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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지하의 도시국가 라일레에 위치한 레기온 본부는 모렐리아가 한번도 와본 적 없는 장소였다.
레기온 본부가 위치한 첫 번째 스트라타의 가장 깊은 곳, 두 스트라타 사이의 경계는 아주 강한 소수만이 출입할 수 있는 위험한 지대였기 때문이다.
모렐리아가 이끄는 용병들도, 지상과 가까운 개활지에서 스킬을 훈련하는 방법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탐험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작은 팀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사냥을 하면서 좀 더 깊은 던전에 닿으려고 노력했는지 떠올리자, 라일레의 장엄한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신이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싸우고 있는 동안, 레기온은 이 아래의 완벽한 요새에서 병력을 양성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도시는 순간이동 관문을 통해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지금 모렐리아가 보고 있는 범위도 지하의 거대하고 활기 넘치는 도시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모렐리아는 과연 여태까지의 노력이 헛수고였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오빠가 죽었을 때 레기온에서 뛰쳐나왔던 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그토록 유능하고 강할 뿐 아니라, 다정했던 오빠가 실패하고 죽었다는 사실에 모렐리아는 극심한 혼란과 슬픔을 느꼈다.
그 소식을 전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창백했고,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약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모렐리아의 마음이 흔들렸던 가장 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모렐리아는 던전에서 싸우다가 죽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지하에 발을 들일 때마다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다.
하지만 죽음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직접 보고 느끼는 건 굉장히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놀라운 곳이지, 그렇지 않으냐?”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모렐리아는 깜짝 놀랐다.
모렐리아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티투스가 옆으로 다가온 것이다.
모렐리아는 속으로 욕을 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저렇게 커다란 덩치로 조용히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어떤 스킬을 훈련 중인 걸까?
티투스는 모렐리아의 옆으로 다가와, 도시를 굽어보는 요새의 바깥쪽 성곽에 몸을 기댔다.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에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던전 안에 도시를 세웠다는 사실이 말이야.”
티투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토록 번성하고 안전한 도시가 지하에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 물론 나중에는 이런 장소가 판게라에 여럿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 중에는 라일레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한 곳들도 많다.”
“그런 곳들은 얼마나 깊이 있죠?”
모렐리아가 물었다.
“도시들 말이냐? 저마다 다르지. 대부분의 경우에는 도시를 건설한 주체에 따라 달라진단다. 라일레와 같은 독립적인 도시국가는 보통 첫 번째나 두 번째 스트라타에 있지. 내가 아는 바로는 세 번째 스트라타에도 하나 있고.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거기도 레기온이 있는 것으로 안다.”
“정말요? 세 번째 스트라타에도요?”
모렐리아는 깜짝 놀랐다.
세 번째 층은 불과 재로 가득해서 생명체가 살기 힘들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만요.”
모렐리아가 잠깐 고민한 끝에 말을 이었다.
“그 말은 더 깊은 층에도 도시가 있다는 건가요? 독립적인 도시 국가가 아닌 경우에는요.”
티투스는 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던전의 깊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모렐리아의 눈은 전투와 모험을 향한 갈증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걸 보자 티투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티투스도 모렐리아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곳을 탐험하고, 레벨을 올리고,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런 열정 덕분에 티투스는 레기온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그 누구보다 깊은 던전까지 탐험할 수 있었다.
티투스는 그런 경험을 자신의 두 자녀에게도 제공하고 싶어했다.
아들의 죽음은 티투스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겼지만, 언젠가 모렐리아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티투스는 다시 한번 모렐리아에게 합류를 권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모렐리아는 자신과 너무 닮아서, 강요하려 들면 오히려 도망칠 터였다.
바위를 두 번 구워 만든 벽돌만큼이나 완고한 성격이었다.
“던전에는 많은 비밀이 있지. 네 번째, 다섯 번째 스트라타에도 대도시들이 있다. 특히 다섯 번째 스트라타에는 거대한 제국이 존재한단다. 떠다니는 섬들 위에.”
“지하에 어떻게 떠다니는 섬들이 있다는 거죠?!”
모렐리아가 아연실색해서 물었다.
“하하!”
사령관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가 금세 멈췄다.
그리고 누가 자신의 모습을 봤는지 확인하기 위해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누가 웃는 모습을 목격해서 자신의 평판에 금이 가는 사태는 없을 듯했다.
사령관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렐리아를 다시 돌아봤다.
“섬 이야기를 하면 다들 그렇게 못 믿더구나.”
티투스가 미소를 지었다.
모렐리아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깊은 던전에 대한 정보는 리리아에서는 몹시 접하기 어려웠다.
설사 이런 정보를 아는 사람이 있더라도,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이 속한 조직을 위해서만 활용했을 것이다.
레기온조차 신병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정보니까 말이다.
티투스가 던전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다니 이상했다.
모렐리아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언제나 입이 무거웠던 아버지였다.
