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타이밍 좋은날. -->
3.
노을이 지면서 붉은빛이 조용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가을 바람이 불어와 몸을 살짝 떨었다. 손으로 팔을 문지르고 싶었지만, 나만을 비추는 푸른색 눈동자가 신경쓰여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군."
짧은 침묵이 지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극히 간단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얼굴에 당혹감이 서려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겠지. 자기를 좋아한다며 계속 따라다니던 귀찮은 여자가, 이제는 면전에다 싫다고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나 같아도 어이없겠다.
탁해진 눈동자가 잠시 나를 훑었다. 내 말이 진실인지 파악하는 중인 것 같았다. 나는 흔들림 없이 에든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의 안도감이 떠오른다.
"뭐, 그렇다면 상관없이 일할수 있겠군."
황태자는 그리 말하더니 다시 자신이 일하던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제야 온몸의 긴장을 풀수 있었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근육통과 더불어 긴장이 풀려 다리가 흐물거렸다.
후들 거리는 다리를 겨우 옮기다가 잠시 우뚝 멈췄다. 학생회실은 꽤 넓었고 나는 내가 어디 앉아서 일해야 하는지, 또 뭘 해야하는지 몰랐다. 다시 말걸기는 싫지만 나는 일을 해야했다. 그렇기에 서류를 집중하며 읽고있는 황태자에게 다시한번 말을 붙여야 했다.
"저는 어디에 앉아요?"
질문에 답은 오지 않았다. 황태자는 나를 보지도 않고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로 옆에 있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 앉으라는것 같았다. 뭐야, 저태도는.
불만은 많았지만 차마 반항할 용기는 없었기에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로 향했다.
'으음, 어쩌지.'
책상에는 높게 쌓인 서류 더미가 있었다. 아마도 이번 파티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는 듯 했다. 나는 에든을 따라 눈으로 대충 서류를 훑었다. 헉, 예산도 나와있는건가.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한 금액을 보고 이번 파티가 얼마나 성대하게 열릴지 예상이 되었다.
"황태자 전하, 이제 뭘해야 하죠?"
에든은 고운 미간을 좁히고 내게 시선을 고정하였다. 계속 질문하는게 영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다. 나도 질문만 하는게 답답하긴 하지만 모르는 걸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는 억울함에 말을 덧붙였다.
"교수님께 아무 얘기도 못들었거든요."
"...거기 쌓여있는 서류를 정리해라."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에든은 내게 관심도 없다는 듯이 다시 일에 전념했다. 학생회장이라 바쁜건 이해하지만, 무심한 태도에 열불이 나는건 어쩔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일이나 열심히 해야지. 나는 기지개를 크게 펴고 손가락을 풀었다. 그리고는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 하기 시작했다.
방대한 양에 머리가 어질거렸지만, 이런 잡일이 공부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오, 나 이거 적성에 맞는듯.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고 척척 정리되는 서류들을 보니 뿌듯함 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나는 정리를 다 끝낼 수 있었다. 기쁜 나머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에든을 바라보았다.
"다 했습니다!"
에든이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나를 본다. 희귀한 표정이기에 나 또한 놀라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에든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벌써...?"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책상 위에 놓여진 서류를 손으로 두드렸다. 일정하게 정리된 서류들을 보며 에든은 한동안 넋놓고 있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흠, 생각보다 쓸모있군."
"이정도는 간단하죠!"
에든의 미소와 의외에 칭찬을 듣고 자신감이 상승하였다. 나는 팔짱을 끼고 당당히 말하였고, 그런 나를 본 에든은 더욱 미소를 짙게 하였다. 아까와 다르게 불길한 미소였기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좋아, 그러면 저기 있는 서류들도 해놔."
에든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종이가 뭉텅이로 모여있었다. 윽, 이것만 다하면 귀가하는거 아니였어? 경악으로 얼굴을 물들인 채 서류 더미를 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절규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천천히 할걸. 생각해보니 에든은 사람을 참 잘굴리는 남자였다. 먼 훗날, 황제가 된 후에도 자신의 신하들을 마구 굴리던데...내가 그 연습대상이 된것인가!
"집에 가고 싶어요."
"다 하면 보내주지."
이 망할자식아! 나는 이를 바득 갈았다. 반항할 힘은 없지만 노려보는건 가능했다. 나는 적의를 가득 담아 에든을 째려보았다. 저 나쁜 황태자! 아까는 쫒아 보낼듯이 눈치를 줬으면서 지금은 쓸모있다고 나 붙잡아 두는거야?
이런, 파렴치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서류들을 바쁘게 정리했다. 무슨 직장인도 아니고 이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나 자괴감이 들었다. 결국에는 해가 지고 난 뒤에야 저택으로 귀가 할수 있었다. 분명 저 인간은 미래의 악덕 상사가 될것이다.
*
"눈밑에 다크서클이 있군."
"누구 덕분인데요."
운도 참 나쁘다. 아침부터 이 인간의 얼굴을 보다니. 여유롭게 걸어와 말을 거는 것 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이 인간, 나한테 서류 뭉치를 선물로 주네...?
