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해치지 않아요! -->
2.
아카데미를 다니게 된지 일주일째. 요즘 나는 매우 피곤한 상태이다. 이유는 당연히 시도때도 없이 쫒아오는 카일론스 때문이리라. 그의 집착은 아침부터 시작된다.
"대련 하자."
아카데미 정문을 지나는 나를 발견한 카일론스는 긴 다리로 성큼 다가왔다. 부담스럽게 잘생긴 얼굴로 내게 흥미를 가지는건 좋은 일이지만, 그 흥미가 대련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좀 많이 곤란하였다.
"싫다니까요!"
일주일 동안 시달린 덕분에 이제는 익숙해지긴 개뿔, 끈질기게 따라오는 카일론스 때문에 피곤해죽겠다. 세리아는 지금 뭐하나, 어장관리 상태가 많이 허술하다. 지금 물고기가 뛰쳐나왔잖아, 빨리 잡아가! 처음으로 세리아의 도움을 받고 싶어졌다.
"따라오지 마요!"
카일론스를 뿌리치고 열심히 도망쳤다. 이제 도주는 일상이였기에 꽤나 달리기 실력이 늘었다. 이러다가 마라톤 선수로 장래희망을 바꿔야 하는거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아카데미의 복도를 뛰고 있는데, 익숙한 뒤태가 보여 큰소리로 외쳤다.
"아렌!"
내 구세주! 나는 활짝 웃으며 아렌을 불러세웠다. 아렌은 고개를 갸웃뚱 거리며 뒤를 돌아보았고, 나를 발견 하자마자 웃으며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라델?"
"잠깐, 나 좀 도와줘!"
아렌 뒤로 서둘러 숨은 나는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카일론스를 노려보았다. 어리둥절 하게 나와 카일론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아렌은 의문 섞인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무슨 상황이긴, 내가 위험한 상황이지. 나는 설명을 하는 대신 아렌의 팔을 꽉 잡고 애처롭게 그를 올려다 보았다. 최대한 불쌍한 척해야한다. 그래야 마음 약한 아렌이 나를 도와줄것이다.
"카일론스 좀 막아줘."
멍하니 나를 보던 아렌은 대충 상황을 알아챘는지 카일론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일론스는 여전히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약간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아렌에게 말했다.
"비켜."
"안되겠는데요."
소드마스터 앞에서 여유롭게 미소짓고 있는 아렌이 대견스럽다. 역시 능력있는 남자! 나는 속으로 아렌을 응원하였다. 제발, 카일론스 좀 쫒아내줘, 그래야 내가 살아.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신경전을 벌이는 두사람이였다. 나는 아렌의 팔을 꽉 쥐고 어서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이제 좀 있으면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였다. 카일론스도 학생이니까 강의시간이 되면 포기하겠지.
"이제 가보셔야 할테데요?"
"칫."
복도의 학생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남은건 우리 세사람 뿐이였다. 결국에 카일론스는 혀를 차며 복도를 걸어 나갔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아렌의 팔을 놓아주었다.
"매번 고마워."
"아니에요.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주세요."
역시 다정해...! 세리아보다 이쪽이 훨배는 천사같았다. 흑심없이 오로지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다정함이였다.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아렌에 어깨를 토닥였다.
"너도 부탁할거 있음 언제든 말해."
이제는 어느정도 친해졌기에 아렌과 가벼운 스킨쉽 정도는 할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하는거지만, 아렌도 별로 신경쓰는거 같지 않았다.
"아, 잠깐. 다음 마법 수업인데...!"
망했다. 그 교수님 깐깐하기로 유명하던데!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렌에게 작별을 고하고 복도를 달려나갔다. 어쨌든 오늘의 대련 집착은 어느정도 일단락 된거 같아서 다행이였다.
하지만, 카일론스 와 더불어 다른 골칫거리도 있었는데...
"라델 학생, 다시 해보세요."
앞서 설명하자면, 나는 마법을 지지리도 못한다. 마법부 학생이라면 기본중에 기본인 파이어볼 정도는 쉽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교수님을 따라 열심히 해봐도 작은 불씨하나 안나와주니 미칠지경이였다.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백발의 교수님은 곤란하다는 듯이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교수님의 눈치를 보며 주문을 외웠지만, 역시나 어떠한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 다시 한번."
손을 부들 거리며 나를 포기하지 않는 교수님께 외치고 싶었다. 교수님, 저는 마법의 전혀 재능이 없어요! 저를 그만 포기해주세요! 하지만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으신건지 교수님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도록 시켰고, 결국에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펑, 마치 과학자가 화학 실험을 하다가 실패한 것 같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절대 화학수업을 한것이 아니다. 단순히 마법 주문을 외웠을 뿐이였다. 그런데 지금 왜 강의실 안이 전부 잿더미가 되어있나요...?
"...라델 학생."
"네, 교수님."
다행히도 다른 학생들은 교수님이 보호한건지 멀쩡한 모습이였다. 문제는 교수님의 얼굴이 도깨비처럼 무서워졌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오늘 벌로 도서관 정리를 하도록 하세요, 알겠죠?"
"네..."
결국 강의실 하나를 태워먹고 벌을 받게 되었다. 마법 싫어, 짜증나! 다른건 어느정도 하겠는데, 마법이 문제였다. 실력은 하나도 늘지 않고, 이렇게 사고만 쳐버리니 포기하고 싶었다.
"...알렉아!"
강의실을 나와보니, 멀리서 볼을 감싸고 멍하게 서있는 알렉이 보였다. 손을 흔들며 다가가니 알렉은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웬일이래? 그렇게 튕기던 얘가?
