게 살폈다.
높은 둥지 위에서 내려다보니, 이빨 사이로 불꽃이 새어 나오는 가라로쉬의 자녀들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너희 게으름뱅이들이 올 때가 됐다 했지.”
버크가 근처에서 말했다.
“게으름뱅이 아니거든!”
슬론이 반박했다.
“그건 나도 알아.”
버크가 빅토르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쟤 왜 저렇게 예민해?”
“잠을 못 잤어.”
“아하.”
셋은 계속 둥지 꼭대기에서 전선을 관찰했다.
전투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악어 몬스터들이 내뿜는 화염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왕이 전장에 다시 합류하자, 개미들의 투지가 불타고 있었다.
“우리도 어서 내려가야 해.”
슬론이 다급하게 말했다.
“알고 있어.”
빅토르가 주의를 늦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너희가 여왕님을 멈출 수 있을까?”
버크가 두 장교개미들에게 물었다.
“아니, 절대 못하지.”
빅토르가 대답했다.
“지난 번에도 둥지로 후퇴하시라고 설득했잖아. 한번 더 할 수는 없어?”
슬론이 간절하게 물었다.
빅토르는 일곱 번째 방벽에서 펼쳐지는 전투를 향해 더듬이를 흔들었다.
“여왕님께서는 마음을 굳게 먹으셨어. 이 전투에 목숨을 바치시려는 것 같아. 지난 번에 후퇴하신 유일한 이유는 여왕님이 전장에 나가 있는 상황이 더 많은 사상자를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고.
하지만 이제는 후퇴할 생각이 없으시니까, 만약 군체의 개미들이 몸을 던져서 여왕님께 닥친 위험을 막으려고 한다면 그냥 우리를 한쪽으로 밀쳐 버리실 거야.”
“어서 여왕님을 도우러 가야해!”
슬론이 외쳤다.
“당연히 그래야지. 같이 갈 거야, 버크?”
“그래, 가자고!”
그렇게 스무 마리 중 셋은 전투에 가세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
이제는 오직 정면 대결밖에 남지 않았다.
전장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소음이 모든 감각을 지배했다.
몬스터들의 포효 소리, 발톱, 턱과 갑각이 부딪히는 소리···
거기다 개미들이 쏟아내는 수 천 개의 페로몬 메시지와 바이오매스의 악취까지.
그리고 여왕과 가까워질수록 마음 속에서 분노와 투지가 타올랐다.
셋이 방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여왕과 다른 개미들은 해일처럼 적진을 덮쳤다.
산성 용액이 비처럼 퍼붓자, 가라로쉬의 새끼들이 분노와 고통으로 소리를 질렀다.
개미들은 아랑곳 않고 침묵 속에서 싸움을 이어갔다.
방벽 꼭대기까지 기어오른 몬스터들마다 개미 네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전선의 병정 개미들이 적을 턱으로 물어서 벽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면 몸집이 좀 더 작은 개미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고, 몬스터는 곧 개미떼에 뒤덮였다.
이윽고 가라로쉬의 새끼들이 방벽에 도달했다.
놈들이 뿜어내는 불줄기가 치솟아 오르자, 방벽 가장자리에 붙어 싸우던 개미들은 얼른 뒤쪽으로 물러나서 불길을 피했다.
수십 미터나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 열기가 느껴졌다.
버크는 더듬이가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뒤로 피하지 않은 개미가 하나 있었다.
바로 여왕이었다.
불꽃이 갑각을 훑고 지나갔지만, 여왕은 개의치 않았다.
여왕의 관심은 오로지 적군을 향해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자신의 분노를 드러낼 순간이었다!
흉측한 악어 괴물들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여왕개미는 뒷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고개를 높이 들었다가 앞으로 몸을 내밀며 엄청난 양의 산성 용액을 입에서 토해냈다!
여왕의 바로 앞에 있던 가라로쉬의 새끼 하나가 온몸에 산성 용액을 뒤집어쓰고 순식간에 녹아 내렸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가라로쉬의 새끼들이 곧바로 보복에 나섰다.
놈들은 입이 여러 개 달린 머리를 치켜들고 불줄기를 뿜어내며 산성 용액에 대응했다.
하지만 여왕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산성을 토해냈다.
세찬 산성 용액의 격류는 거의 30미터 거리까지 닿았다.
산성 용액과 불길이 만나자, 뜨거운 산성의 증기가 일어나 전장을 뒤덮었다.
증기에 몸이 닿은 몬스터들이 화상을 입고 괴로워했다.