"이게 뭔가요."
"파티 일정하고, 그날 준비해야하는 물품 목록."
"저보고 다 확인하라고요?"
당연한거 아니냐는 듯한 눈빛에 나는 속으로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진짜로 욕은 할수 없었기에 대신 불만을 제기했다.
"너무 사람을 막 굴리는거 아닌가요, 황태자 전하?"
진심을 담아 쏘아 말하니, 황태자가 눈을 피한다. 에휴, 어쩔수없지. 학생회 일을 돕겠다고 한거 나였으니까. 나는 서류를 품에 안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보니, 이제는 이름으로 안부르는군."
화제를 돌릴려는 건지 에든은 능청스럽게 다른 주제를 꺼낸다. 꽤나 제멋대로이며 뻔뻔한 자태였다. 황족 특유의 거만함이 엿보이기에 내 옆에 이남자가 황태자가 맞긴 하구나 싶었다.
근데 이름이라...원래 라델은 황태자를 항상 이름으로 불렀다. 좋아하는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는건 당연했다. 하지만 난 에든을 좋아하기는 커녕 솔직히 불편했기에 되도록 이름으로 안부를려고 했는데...
"왜요, 불러드려요?"
"아니, 됐다."
상대가 원한다면 불러줄려고 했는데, 에든도 바로 거절하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 편히 서류를 들고 읽었다.
"끄, 악?!"
정말 순신간에 벌어진 일이였다.
무언가 발에 걸려 몸이 휘청거렸고,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가뜩이나 몸 상태도 엉망이고, 피곤한 상태였기에 나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녀린 여주인공이 된 심정이였지만, 아쉽게도 나는 악녀였다.
"대체 누가..."
주저 앉은 채로 위를 살짝 올려다보니 곱게 휘어진 눈꼬리가 익숙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웃는 얼굴에 나는 오한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세...리아?"
당혹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세리아를 쳐다보았다. 청초하게 웃고 있는 세리아가 서둘러 입을 가리며 무릎을 굽혀 나와 눈 높이를 맞추었다.
"괜찮아요, 라델? 미안해요, 제가 잠시 멍하게 있다가..."
수준급 연기였다. 아까 웃고 있던게 거짓말 같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허..."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버버 거리며 세리아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새 주위에 몰린 학생들이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뭐야, 이 쪽팔리는 상황은.
"어떡해요....도저히 못일어나겠어요?"
가증스럽게 걱정 하는척을 한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대 때릴까 하다가,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에 꾹 참았다.
여기서 화내면 내 좋은 이미지는 영원히 작별이다. 나는 입술을 잘끈 깨물다가 심호흡을 했다. 그래, 지금은 참자. 여기서 화내봤자 내가 손해지.
"세리아."
웃자, 웃어. 웃는 얼굴이 최고다. 나는 최대한 활짝 웃었다. 주위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간혹가다 붉어진 얼굴이 곳곳에 보였는데 왜그런지는 내 알바가 아니였다. 나는 지금 발목이 매우 쑤셨고, 쪽팔림은 극에 달린 상태였다. 어서 웃는 얼굴로 상황을 모면하고, 이 가증스런 얼굴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괜찮나?"
오, 의외로 내게 먼저 손을 내민 건 황태자였다. 그래도 사람이긴 했는지, 나를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다. 조금 망설이다가 에든이 내민 손을 그냥 잡을까 생각한 순간, 검은 물체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라델."
"아, 깜짝아."
멀리서 나를 봤는지 순식간에 달려온 카일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이런 상황에서 까지 대련하자는 건가 싶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데, 예상외에 행동을 보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잡아."
카일은 자신의 커다란 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너무나 의외에 행동이였기에 나는 눈을 꿈뻑이며 카일을 쳐다보았다. 그 무심하고 남을 전혀 신경안쓰는 카일이 지금 손을 내밀어 준거야?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 눈앞에는 두 남자가 손을 내밀고 있었고, 나는 한명의 손만 잡아야했다. 에든이냐, 카일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다른 여학생이 본다면 행복한 고민이라고 생각할 만 한 상황이였다.
여기서 누굴 고르든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내게 좀 더 편한 사람을 잡고 싶었다. 그렇기에 나는 카일의 손을 덥썩 잡았다. 카일은 힘을 주어 나를 일으켜 주었고, 비틀거리며 난 그의 품에 안겼다.
"가자."
보건실에 가자는 말을 굉장히 함축적으로 말한 카일이였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갈곳없는 에든의 손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약간 통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날 부려먹더니, 쌤통이구만..! 물론 입밖으로 그 말을 꺼내기에는 내 용기가 2프로 부족했다.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하는 에든에게 시선을 떼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세리아가 어떤 표정인지 볼려고 했으나 왜인지 불쾌할 것 같기에 포기했다. 아까 날 내려다 보던 웃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생각보다 더 무서운 여자같았다.
========== 작품 후기 ==========
항상 선추코 감사합니다.
이전 페이지
이전 편
메뉴 화면
다음 편
다음 페이지
loading img
조아라 뷰어
m.joara.com
(5/2 삭제예정) 그 악..