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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티투스는 옷을 차려입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골가리의 하이 블레이드는 예의범절과 전통을 중시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자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정복을 완벽히 갖춰 입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 거만한 바위 인간은 티투스가 갑옷에 광을 내고 만나주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조통신 장치의 조립이 끝나갈 시점에서야, 티투스는 정교한 레기온 룬 갑옷을 벗고 사령부 천막 앞에 앉아 레기온 단원들을 지도하며 갑옷의 버클, 판, 광물을 닦기 시작했다.
티투스는 기계적으로 가죽 끈을 정리하고, 버클에 광을 내고, 금속 판을 닦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티투스의 눈길은 갑옷이 아닌 야영지를 살피고 있었다.
레기온에 5년만 복부해도 자는 동안 갑옷을 정비할 수 있다고 하는데···
티투스는 오죽할까.
작업을 마친 티투스는 다시 갑옷을 입었다.
마지막 금속판을 제자리에 착용한 뒤에야 안도감이 들었었다.
“다시 갑옷을 입으니 편안한가, 사령관?”
알버튼이 근처의 자리에서 물었다.
티투스는 무거운 갑옷이 몸을 누르는 것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전장에서 갑옷을 벗고 있으면 뭔가 잘못된 기분이지.”
티투스가 말했다.
티투스는 손으로 빠르게 갑옷을 살폈다.
이쪽 판을 당겨보고, 저쪽을 손바닥으로 밀어보고, 관절 부위와 가죽 끈을 확인했다.
로어마스터가 얼굴을 찡그렸다.
“마나를 조심하게···”
알버튼이 입을 열었다.
“알고 있네.”
티투스는 알버튼이 더 잔소리를 하기 전에 얼른 말을 잘랐다.
알버튼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었다.
“가끔은 걱정이 되네, 친구. 조심하게.”
티투스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해서 갑옷을 살폈다.
한참 후에야 알버튼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갑옷 뒤에 있는 가죽끈과 여밈을 확인해주었다.
“언제나 같이 완벽합니다, 사령관님.”
알버튼이 주름진 손으로 견갑을 치며 말했다.
“갑옷을 입을 건가?”
로어마스터가 코웃음을 쳤다.
“뭐하러? 내 능력은 연구와 문서 작성이지, 검술과 마법이 아닌데.”
티투스는 몸을 돌려 알버튼의 눈을 보았다.
“갑옷을 입게.”
티투스가 명령했다.
“이번 임무는 왠지 이상해. 하지만 나는 누구도 잃지 않을 걸세. 이 명령을 전달하게. 모든 이가 항상 완전 무장을 갖추라고. 예외 없이.”
로어마스터가 씩씩대며 항의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대신, 티투스는 몸을 돌려 통신 천막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티투스는 턱에 힘을 풀고 화를 가라앉혔다.
알버튼의 잘못이 아니었다.
마나 밀도가 올라가고 있었고, 갑옷이 그 힘을 흡수해서 티투스의 몸에 주입하고 있었다.
티투스는 의무병을 시켜 자신을 포함한 모든 레기온 단원들을 주기적으로 검진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나는 인간의 몸에 다양한 효과를 일으킨다.
이 중 흔한 현상 한 가지가 ‘마나 중독’이었다.
특정 마나 밀도에 몸이 적응하면, 마치 몬스터처럼 마나를 소모하게 된다.
알버튼이 걱정하는 건 레벨이 높은 사람일수록 경계해야 하는 증상, 바로 마나 중독이었다.
티투스는 빳빳한 천막 입구를 들췄다.
안에서는 브락시스가 나란히 늘어선 수정구 사이에 코어를 끼워넣는 작업을 감독하며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조심해, 조심하라고! 그게 깨지면 너 같은 애송이의 여섯 달치 급료가 날아가는 거야!”
“소리 좀 그만 지르시면 훨씬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닥치고 일해!”
어린 마법사 도넬란은 눈을 굴리며 귀중한 코어들을 수정구들 사이에 끼워넣었다.
코어가 자리를 잡자, 모든 수정구가 ‘우웅’ 소리를 내며 살아났고, 코어는 주위의 마나를 빨아들이며 바람 소리를 냈다.
“준비됐나?”
티투스가 입구에서 중얼거렸다.
