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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그라닌은 조작자의 원 전초 기지의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서 통과했다.
거대한 개미의 턱에 물린 채 운반되어 온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히 몬스터는 그라닌의 바위 살갗을 뚫지 않을 정도의 자제력을 발휘했다.
물론 화강암이 대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 재료는 아니었다.
그라닌이 애초에 피부의 재료로 화강암을 고른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피부가 망가진 채 동료들 사이를 걸어가기는 창피하니까.
그라닌은 발타가 전초 기지의 빛을 보고, 자신들을 맞이하러 나온 조작자 스무 명과 마주치기 전에 알아서 물러났다는 사실에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아니, 감사하다는 표현은 너무 나갔고···
다행이라는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산성 용액을 뒤집어 쓴 발타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던전 안에서 전사들과 조작자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물론, 화를 다스리지 못하던 발타의 표정을 떠올리면 이대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고위 조작자들은 이런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는 중이었고, 교단도 의도치 않게 주의를 끌었다는 점에서 혀를 찰 게 분명했다.
“그라닌 라주스가 지도자 트라이아드를 뵙기 위해 왔습니다.”
그라닌은 어두운 나무 기둥에 반짝이는 암석으로 상감 세공이 된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상반신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허리부터 아래로 늘어뜨린 예복을 입은 키가 큰 골가리 조작자 두 명이 문의 양 옆에 서 있었다.
둘은 동시에 몸을 돌려, 크고 무거운 석문을 하나씩 붙잡고 가볍게 잡아당겼다.
문 안쪽에는 전체가 황토색으로 꾸며진 멋스러운 사무실이 있었다.
종이와 각종 서적이 높이 쌓여 있는 기다란 석재 책상만이 유일하게 다른 색이었다.
그 책상에는 늙은 조작자 셋이 앉아 있었다.
“아. 라주스. 다시 보게 되어 반갑군.”
중앙에 있던 여자, 아이레트 플라민이 말했다.
“플라민, 여느 때처럼 반갑습니다.”
노력했지만, 그라닌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라닌은 높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항상 불편했다.
어쩌면 그것이 아직 중간 계급에 머물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는 자유롭게 말해도 괜찮네, 라주스. 교단이 조치를 취해서 이 전초 기지의 인원을 전부 우리 사람들로 채웠으니까.”
그라닌은 그 말에 크게 놀랐다.
“굉장히 많은 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텐데요.”
“물론 그랬지. 하지만 컬트의 지도부에서 대담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때가 왔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플라민의 왼쪽에 있던 쭈굴쭈굴한 조작가의 성마른 목소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런 시기에 전사의 원과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가?!”
전부 개미 때문이었다!
“탐험대를 지휘한 전사 대장의 성질을 돋운 건 내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라부스. 우리가 사로잡은 표본이 단독으로 저지른 짓이었죠.”
피부가 부서지기 시작할 정도로 늙은 오리딘 그라부스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 몬스터가 제 몸값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군!”
그라부스가 외쳤다.
“더 유력한 표본에게 산 채로 먹여야겠어!”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트라이아드의 세 번째 구성원이 그라부스를 진정시켰다.
“정보에 따르면 이 몬스터도 꽤나 유력하고, 게다가 환생한 영혼이라고 합니다. 함부로 무시할 만한 표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셋 중 가장 어리면서, 대부분의 경우에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조작자 버리티트 크라이슬라스가 중재자로 나섰다.
버리티트는 중재에도 꽤나 실력이 있었다.
그라부스가 씩씩거렸다.
“그 빌어먹을 도마뱀들은 우리가 좋은 표본을 보내도 전혀 못 알아볼 텐데 말이지. 말해보게, 라주스. 그 개미는 얼마나 오래 버틸 것 같나?”
그라닌은 눈에 띄게 망설였다.
플라민이 그라닌을 안심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조작자 라주스. 그 생물의 운명은 그대의 말 한 마디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네. 어려운 시기지만, 우리는 최대한 절차를 따르려고 노력할 걸세. 트라이아드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한 면담과 평가를 거칠 거야.”