안타깝게도 둥지에 바람 마법사가 없어서, 증기 일부는 방벽 위까지 스멀스멀 올라왔다.
산성 분비선을 바닥내기 싫었던 여왕은 이내 원거리 공격을 멈추고, 대신 턱을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여왕은 복수에 굶주린 상태였다!
“여왕님! 제발 조심하세요!”
황급히 달려오느라 지친 슬론이 겨우 그렇게 말했다.
“난 물러나지 않을 거란다. 이번에는 아니야. 여기는 내가 필요해.”
말다툼으로 시간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여왕이 날카롭게 말했다.
“저도 알아요! 다만··· 제발 다치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
여왕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또다른 개미의 페로몬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 시간은 끝났어, 슬론! 제대로 싸워보자고!”
리로이가 흥분해서 앞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빅토르는 리로이가 돌진하는 모습을 보고 신음했다.
어쩐지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 같은 돌진이었기 때문이다.
“리로이-!”
빅토르가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리로이는 동료들이 자신을 막으려 들 줄 미리 알고, 일부러 이리저리 피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안돼, 슬론! 나는 내 방식대로 싸울 거야!”
리로이는 여왕의 등 위로 뛰어올라, 혼란스러운 전장 한복판에 우뚝 섰다.
그 행동에는 여왕도 놀라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리로이! 멍청한 짓 하지 마!”
“이 날을 기다려왔다!!! 우리의 갑각은 영원히 붉게 빛날 것이다!!! 리로이이이이이!!!”
그렇게 외친 리로이는 혼란스러운 듯한 여왕의 머리 쪽으로 달리더니, 그대로 뛰어내려 공중을 날았다.
얼마나 힘차게 뛰었는지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맙소사 왜 자기 이름을 외치는 거야?!”
슬론이 중어럭렸다.
두 지휘관 개미는 리로이가 방벽 가장자리를 벗어나, 몬스터 무리와 악어들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리로이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둥지의 모든 개미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리로이의 도약을 바라봤다.
이미 투지와 분노에 사로잡혀 있던 개미들은 그 장면에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어머니가 함께하는데, 어떻게 패배할 수 있겠는가?!
개미들은 여태까지 지키던 방벽을 버리고 하나 둘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우리 계획의 일부였다는 걸 리로이가 기억하고 한 일일까?”
빅토르가 슬론에게 물었다.
“글쎄, 아닐 것 같은데.”
멀리서 아래로 떨어진 리로이가 몬스터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가 볼까?”
“좋아!”
빅토르와 슬론은 서로의 더듬이를 두드리며 ‘개미 하이파이브’를 한 뒤, 앞으로 달려나가 벽에서 뛰어내렸다.
두 지휘관 개미는 오랜 고심 끝에 이 계획을 생각해냈다.
그렇게 준비한 ‘리로이 작전’이 드디어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여왕은 아이들이 방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모습을 충격 속에서 지켜보다가, 이내 더듬이에 치유 마나를 가득 머금고 자신도 아래로 내려갔다.
제발 너무 늦지 않았기를!
+
“드디어 우리가 활약할 때가 왔어!”
벨라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우리가 빛날 때지!”
엘리가 동의했다.
“이 축축한 땅굴을 벗어나게 되어서 너무 기뻐.”
벨라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두 코어 조작자 개미들은 여태까지 좁은 지하 통로에 갇혀 있던 동료 조작자들과, 그 충성스러운 펫인 그림자 괴물들을 돌아봤다.
“이제 가도 됩니다! 나갈 시간이에요!”
입구 근처에서 밖을 살피던 정찰대원 하나가 말했다.
“가자!”
엘리가 외치자, 개미와 펫들이 지상으로 이어진 출구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조각가들은 많은 시간을 투자해 이 비밀 통로를 만들었고, 그 사이 코어 조작 개미들은 전술을 다듬으며 전투 직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변이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 가능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정말 우리까지 저 위로 올라가도 괜찮을까?”
엘리간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뭐 그러지 않기로 약속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우리 모두가 참을성을 발휘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거야. 이 작전의 이름이 뭔지 알잖아?”
“좋은 지적이네.”
“그러니까 가자고!”
뒤쪽에서 거대한 그림자 야수 두 마리가 고개를 들고 각자의 주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사실 엘리간트와 벨라는 따로 펫을 가질 계획이 아니었지만···
코어 조작을 연구하는데 직접 펫을 기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게다가 후배들의 스킬 훈련을 지도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려면 직접 펫을 다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엘리와 벨라는 단순히 펫을 만드는 정도를 넘어, 많은 자원을 투자했다.