“아, 사령관님. 딱 맞춰 오셨습니다. 준비됐습니다. 잠시 충전할 시간을 주시면 연결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티투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통신 설비 앞에 서기 위해 천막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도넬란이 브락시스의 주의 깊은 관찰 아래 작업을 마무리하는 동안, 티투스는 이번 작전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수록 분노가 끓어올라, 억지로 화를 억눌러야 했다.
정보를 숨겨?
레기온으로부터?
그 누구도 심연의 레기온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돌의 제국이 단단히 착각을 했나보군.
“접속했습니다, 사령관님.”
브락시스가 무미거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뜨고는 있지만, 동공에 초점이 없었다.
수정구에 정신을 연결해서 골가리 야영지와의 연결점을 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연결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브락시스는 텅 빈 눈으로 사령관을 돌아봤다.
티투스는 브락시스의 정신이 자신의 정신에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의지력을 다스리며, 티투스는 의식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걸 허용했다.
어디론가 끌려가는 느낌, 먼 곳으로 휩쓸리는 느낌이 든 뒤, 어느새 티투스는 어둠과 안개에 휩싸인 채 하이 블레이드 발타 앞에 서 있었다.
골가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검을 꺼내어 손바닥에 올려놓은 후 몸을 숙였다.
“생명의 돌 앞에서 그대를 맞이하오, 레기온의 티투스.”
티투스는 오른손 주먹을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부딪히며 레기온 식 경례를 했다.
“심연의 레기온이 안부를 전하오, 하이 블레이드.”
티투스가 말했다.
최소한의 인사치레를 끝낸 후, 두 남자는 자리에 서서 서로를 관찰했다.
티투스는 골가리들에게 익숙했다.
호전적인 종족이고, 레기온 안에도 다수가 있었다.
그래서 티투스는 상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티투스의 표정에서 경멸의 감정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하이 블레이드 발타가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너무 일찍 부르신 것 아니오, 사령관. 레기온이 벌써 어려움에 처한 것이오? 처리하기 너무 어려운 벌레들이라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이오?”
티투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골가리를 가만히 노려봤다.
하지만 발타는 평정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유지했다.
“심연의 레기온은 정보를 숨기는 일을 반기지 않소.”
그러자 골가리의 눈썹이 올라갔다.
“돌의 제국이 레기온으로부터 정보를 숨겼다고 고발하는 것이오? 아주 대담한 주장이오, 사령관. 사령관의 명예를 걸고, 또한 증거를 가지고 하는 말이기를 바라오.”
뱀 같은 골가리의 입에서 명예라는 말이 나오자 티투스는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티투스의 얼굴은 여전히 침착했지만, 눈빛만은 타오르는 듯했다.
“만약 당신네 제국이 고의로 우리를 호도했다고 내가 확신했다면, 이미 영사에게 탄원을 올려 즉시 토벌군 파견을 요청했을 거요.”
티투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도시 몇 군데가 불바다가 되고 나면, 돌의 제국도 앞으로 동맹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깨닫게 되겠지.”
“감히?!”
“이미 해본 일이오.”
두 지도자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이 공간에서는 존재하지도 않는 무기를 쥐려고 손을 움찔거렸다.
한동안 긴장이 흐른 끝에, 티투스는 팔짱을 끼고 편하게 섰다.
“하지만 돌의 제국이 우리에게 고의로 거짓 정보를 전해준 건 아니라고 생각하오.”
티투스는 자신이 뭘 의심하고 있는지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만약 하이 블레이드에 대한 의심을 표명하면, 발타는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방어하려 들 터였다.
그러니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레기온이 본분을 망각한 것 같군. 레기온은 제국을 도와 이 벌레 떼를 박멸하기 위해 이번 작전에 참여했소. 여기 와서 우리를 협박하는 게 아니라.”
“부정물을 만났소.”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나왔다.
하이 블레이드의 눈에 분노가 차 올랐다가, 빠르게 가라앉았다.
“어디서?”
“우리는 부정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소. 부정물이 있다면 전투의 양상이 상당히 바뀔 수밖에 없는데 말이오.”
“어디서 봤냐니까?!”
발타가 성을 냈다.
티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상대방을 응시했다.
잠시 후 골가리가 평정을 되찾았다.
“놈은 우리 가족을 모욕하고, 나의 동족을 다치게 하고, 우리 가문에 치욕을 안겼소. 내 손으로 놈을 직접, 천천히 파괴할 것이오. 어디서 발견했소?”
발타가 물었다.
티투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소한 원한과 앙심들.
골가리들은 늘 이런 식이었다.