그 말에 다소 안심한 그라닌이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이 생명체는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비밀스럽고, 의심이 많고, 쉽게 정보를 내주지 않으려 합니다. 물론 평소와 달리 갑작스럽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몬스터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이번 임무를 계획한 장본인인 그라부스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몬스터는 놀라울 정도로 유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소란을 일으키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다양한 변이와 스킬을 갖췄습니다. 코어 조작 레벨도 높아서, 강력한 펫 두 마리를 길러내기도 했습니다.”
“펫이라고? 완전 자원 낭비구만!”
“조작자 그라부스. 계속 끼어들면 아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트라이아드의 첫 번째 조작자로서 명령을 내리겠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플라스민이 말했다.
"방금 말한대로이 몬스터는 펫 두 마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중 하나는 지금 사라져서 찾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사라진 펫에 대해서는 몬스터가 말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별로 신경 쓸 건은 아니겠군.”
플라스민이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라닌이 동의했다.
“펫은 이 몬스터가 보유한 다양한 능력들 중 하나에 불과하오. 구사하는 마법 스킬도 꽤나 수준이 높았고, 그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한 점이 보였소. 그리고 대화 중에 두뇌를 여러 개 갖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차라리 생각 분산 스킬을 사용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나요?”
크라이슬라스가 당혹스러워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내가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 그런 스킬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능력을 갖춘 몬스터 같군. 이후의 시험에서 얼마나 좋은 성과를 낼지 궁금하네.”
“시험?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겁니까, 플라스민?”
“교단에서 시간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네.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고 이 세상의 경계를 벗어나려면 조만간 새로운 에인션트가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지.”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우리는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네. 모든 후보들을 시험할 걸세. 우리가 전력을 다해 지원할 최종 후보 하나를 결정해야 하니까!”
“그럼 나머지는...?”
“연료로 쓰는 거지.”
+
솔직히 내가 뭘 예상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설마 갇힐 줄 몰랐나?
···아니.
당연히 알았지.
기껏 몬스터를 잡아 놓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몇 가지 의문점이 따라왔다.
예를 들면, 왜 멀쩡히 돌아다니는 몬스터를 잡아서 죽이려고 한 걸까?
심지어 그 몬스터가 강해지도록 지원할 계획이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바위 인간들 중 다수가 그런 계획에 동참하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여태까지 내 경험상, 이 세계에는 ‘몬스터 vs 다른 모두’라는 구도가 확고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유가 뭔지 몰라도, 이 미치광들은 세상의 중심으로 내려갈 새로운 악당 몬스터를 만든 다음, 나머지 열 아홉 마리의 에인션트와 합류하게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가족을 부양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미 제국을 건설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외 바라는 게 있다면···
좀 푹 자고 싶었다.
굉장히 소박한 바람 아닌가?
물론 그 외에 다른 하고 싶은 일들도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나처럼 환생한 다른 인간을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물론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와 만났을 당시에 가라로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론 가라로쉬는 인간이었을 때도 그리 말이 잘 통하는 상대는 아니었을 것 같지만.
흠···
어쨌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환생한 인간들은 안타깝게도 개미가 아닐 가능성이 컸지만···
설사 위대한 개미 종족의 일원이 아니라고 해도, 잠깐 담소를 나누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던전에서 지낼 만은 한지?
가장 좋아하는 맛의 바이오매스는 뭔지?
아니면 지네가 얼마나 싫은지···
뭐 그런 소소한 대화거리도 있으니까.
어쩌면 이 수용소에도 나와 비슷한 존재가 있을지 몰랐다.
여태 들은 바에 의하면, 이전부터 이곳에 갇혀 있는 몬스터들이 몇 마리 있다고 했다.
바위 인간들은 그 몬스터들을 ‘표본’이라고 불렀다.
우리 같은 몬스터를 만날 때마다 연구를 한다고 하니, 여기 한 마리 정도 있을지도 몰랐다.
정신 마법을 사용해서 찾아볼까?
아냐,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는 말자.
이 바위들은 정신 마법 능력이 상당히 강한 듯했고, 그걸 활용해서 고약한 방법으로 공격을 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소포스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뭐, 소포스야 아마 나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테지만···
허리에 로브를 두른 친절한 바위 인간들은 (왜 이 사람들은 맨 가슴으로 다니는 거지? 왜 윗도리를 싫어하는 거야?!) 나를 잽싸게 둘러싼 뒤 서둘러 수용소로 호송했다.
