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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기
모렐리아는 건설 중인 마을 회관에서 에니드를 만났다.
“힐러들은 그렇지 않아도 바빠요.”
에니드가 나무랐다.
“개미 힐러들이 매일 방문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죠.”
“나도 알아요.”
모렐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벌써 연속으로 사흘 째예요.”
“나도 안다고요!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죠?”
에니드는 펜을 내려놓고 젊은 여전사를 쳐다봤다.
“아이작은 멍청이고 당신은 전직 레기온 훈련병이니까요. 둘 중 하나는 자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아이작에게 바랄 수는 없겠죠.”
“그럼 날 다른 곳에 배치해 줘요. 주변 탐사나, 생존자 수색도 좋아요. 도시에 가서 레기온의 병력이 지상으로 올라왔는지 확인할 수도 있어요. 내가 잘해낼 수 있다는 걸 알잖아요.”
에니드가 손을 들어 콧잔등을 짚었다.
빌어먹을 일이 너무 많았다.
얼마 전 운 좋게도 종이를 손에 넣은 에니드는 노련한 상인답게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미 인구와 자원에 대한 집계를 끝냈고, 지금은 공식 문서의 기틀을 잡아가는 단계였다.
리리아 왕국은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률과 규칙이 없다면 에니드에게 이 세상은 다섯 번째 스트라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에니드는 사람들과 상의를 거쳐 경비 대원을 선발하고, 여러 가지 규제를 만들었다.
엄청난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추가 생존자들이 유입되고 있었다.
구조대의 작업이 성공한 덕분에 먹이고 재워야 할 주민들이 더욱 늘어났고, 이는 곧바로 추가적인 업무로 이어졌다.
사실 이 모든 일이 대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에니드조차 알 수 없었다.
마을에서 전반적인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에니드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에니드, 당신은 도움이 필요해요.”
“뭐라고요?”
에니드의 반문에, 모렐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니드는 지쳐가고 있어요.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어깨의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해요. 모든 걸 혼자 책임지기에는 일도 사람도 너무 많아요. 갈수록 더 심해질 테고요. 알잖아요.”
에니드는 한숨을 쉬었다.
“알아요.”
에니드의 어깨가 살짝 쳐졌다.
“나도 알고 있어요. 상단은 나 혼자서도 꾸릴 수 있었지만, 이건 훨씬 큰 일이니까요. 난 그저··· 만약 사람들을 소집해서 의회를 만든다면, 모든 일이 좀 더 공식적이 되기 시작할 거예요. 그럼 정치가 생길 테고, 권위를 놓고 다툼도 생기겠죠. 우린 그런 사태를 감당할 여유가 없어요.”
“시장이 과로로 쓰러지는 사태를 감당할 여유도 없죠.”
“우리 마을 최강의 전사가 매일 경비대장을 기절시키지만 않아도 내 과로가 많이 덜어질 텐데요.”
“엄··· 그건 그렇다 치고, 에니드가 걱정하는 것만큼 최악은 아닐 거예요. 여기 사람들은 결속력이 있으니까요. 난 이런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개미들이 우리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잖아요. 사람들이 행실을 조심하게 한다고요.”
“맞는 말 같기도 하네요.”
“맞는 말이에요.”
두 여인은 잠시 편안한 침묵에 빠졌다.
에니드의 집무실에 있는 유리 없는 창문을 통해 마을, 아니 이제는 소도시의 떠들썩한 활기가 들려왔다.
“난 당분간 마을을 떠나 있을게요.”
모렐리아가 말했다.
“지금 당장은 여기에 내가 필요한 일이 없으니까요. 주민들을 훈련시키고 던전 탐험을 이끄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지만, 도시에는 내가 가보는 편이 가장 좋을 거예요. 리리아로 가서 레기온과 접촉을 시도해 볼 생각이에요. 벌써 올라오는 중일 수도 있으니 운이 좋으면 중간에서 만나겠죠.”
시장이 잠시 모렐리아를 응시했다.
“티투스의 명성은 나도 익히 들어서 알아요.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면, 당신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러자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몬스터를 향한 레기온의 방침은 놀랍도록 명확하고 단순했다.
죽여라.
“레기온이 이 마을에 대해 모르는 편이 낫다는 말인가요?”
모렐리아가 천천히 물었다.