피부만큼이나 고집불통에 융통성이라고는 없었다.
“협력 전에 먼저 확실히 해둘 점이 있소.”
티투스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이 원정에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소. 이제야 나도 이해가 되는군. 하지만 한 가지를 확실히 말해두지.”
티투스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
침묵.
“레기온은 당신네 제국의 요청에 따라 이 둥지가 통제에서 벗어나기 전에 박멸하러 왔소. 당신들의 도움을 받든 아니든, 우리가 할 일은 그것뿐이오. 만약 우리가 그 일을 하는 걸 방해한다면··· 내가 직접 당신들을 치겠소.”
티투스는 날씨 이야기를 하듯 감정 없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건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은 정보들을 내놓으시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직접 당신들의 소중한 돌 광산을 찾아가, 거기 있는 골가리를 자비롭고 존엄하게 모두 죽인 뒤 명예롭게 매장해 주겠소. 야영지만 나가면 곧장이니 말이오.”
하이 블레이드의 눈이 적의로 반짝였다.
“알겠소.”
+분노의 고함 소리가 레기온 야영장 주변의 바위를 뒤흔들었다.
아우릴리아는 다른 이들과 달리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해하려 허둥지둥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사령관을 오랫동안 수행한 아우릴리아는, 이런 소리를 듣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물론 놀라기는 했다.
고함의 크기와 분노의 깊이가 역대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고 있어서, 남들처럼 당황하지는 않았다.
“뭡니까?!”
아우릴리아가 몸을 돌리자 티투스의 딸, 모렐리아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린 광전사는 자기 귀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튼 채였다.
아우릴리아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아버님이 화내는 걸 들어본 적이 없나?”
모렐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없습니다.”
아루릴리아는 잠시 놀랐다가,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보통 집에서 더 화를 많이 내는 건 어머니 쪽이었다.
티투스는 저런 화를 전장에서만 내는 모양이었다.
곧 티투스는 노도와 같은 기운을 내뿜으며 통신 천막에서 나왔다.
아우라가 너무도 강력해서, 노련한 레기온 단원들도 뒷걸음을 칠 정도였다.
모렐리아는 평소에 좀처럼 동요하지 않는 아버지가 분노로 가득한 표정을 하고 야영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놀란 눈으로 지켜봤다.
터널 벽에 다다른 티투스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주먹으로 바위를 때렸다.
쾅!
바위가 폭발했고, 돌 조각이 야영장 안을 날았다.
분개한 사령관의 팔은 어깨까지 벽에 파묻혀 있었다.
티투스는 비인간적인 힘으로 팔을 벽에서 단숨에 꺼낸 뒤, 조금 전까지 깨끗했던 갑옷을 뒤덮은 먼지가 짜증나는 듯 팔을 툭툭 털었다.
아우릴리아는 티투스가 잠시 산만해진 그 틈을 노려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사령관 앞으로 걸어간 다음 빠르게 경례했다.
“티투스 사령관님.”
“그만두게.”
티투스가 으르렁거렸다.
아우릴리아는 자세를 완벽히 유지했다.
발은 똑바르게, 어깨는 아래로, 경례하는 팔은 정확한 각도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사령관님.”
“내가 성질을 낼 때마다 와서는 침착하게 한답시고 있는 대로 격식을 차리지 않나. 거슬리네.”
“하지만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거슬린다는 걸세.”
티투스는 눈을 감고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티투스는 분노를 몰아내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긴장한 근육에서, 뛰고 있는 심장으로,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로, 마침내 폐로.
티투스는 폐에 담긴 공기에 감정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상상을 한 후 한 번에 숨을 뱉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눈에 띄게 차분해졌다.
물리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했던 아우라가 한층 누그러져서, 근처에 서 있는 게 그리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는 약해졌다.
사령관이 내뿜던 분노의 파도가 누그러지자, 아우릴리아는 숨기지 못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몰라도, 상당히 심각한 일인 듯했다.
“동맹인 돌의 제국과 통신을 하신 걸로 압니다만...”
아우릴리아가 말하는 동안, 모렐리아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골가리가 언급되자, 티투스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순식간에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상태로 돌아왔다.
“그랬지.”
티투스는 잠시 말을 멈춰서 감정이 제대로 다스려졌는지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레기온에게 이번 공격에 참여해 달라고 연락을 해 왔을 때, 통신을 담당하던 가문이 정보를 숨기고 있었던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