아무리 던전에 대해 물어봐도, 제대로 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모렐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속셈이시죠?”
티투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누구? 나 말이냐? 나한테 무슨 속셈이 있다고?”
모렐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인지 아시잖아요. 내가 레기온에 다시 합류하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내 모험심을 자극해서요?”
사령관의 두 눈이 빛났다.
“그래.”
사령관이 기다렸다는 듯 인정했다.
어차피 속내를 들켰다면, 그대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네 어머니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과 떨어져 사는 것이 쉽지는 않더구나. 너와 함께 생활하고 싶지만, 강요하지는 않기로 했다.
하지만 너와 네 오빠가 레기온에 자원했을 때, 난 그토록 기쁠 수가 없었단다. 그 뒤에 비극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리고 너까지 떠나자, 나는 자식 둘을 모두 잃어버린 기분이었지.”
여태까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위험한 주제였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자 모렐리아의 마음 속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몇 년 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이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럼 이제는 무슨 일이 일었던 건지 말해줄 수 있나요? 아버지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요. 다 알고 있어요! 가족이 왜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네 오빠는 탐험 중에 사망했다. 그게 레기온의 공식 발표였지. 그걸 의심하는 이유가 있느냐?”
티투스는 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결코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당연히 의심스럽죠! 정말 오빠가 첫 번째 스트라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믿으라고요?! 오빠는 나보다 훨씬 강했고, 심지어 아버지도 거기 계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죽을 수가 있죠? 어떻게 첫 번째 스트라타에서 레기온의 후보생이 죽을 수 있냐고요?!”
모렐리아가 레기온과 아버지를 떠난 이유가 바로 그래서였다.
오빠의 죽음에 대한 공식적인 이유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티투스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다시 내뱉았다.
딸의 눈빛에서 읽히는 고통이 티투스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티투스는 늘 자신의 어깨에 진 의무를 다해왔다.
그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해도, 자신의 본분에 충실했다.
사령관은 부디 모렐리아가 충분히 강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알고 싶다면···”
모렐리아는 티투스의 느릿느릿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다.
“레기온에 다시 합류해야 한다.”
모렐리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티투스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오빠의 죽음에 대한 레기온의 공식적인 발표와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상 모렐리아가 들었던 이야기가 완전한 진실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셈이기도 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만약 레기온에 다시 합류해서,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대답을 들을 수 있다면···
모렐리아는 아버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주먹을 가슴에 올리고 레기온식 경례를 올렸다.
“복귀를 신고합니다, 사령관님.”
티투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찬가지로 경례를 했다.
“복귀를 환영한다, 훈련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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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의 세포가 찢어졌다가 다시 붙는 듯한 괴로운 고통은 이미 사라지고, 공허한 노곤함만 남았다.
모렐리아는 사람이 이렇게 피곤할 수 있는지 여태껏 몰랐었다.
하지만 모렐리아의 완고한 성격은 무기력하게 의식을 잃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의지력으로, 모렐리아는 기어코 두 눈을 뜨고 있었다.
모렐리아는 돌로 만들어진 욕조에 가만히 누워 위를 바라봤다.
천장에 새겨진 마법 문자가 내는 빛이 점점 약해지면서, 어둠이 내려앉았다.
모렐리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뻗었다.
근육 구석구석이 쑤시고, 몸이 제발 움직이지 말라고 비명을 지르는 듯했지만 모렐리아는 아랑곳 않았다.
모렐리아는 마치 병자처럼 천천히 일어서서 벽에 기댔다.
욕조 안의 농축된 마나 용액이 하수구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마나 용액은 이 끔찍한 과정을 통과할 다음 훈련병을 시험하기 위해 재사용될 것이다.
모렐리아는 깊은 숨을 들이쉰 후, 맨발을 돌 바닥에 질질 끌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침내 두 다리로 버티고 선 모렐리아가 고개를 들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의 표정에서는 감정이 숨김 없이 드러났다.
티투스의 눈빛에는 자부심이 넘쳤지만, 동시에 슬픔도 담겨 있었다.
이 순간 또다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것이다.
“축하한다, 군단병.”
티투스의 목소리는 모렐리아만큼이나 지친 듯했다.
왠지 눈가가 촉촉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웃을 힘도 없었지만, 모렐리아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모렐리아가 말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중에 티투스가 해준 말에 따르면, 모렐리아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돌 바닥에 머리를 찧지 않도록 서둘러 부축해야 했다고 한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모렐리아는 작은 방 안의 딱딱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방 안을 둘러보자 소박하고 꾸밈 없는 가구들이 보였다.
누워 있는 침대는 넓지만 딱딱했고, 벽은 텅 비었지만 한 가지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바로 소박한 쇠고리에 걸려 있는, 검정 가죽으로 만들어진 레기온의 제복이었다.
그 옷을 보는 순간, 모렐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제복을 갖춰 입은 모렐리아가 방을 나오자, 복도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따라오거라.”
티투스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