“만약 레기온을 만나면,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말이에요. 심연의 레기온이 개미들을 공격하면, 주민들의 부수적인 피해를 막기 어려울 거예요. 그건 모렐리아도 잘 알겠죠. 이곳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다시 일구려는 선량한 사람들일 뿐이예요. 개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받았을 뿐이고요. 그건 죄악이 아니죠.”
모렐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모렐리아를 쳐다봤다.
“뭘 믿기 시작한 거죠, 에니드? 그건 베인 사제나 할 법한 말인데요.”
에니드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봤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에니드가 한숨을 쉬었다.
“무엇이 신성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난 그저 여기 주민들과 정이 들었고, 그래서 다들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예요. 그건 모렐리아도 마찬가지잖아요, 아닌가요?”
모렐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
소포스 마을 방문은 좋은 경험이었다.
험상궂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소포스들은 하나같이 인심이 후했다.
매일 타이니, 크리니스, 그리고 내게도 바이오매스를 가져다줬다.
우리는 포르모와 포르모가 아끼는 펫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심지어 시간을 들여 내게 코어를 조작하고 법과 강력한 펫들을 재구성하는 법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소포스들의 코어 다루는 솜씨는 확실히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첫 번째 수업 이후, 나는 곧바로 소포스의 놀라운 기술과 능력에 경의를 표했다.
특히 놀라웠던 건 ‘코어 융합’ 분야였다.
내가 아직 잠금해제를 하지 못한 스킬 같았다.
소포스가 가진 최고의 펫들 중 다수는 여러 개의 코어를 융합해서 만든 결과물이었다.
코어 융합에는 다양한 장점이 있었다.
먼저 코어 여러 개를 조작하면 하나를 조작할 때 보다 더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다.
코어를 변화시킬 때마다 극복해야 하는 난관을, 소포스들은 ‘저항 장벽’이라고 불렀다.
변화를 더 많이 일으킬수록, 저항도 강해졌다.
하나의 코어에 열 가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두 개의 코어로 만들어진 몬스터에게는 같은 수준의 저항 장벽을 극복해서 스무 가지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그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니까.
포르모가 특히 강조한 부분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여러 개의 코어가 서로 잘 맞물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굉장한 노력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소포스들은 최종 결과물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동시에 여러 코어의 융합을 가능케 하기 위해 한 가지 변화에만 며칠, 혹은 몇 주를 투자하기도 했다.
실제로 코어 두 개를 가지고 어떤 변화를 만들어야 할지 토론하면서, 말다툼을 하거나 서로의 머리를 때리는 소포스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 다음 단계는 코어 세 개를 융합하는 거였다.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었다.
가장 우수하고 영리한, 최고의 능력치와 스킬 레벨을 갖춘 소포스만이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그렇게 만든 펫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예의 거대 지렁이가 있었다.
각 소포스가 한 마리씩 소유하고 있는 그 지렁이들은, 능력 있는 주인이 직접 만들거나 혹은 전문가가 제작한 펫이었다.
코어 세 개를 융합하려면 두 차례의 융합을 거쳐야 했다.
코어 두 개를 서로 잘 맞물리면서, 동시에 새 번째 코어를 잘 받아들일 수 있게 설계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퍼즐을 완성하고 나서, 그 안에 또 다른 퍼즐을 끼워 넣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렵고 복잡했다!
나는 얼른 이 기술을 시험해 보고, 둥지에도 알리고 싶었다.
코어 조작자들의 가치는 지금도 높지만, 이 지식들을 알게 되면 둥지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얼굴에 다 쓰여 있군. 이걸 시도해 보고 싶은 거지?]
포르모가 불쑥 내 생각 속에 끼어 들었다.
[···아마도요.]
[너무 서두르지 마라, 녀석아! 이 기술은 정신에 굉장히 큰 부담을 주고 높은 스킬 레벨을 요구해. 넌 아직 코어 수술 스킬만 있고 코어 융합 스킬은 잠금 해제도 못한 상태야. 코어 융합은 코어 수술 스킬의 단계를 한참 더 올려야 가능할 거라고. 그 전까진 시도하려는 생각도 하지 마.]
[손해볼 게 있나요?]
내가 항의했다.