"라델, 들어봐! 아까 세리아를 봤는데, 더 예뻐진거 있지? 머릿결도 너무 좋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누가 세리아 추종자 아니랄까봐. 알렉은 활짝 웃으며 연예인을 목격한 듯 즐겁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오직 세리아의 관련된 이야기만 활기차게 하니 조금 마음이 쓸쓸했지만, 언젠가 차이면 그만두겠지 싶어 주머니에 미리 챙겨놓은 귀마개를 꺼냈다.
"그래서 말이야, 세리아가..."
"그렇구나."
알렉에게는 미안하지만 세리아 이야기는 너무 지루해서 못들어 주겠다. 나는 슬쩍 귀마개를 끼고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나는 귀마개를 빼고 잠잠해진 알렉에게 말하였다.
"저 근데 알렉..."
"응, 왜그래?"
나는 수줍게 두손을 모으고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나, 도서관 정리 해야하는데 좀 도와줄..."
"아, 맞다. 약속이 있었네, 그럼 이만."
저 매정한 자식! 지 할말만 다하고- 듣지는 않았지만- 그냥 휑하니 가버렸다. 이럴줄 알았으면 억지로 끌고가는 거였는데!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도서관으로 발걸음 옮겼다.
*
"대련."
아이구, 깜짝아.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하고 있는데, 카일론스가 깜짝 방문을 와버렸다! 나는 식겁하며 뒷걸음을 쳤다. 책 더미를 품에 안고 있기에 차마 도망은 갈수 없었다. 일단은 카일론스를 최대한 말로 타이르는게 좋을것 같았다.
"대련은 할수 없습니다."
"왜?"
"저는 목숨이 하나니까요."
카일론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속이 터질지경이다. 나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대신 답답함을 참고 책정리를 다시 시작하였다.
"대련하자."
무시하자, 무시.
책을 하나 꽂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때 마다 계속 따라온다. 오른쪽으로 이동해도 졸졸. 왼쪽으로 이동해도 졸졸. 계속해서 따라오는 카일론스가 신경쓰여 죽을것 같았지만, 내 모든 신경을 책 꽂는 일에만 집중하였다.
하지만 자신보다 훤칠이 큰 남성이 계속 따라오는데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마치 대형견이 내 뒤를 따라다니는 기분이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카일론스에게 부탁하였다.
"지금 책정리하고 있으니, 얌전히 있어주세요."
자유분방한 카일론스가 과연 내 부탁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해보았다. 책을 꼭 끌어 안고 간절함을 가득 담아 말하였더니, 카일론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엥, 진짜요?"
믿을수 없어서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카일론스는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여전히 나를 주시하고 있긴 했지만, 그가 내말을 들어주는것은 꽤나 놀라운일이였다.
"빨리."
내가 넋놓고 있으려니 카일론스가 재촉하였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책정리를 시작한 나는 혼란으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뭐...지?'
이상했다. 원래 세리아 말만 들어야하는거 아닌가? 확실히 아직 소설이 전개된지 초중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남주 후보가 악녀의 말을 잘 듣다니, 뭔가 이상한데...
의문을 느끼며 책을 꽂아 넣고 있었다. 그때 한적하고 조용한 도서관 안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놓으라고!!"
뭐지 싸움인가? 책을 꽂아 넣는걸 멈추고 책장 사이로 도서관 입구를 쳐다보았다. 보이는건 하늘색 웨이브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와 우락부락한 몸을 지닌 남학생이였다.
"대체 내가 왜 싫다는거야?!"
왠지 고릴라가 연상되는 남학생은, 가녀린 미녀의 손목을 쥐고는 처절하게 외쳤다. 아무래도 고백했다가 차인 것 같은데, 질척거리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늘색 머리 미녀는 화가 난 얼굴로 남학생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못생겨서 싫다고!!"
참으로 현실적이고 슬픈 이유였다. 나는 남학생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힘내요, 이름모를 남학생! 나는 마음 속으로 남학생을 격려했다.
"감히 내 고백을 차?!"
차이고 인신공격까지 당한 남학생은 바지주머니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었다. 칼이였다. 작고 날카로운 칼. 분노로 이성이 날라가버린 남학생은 칼로 미녀를 위협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였다. 격려했던거 취소. 뭐야, 저 양아치는!
위기 상황을 목격한 나는 그냥 못본체 할수 없었다. 직접 나가서 도와주고는 싶지만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맨몸으로 저런 거구한테 달려 들었다가는 한번에 골로 갈것이 틀림없었기에 나는 카일론스를 불렀다.
"카일론스."
작은 목소리로 불렀는데도, 그는 순식간에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저 미녀 좀 도와줘요."
카일론스에게는 부탁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걸 따질때가 아니였다. 나는 위기상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부탁하였다.
"....?"
'내가 왜?' 라는 표정이다. 카일론스는 전혀 구해줄 의향이 없는것 같다. 나는 답답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어쩔줄 몰라했다. 그냥 이판사판으로 내가 뛰쳐나갈까?
"저 여자애 구해주면, "
거의 뛰쳐나가기 직전인 나를 멈춘건 카일론스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카일론스를 쳐다보았다. 그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내 부탁 들어줄거야?"
부탁? 나는 순간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저 미녀를 구할수 있는건 카일론스 뿐이였고, 당연히 나는 그의 부탁을 들어줄수 밖에 없었다.
카일론스가 내게 부탁할 만 한 것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열심히 생각을 해봐도 딱 한 가지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오, 세상에.'
카일론스의 얼굴이 의기양양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내게는 선택권이 없다. 결국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끄덕일수 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매번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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