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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하는 개미
방벽에서 뛰어내린 여왕은 착지하자 땅이 흔들렸다.
운 나쁜 몬스터 몇 마리가 그대로 여왕의 몸에 깔리거나 날카로운 다리 끝에 꿰뚫렸다.
다리에 엄청난 무게가 실렸지만, 여왕개미는 그 충격을 모두 흡수한 뒤 자신의 아이가 떨어진 방향으로 지체없이 달려갔다.
여왕은 치유 마나 분비선 깊숙한 곳에서 끌어낸 밀도 높은 에너지를 더듬이 안으로 주입한 다음 증폭시켰다.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여왕을 따라 방벽에서 뛰어내렸다.
전투는 빠른 속도로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여왕의 머리 속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감정들이 충돌했다.
여왕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운 동시에 매우 뿌듯하기도 했다.
여왕은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오랜 세월 잊고 있던 본능이 기뻐서 춤을 퀐다.
여왕은 몸을 돌려, 사납게 달려드는 곰 몬스터를 날카로운 턱으로 단번에 동강냈다.
머리 속에 시스템의 알림이 울렸지만, 여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여왕의 모든 신경은 더듬이 끝에 맺힌 치유 마나에 쏠려 있었다.
더 이상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나가 모이자, 더듬이 끝에서 눈부신 빛이 폭발하더니 전장으로 넓게 퍼졌다.
치유 마나에 영향을 받는 건 개미들 뿐이었다.
여왕의 마나가 몸에 닿자, 개미들은 즉시 피곤이 가시고 부상으로 인한 고통이 덜어지는 것을 느꼈다.
둥지의 어머니가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불러온 분노와 걱정에 눈이 뒤집힌 개미들은, 직군과 상관없이 적진으로 뛰어들어 날카로운 턱으로 몬스터를 공격했다.
10미터쯤 앞으로 이동한 여왕은 마침내 자신의 머리에서 의기양양하게 뛰어내렸던 병정 개미를 발견했다.
몬스터 무리에 한복판에 뛰어든 리로이는 이미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제가··· 제가 승리했나요?”
리로이가 물었다.
여왕은 리로이를 지키고 서서,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턱으로 막았다.
“아니란다, 아이야.”
여왕이 다소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다시 일어나서 싸워야 한단다.”
“···그렇군요.”
그 순간, 함정 속에서 검은색 그림자 몬스터들 수백 마리가 뛰쳐나왔다.
그림자 야수들이 검정색 촉수로 몬스터들을 붙잡고 다시 함정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모습은 마치 악몽의 한 장면 같았다.
이윽고 그림자 몬스터들은 모두 함정 밖으로 기어나와, 주위의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라로쉬의 새끼들이 도착했다.
거대한 악어 괴물들은 주둥이를 벌리고 불꽃을 뿜으며 그림자 펫들을 처리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곧 여기저기서 난전이 펼쳐졌다.
“여왕님! 조심하세요!”
어머니 옆에 도착한 슬론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우스운 소리 마, 슬론!”
빅토르가 비웃었다.
“이건 전투라고! 네 걱정이나 해!”
빅토르의 말에 동감하며, 여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악어 괴물들로 주의를 돌렸다.
놈들은 이 전투를 벌인 주역이었다.
여왕은 놈들에게 기꺼이 고통을 선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딱!
여왕 개미는 엄청난 힘으로 턱을 다물었다.
턱에서 난 소리가 전장의 소음 속에서도 뚜렷이 들렸다.
눈 앞에서 악어 괴물 하나가 우뚝 일어서자, 여왕은 놈을 향해 다가갔다.
동시에 여왕의 갑각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여왕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몸을 감싸는 푸른 색 마나도 점점 밝아져서 쳐다보면 눈이 아플 정도가 되었다.
여왕은 작은 몬스터들을 마구 짓밟으며 자신의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어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가라로쉬의 새끼들을 여럿 죽이면, 가라로쉬도 자신이 겪은 고통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악어들은 일제히 몸을 세우고 입에서 화염을 내뿜었다.
하지만 여왕의 갑각을 둘러싼 푸른 에너지가 더욱 밝게 빛나며 불길로 인한 피해를 막아냈다.
여왕은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갔다.
우직!
첫 번째 악어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여왕은 턱을 벌리고 앞으로 뛰어들어 놈을 세게 물었다.
톱니 모양의 사나운 턱으로 악어를 부수자 마자, 여왕은 바이오매스를 멀리 던지고 다음 사냥감을 향해 뛰어들었다.
[레벨 8 가라로쉬 용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시스템 알림이 머릿속에 울렸지만, 여왕 개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드디어 찾아온 복수의 순간을 만끽할 때였다!
“여왕님께서 너무 깊숙이 들어가셨어!”
슬론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빅토르는 주위의 아수라장 때문에 그 페로몬을 겨우 알아들었다.
여왕은 이제 빅토르와 슬론의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거리까지 멀어져 있었다.
다른 어떤 개미보다 더 멀었고, 심지어 코어 조작자들과 펫들보다도 더 적진 깊숙한 위치였다.