자기들 몫의 식량까지 양보해 가면서 펫들에게 바이오매스를 제공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깊은 지하에 있는 거지?”
엘리가 지상으로 향하는 좁은 통로를 앞장서서 걸어가는 정찰 대원에게 물었다.
“조금 전까지 있던 방이 30미터 깊이였습니다. 위쪽에 있는 마지막 대기실이 10미터 깊이고요.”
“이렇게 땅굴을 많이 파 놓았는데 지면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게 신기하네.”
벨라가 말했다.
“조각가 개미들이 여러 가지 스킬을 사용해서 그렇습니다.”
정찰병 개미가 대답했다.
조각가 개미들은 점점 더 다양하고 놀라운 기술을 개발했고, 이제 둥지의 모두가 그 공로를 인정했다.
이렇게 훌륭한 채굴 기술을 그 어떤 개미가 무시할 수 있을까?
지상에 가까워지자 둔탁한 소음이 위쪽에서 들려왔다.
좁은 땅굴을 따라 행진하는 개미들과 그림자 야수들의 머리 위로 천장의 흙이 조금씩 흘러내렸다.
개미들과 그림자 야수들은 마치 나선형의 계단처럼 구불구불한 통로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다들 평소보다 더욱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코어 조작 개미들은 각자의 펫과 정신적인 연결 고리로 소통하며 전투를 준비하느라,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곧 일행은 마지막 대기실에 도착했다.
벽에는 여태까지 지나온 길보다 훨씬 더 좁은 통로들이 가득했다.
“각각의 출구마다 정해진 숫자만 들어가야 합니다. 펫이 먼저 들어가고, 코어 조작 개미가 따라 들어가는 겁니다.”
안내를 맡은 정찰병 개미가 속삭였다.
지상의 소음이 점점 커질수록, 개미들은 어서 뛰쳐나가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흙이 갑각을 덮고 더듬이의 민감한 털을 건드려서 개미들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통로가 너무 좁다 보니 멈춰 서서 더듬이를 청소할 수 없다는 점이 특히 답답했다.
그랬다가는 뒤에 따라오는 개미들의 길을 막는 셈이 될 테니까 말이다.
벨라는 더듬이의 흙을 털어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턱을 악물었다.
[자, 가자.]
벨라가 펫들에게 말했다.
[으르렁.]
그림자 야수 두 마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펫들의 지능을 높이지 못한 점이 아쉽기는 했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강력한 전투력이었다.
코어 조작 개미들은 펫의 모든 잠재력을 그 방면에 투자했다.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소음과 열기가 점점 거세졌다.
몇 분 뒤, 마침내 통로의 끝이 보였다.
각각의 통로는 이미 바이오매스가 가득한 함정과 이어져 있었다.
개미들은 흙으로 막혀 있는 출구를 조심스럽게 뚫고 나가야 했다.
벨라는 펫들에게 출구를 막고 있는 부드러운 흙을 발톱으로 긁어내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벽이 무너지자, 소름 끼치는 함정이 나타났다.
제 역할을 톡톡히 한 함정은 바닥이 온통 바이오매스로 가득했다.
벨라는 애써 배고픔을 참았다.
지금은 할 일이 있었다.
통로의 출구가 함정의 바닥에서 2미터 정도 위쪽에 있어서, 어렵지 않게 몬스터들의 사체 위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빛, 열기, 소음이 지상으로 나온 벨라의 감각을 어지럽혔다.
머리 위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몬스터들, 심지어 가라로쉬의 새끼들도 함정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로를 밀치고 있었다.
이어서 더 많은 코어 조작 개미들이 펫과 함께 함정 안쪽으로 쏟아져 나왔다.
곧 함정 안에는 개미들과 그림자 야수들이 득실거렸다.
“이제 때가 됐다!”
벨라가 외쳤다.
“우리 코어 조작 개미들의 힘을 보여주자!”
“전진!”
기운은 넘치게 외쳤지만, 코어 조작 개미들은 직접 전진하는 건 아니었다.
코어 조작 개미들은 조각가들과 함께 가장 몸집이 작은 편에 속했고, 그래서 직접적인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대신 뒤에서 열정적으로 펫들을 응원했다!
전장은 이미 혼돈의 도가니였다.
개미들이 방벽에서 뛰어내려 적과 뒤엉켰고, 심지어 여왕도 아래로 내려와서 더듬이로 치유 마법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그림자 야수 수백 마리가 함정에서 뛰쳐나와 근처의 적을 미친듯이 공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