[실패해도 코어를 낭비하는 건 아니잖아요. 망친 코어는 펫한테 흡수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다, 이 당나귀야!]
[당나귀요?!]
[모든 코어는 소중해! 그리고 어떤 코어들은 아주 희귀하지. 뿐만 아니라 스킬 레벨을 올리기 위한 경험치는 그 스킬을 올바르게 사용했을 때 더 많이 얻을 수 있어. 아무렇게나 시도해서 실패할 때보다 말이야!
실패 수백 번을 해서 스킬 단계를 올리는 것보다 성공 수십 번으로 끝내는 편이 훨씬 낫지! 만약 네가 둥지에 어 조작자들을 더 양성할 생각이라면, 아무렇게나 낭비할 코어가 없을 텐데?]
[어, 그렇죠. 없죠.]
[바로 그거야, 소년! 우리처럼 시간을 들여서 코어마다 완벽한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해. 그게 가장 효율적인 길이니까.]
[좋은 조언이예요··· 그런데 포르모의 지렁이를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배리? 하! 가라로쉬가 사라졌으니, 배리를 대적할 몬스터는 이 근방에 존재하지 않아!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그렇겠네요···]
실제로 ‘배리’는 별로 도움이 필요 없어 보였다.
거대한 지렁이는 마주치는 모든 몬스터를 커다란 몸통으로 깔아 뭉개거나, 한 입에 삼켜버렸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크리니스의 경험치를 올리기 위해 나온 거잖아요.]
[아! 그랬지!]
포르모가 탄성을 지르며 둥그런 이마를 탁 쳤다.
[배리! 멈춰라, 우리 국수!]
펫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통해서 따로 이야기해도 될 텐데, 나한테까지 다 들리는 생각으로 지렁이를 강아지 대하듯 부르는 게 조금 이상했다.
게다가 국수라···
거대한 지렁이가 뒤돌아서 스르륵 기어오며, 신이 나서 꿈틀거리는 모습은 더 이상했다.
[좋아, 크리니스. 이제 네가 활약할 시간이야. 가서 몬스터들을 박살내라고! 금방 변이를 끝내고 진화할 수 있을 거야.]
[네, 주인님!]
내 등에 앉아 촉수 두개를 꽉 쥔 주먹처럼 얼굴 앞에 들고 있던 죽음의 공이 금방 몸을 부풀리더니,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 안쪽에 도사린 악몽의 심연을 드러냈다.
[너도야, 타이니. 가서 스킬을 연습해. 크리니스의 사냥감을 너무 많이 뺏지는 말고. 이 몬스터들은 크리니스가 죽여야 더 많은 경험치를 주니까.]
[헝!]
타이니가 알았다는 뜻으로 으르렁댔다.
‘헝’ 소리 만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재주가 놀라웠다.
그 한 음절에서, 전투에 제약을 받는 건 별로지만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어서 기쁘다는 의미가 모두 전해졌다.
[너는?]
포르모가 물었다.
[아, 아니에요. 난 괜찮아요. 최근에 5단계가 되어서, 이 몬스터들로는 어차피 별로 경험치를 얻지도 못해요.]
[그렇군! 곧 너도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하겠어!]
[네에?]
[이 위쪽의 마나는 밀도가 너무 낮으니까! 벌써 많이 낮아졌는 걸! 우리 마을은 마나 밀도가 높기 때문에 네가 괜찮다고 느꼈던 것 뿐이야!]
크리니스와 타이니가 사냥을 하러 나간 동안, 나는 내 코어를 확인햤다.
포르모의 말이 맞았다.
MP가 깎이고 있었다!
보조 두뇌로 외부 마나 조작 스킬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는데도, 그걸로는 충분치 않은 듯 했다.
세상에!
좀 더 열심히 마나를 끌어오면 괜찮을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이제 넌 두 번째 스트라타 몬스터가 된 거야, 녀석아. 우리 마을에서 나가면 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걸 추천하지! 첫 번째 스트라타의 마나는 이제 네게 너무 약해! 약하다고! 스트라타 하나를 내려갈 때마다 엄청난 변화가 생길 거야. 차차 알게 되겠지만.]
[포르모 말이 맞는 것 같네요.]
[게다가 저 아래에 내려가면 너 같은 자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거야. 운이 좋다면, 가라로쉬보다는 제정신인 자들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