빛나는 갑각이 아니었다면 여왕의 위치를 찾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사태에 대처할 부대를 미리 준비해 뒀잖아.”
빅토르가 답답한 마음으로 슬론에게 말했다.
지금 자기가 여기서 슬론을 안심시키고 있어야 할 상황인가?!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 한복판인데 말이다!
빅토르는 늑대처럼 생긴 적이 휘두르는 발톱을 피한 후, 놈의 뒷다리를 턱으로 물었다.
뒷다리를 문 채 몸을 비틀어 최대한 피해를 입힌 다음, 턱을 풀고 뒤로 물러나 다른 개미들이 놈을 협공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안 보이는데?!”
슬론이 징징거렸다.
“바이브 선배를 찾으러 가고 싶어? 그럼 찾아봐. 우리는 남아서··· 싸우고있을 테니까.”
턱으로 적을 썰던 빅토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인간들처럼 입을 사용해서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 다행으로 느껴졌다.
입으로 말을 하다니,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안녕-안녕! 누가 날 불렀어?!”
두 지휘관 개미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커다란 병정 개미가 자신들을 위에서 굽어보며 말을 꺼낸 뒤에야, 바이브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셨군요! 가서 여왕님을 보호하셔야 해요!”
슬론이 소리쳤다.
바이브는 고개를 들고 앞을 살폈다.
“어··· 내가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게다가 빛나고 계시잖아! 너무 멋져! 와! 진짜 짱이다!”
바이브가 어머니를 보고 신이 나서 소리쳤다.
잠시 후, 바이브의 추종자들이 도착했다.
위원회의 개미들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둥지에는 항상 활기가 넘치는 바이브를 따르고자 하는 개체들이 존재했다.
마치 바이브를 도우라는 둥지의 ‘부름’이라도 받은 듯했다.
물론 위원회는 그 사실에 불만이 없었다.
바이브와 추종자들은 둥지를 위해 다른 개미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으니까.
바이브의 부대는 주로 병정과 정찰대로 이루어졌지만, 드물게 마법사나 힐러 개미도 있었다.
“조금만 앞쪽에서 싸워 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나 여왕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퇴로를 확보할 수 있게요.”
슬론이 애원했다.
“그럼-그럼! 재미있겠는데!”
바이브는 추종자들과 함께, 길을 막는 적들을 가차없이 쓰러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바이브는 한껏 고양된 상태였다.
전투 직전까지 사냥을 하느라 바빴던 바이브와 수행원들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휴식을 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처음에 바이브는 당연히 거부했다.
휴식?
말도 안되는 소리!
이렇게 상황이 바삐 돌아가는 와중에, 어떻게 가만히 쉴 수가 있을까?
그동안 바이브의 부대는 던전에서 끝없이 밀려드는 몬스터들과 싸운 뒤 바이오매스를 확보해 둥지로 운반하고, 곧바로 다시 사냥에 나가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사냥 중이 아닐 때에는 치고 빠지기 수법으로 몬스터 무리의 수를 줄이면서 몇 시간 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전투를 벌였다.
거의 사흘 동안 그런 식으로 쉴 새 없이 싸웠다.
그러니까 어쩌면 휴식을 취하는 편이 맞을지도 몰랐다.
부대의 힐러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기절을 했을 때에는, 정말로 이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이브의 부대는 방 하나에 모여 몇몇 병정 개미들(자기들 때문에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안타까운 친구들이었다)의 보호를 받으며 휴식을 취했다.
몇 시간 뒤, 바이브는 체력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다.
비록 전투의 시작은 놓쳤지만 괜찮았다.
빨리 싸우러 나가면 놓친 시간 정도는 만회할 수 있을 테니까!
“가자가자가자가자가자가자!”
바이브가 웃으며 소리쳤다.
부대의 개미들은 바이브를 따라 엄청난 속도로 적을 향해 돌진했다.
바이브는 지난 번 진화 후 가장 먼저 속도 오러 분비선과 다리 변이를 최고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기분은 정말이지 중독적이었다.
더듬이가 바람에 휘날렸다!
근처의 몬스터들이 질주하는 바이브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즐거워라!
바이브와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대원들은 이제 이런 질주에 익숙해져 있었다.
한 번도 대원들의 의견을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다들 자신과 마찬가지로 즐기고 있을 거라고 바이브는 생각했다.
“놈들을 죽여!”
바이브가 외쳤다.
대원들은 일제히 못생긴 악어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야호!”
바이브는 대선배가 그토록 싫어하는 악어 괴물의 배를 물며 환호성을 외쳤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선배가 놈들을 싫어한다는 점만큼은 확실했다.
바이브는 대선배의 뜻을 따를 수 있어서 기쁠 뿐이었다.
머리 위로 산성 용액이 날아와 앞쪽의 악어들에게 명중했다.
거대한 악어들이 불길을 뿜으며 반격을 시도했다.