이 ‘전초 기지’는 던전 통로의 벽을 깎아 만든 요새에 가까웠다.
전초 기지라거 부르기에는 너무 컸다···
주위를 제대로 둘러볼 시간도 없이, 나는 아래쪽으로 꺾여진 통로로 들어가 마치 감방으로 생긴 공간에 틀어박혔다.
물론 꽤 좋은 감방이기는 했다.
소포스가 펫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우리···
사실 우리라기 보다는 몬스터를 위한 일일 스파에 가까운 그곳보다야 못하지만, 대체로 나쁘지 않았다.
나처럼 커다란 몸집의 몬스터도 조금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음식과 물이 제공되었다.
잠을 잘 수 있는 부드럽고 푹신한 자리도 있었다.
창이 없고 벽이 단단한 건, 물리적인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한 걸로 보였다.
감방 위쪽에는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구름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위 인간 조작자 셋이 정말 돌처럼 가만히 서서, 나를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었다.
사생활이 없잖아!
몬스터는 화장실이나 샤워장을 쓸 필요가 없어서 천만 다행이다.
아니라면 엄청 창피했을 테니까!
사실, 저들이 저렇게 있기만 해도 잠들기가 불안했다.
셋 모두 강력한 정신 마법사였고, 내가 뭔가 수상쩍은 짓을 하면 바로 무시무시한 공격을 날려 나를 쓰러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 대화를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놈들은 내가 뻗은 소통의 연결 고리를 번번히 내쳤기 때문에 아직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결국 여기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정말 나를 자신들 편으로 설득해서 새로운 에인션트를 키운다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면, 이보다는 조금 더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뭐, 언젠가는 그러겠지.
나는 날 제대로 환영할 준비가 될 때까지 일단은 쉬기로 했다.
사실, 몇 차례 탈출도 고려해봤다.
그라닌을 인질로 데리고 가는 방안이 가장 끌렸지만, 당장은 골가리 조작자들 곁에 남는 편이 가장 안전한 선택지 같았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집에는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냥꾼들이 나를 쫓고 있는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개활지에서 잡힌 순간부터, 나는 저들의 수중에 있었다.
나는 부디 크리니스가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런 다음 내게 도움을 주러 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평소와 달리 둥지의 개미들이 보내는 기운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상당히 멀리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이제 골가리를 설득해서 풀려나거나(가능성은 적겠지만), 아니면 내가 놈들의 위대한 임무를 달성할 수 있을 정도로 유능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탈출인데···
도무지 생존할 자신이 없었다.
하···
정말 별로였다.
애초에 둥지에 머물면서 군체가 커가는 걸 도왔다면, 이런 멍청한 난장판에 빠질 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책임을 회피한 대가를 또 한 번 크게 치르고 있었다.
같은 실수를 또 저지르다니···
그때, 위쪽에 있던 돌 덩어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새로운 조작자 세 명이 바위 가슴을 내밀고 나를 구경하러 왔다.
나는 곤충의 장점을 발휘해서, 머리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미동도 없이 조작자들을 바라봤다.
그런 태도가 저들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조작자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계속해서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치는 않았지만, 이 세 조작자들은 내가 처음 봤던 삼인조보다 나이가 많을 것 같았다.
겉 피부가 얼마나 마모됐는지, 얼마나 색이 바래고 딱딱하게 굳었는지에 따라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뭔가 권위적인 인물들로 보였고, 즉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잠시 후 소통의 연결 고리 하나가 내게 뻗어 왔다.
할 일이 없었던 나머지 마나 감지를 계속 켜 놓고 있었던 덕에, 이 소통의 연결 고리를 형성하는 방식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뭐,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조작자 셋이 서로에게 연결 고리를 잇고, 동시에 셋 모두가 내게 연결고리를 뻗는 형식이었다.
그라닌과 그 동료들이 나를 공격했을 때에도 이런 방법을 사용했을까?
[인사를 전하오, 환생한 영혼이여. 그대를 여기로 돌연 데려오게 된 건 사과하겠소.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소.]
조작자 셋은 매의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투는 친근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만나서 반가워! 세상에, 나는 하루 빨리 에인션트가 되고 싶어!]
하!
낚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