또다른 악어들은 산성 용액을 뒤집어쓰건 말건 아랑곳 않고, 가까이 다가오는 개미들을 공격하기 위해 다가왔다.
온갖 감각들이 불협화음으로 섞인 채 주위를 가득 메웠다.
바이브는 그 감각의 바다를 마음껏 헤엄쳤다.
다양한 냄새, 시각, 소리가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오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쉰 마리의 대원들이 겁 없이 선두를 달리는 바이브의 뒤를 따르며 싸웠다.
옆구리에 긴 상처가 나고 더듬이 하나가 거의 잘릴 뻔했지만, 바이브는 멈추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앞으로!
앞으로!
바이브의 사전에 다른 방향은 없었다!
바이브는 좀처럼 한 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이 멍청한 악어들과 뒤엉켜서 싸우기는 싫었다.
더 달리고 싶었다!
질주 본능을 억누르지 못한 바이브는 발톱으로 부드러운 땅을 움켜쥐고 다리를 세게 밀었다.
다음 순간 바이브의 여섯 다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이브는 거대한 동체를 움직여, 눈 앞의 악어들을 지나쳐 달려갔다.
“느려-느려!”
바이브가 악어들을 놀렸다.
바이브는 대선배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전장 여기저기를 누비며 위기에 처한 개미들을 도왔다.
개미들은 몇 마리씩 무리를 지어서 몬스터들과 맞서고 있었다.
가라로쉬의 새끼들이 전장에 나타나자, 개미들이 처한 위험이 백 배는 커졌다.
오직 본능에 사로잡혀 날뛰던 멍청한 몬스터들과 달리, 악어 괴물들은 영리하고 잔인한 전술로 개미들을 공격했다.
그 뒤로 5분 동안, 바이브는 그야말로 온 전장을 누비며 싸웠다.
너무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다른 대원들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면서 부상이 점점 늘었지만, 바이브는 개의치 않았다.
이토록 즐거울 수가!
강력한 적들이 이렇게 많다니!
속도 오러를 전장에 뿌리고 다니는 바이브의 심장이 흥분으로 거세게 뛰었다.
바이브는 이쪽에서 몬스터의 다리 하나를 부러뜨리고 저쪽에서 악어 한 마리를 쓰러뜨리며, 전장의 혼돈 속을 누비고 다녔다.
한 자리에 계속 머물지도, 하나의 적을 오래 상대하지도 않았다.
진화 단계가 높은 커다란 덩치의 악어 괴물들이 연달아 바이브에게 도전했다.
하지만 바이브는 놈들을 비웃고 다른 악어를 상대하기 위해 바로 이동했다.
한편 전선 뒤쪽에서는, 그랜트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먹구름이 안 보이네.”
그랜트가 말하자, 멘단트가 짜증을 내며 턱을 딱딱거렸다.
“치유 중일 때는 좀 가만히 있어. 이대로 두 동강 나고 싶은 게 아니면 내가 치유 중일 때 움직이지 말라고!”
“미안해, 멘단트.”
그랜트가 사과했다.
멘단트가 너무 과민 반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랜트는 두 동강이 날 만큼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가 아니었다.
힐러 개미가 계속해서 더듬이를 통해 그랜트의 몸 안으로 치유 마나를 주입했다.
그랜트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카르모도가 언제, 어디서 벼락을 내리칠까?
처음 여왕이 등장했을 때에는 거의 곧바로 카르모도의 벼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여왕이 10분 째 전장을 휩쓸고 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분명 이유가 있었다.
뭔가 바뀐 걸까?
“마나 감지 좀 해 봤어?”
그랜트가 멘단트에게 물었다.
“내가 대답하면 더 이상 말 안하고 가만히 있어 줄래?”
힐러 개미가 대꾸했다.
“아마도?”
그랜트가 애매하게 말했다.
멘단트는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래, 지금도 계속하고 있어. 앞쪽의 방벽 너머에서 뭔가가 공기 중의 마나를 흡수하는 중이야. 아무래도 가라로쉬가 직접 나서기 전에 마나를 가득 충전하는 중인가 봐.”
“뭐라고?!”
찰싹!
“가만히 있으라고, 멍청아!”
멘단트가 화를 냈다.
그랜트는 아파서 바닥에 축 늘어졌다.
멘단트가 더듬이로 머리가 아닌 부상당한 부위를 때렸기 때문이었다.
“부상을 치유하는 게 아니었어?”
병정 개미가 투덜댔다.
“네가 마구 달려가서 죽는 건 둥지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지휘관 개미들은 할 일이 있잖아. 가라로쉬가 나타나면 우리는 마지막 방벽으로 후퇴할 거야. 그 전까지는 여기서 싸울 테고.”
“하지만 여왕님은?”
“여왕님이 네 말을 들으시겠어? 여왕님을 후퇴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건 아마 대선배님 뿐일 텐데··· 아마 이제 곧 깨어나실 거야.”
크르르르르르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포효 소리가 공기와 땅을 울렸다.
그 강력한 울림에 그랜트의 갑각이 진동했다.
“정말로 곧 깨어나셔야 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